<고향의 봄>, 이원수
<오빠 생각>, 최순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은 이원수 (1911-1981)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 생각>은 최순애(1914-1998)
가 소년소녀시절에 지은 동요이다.
마산과 수원에 살던 10대 두사람은 편지로 사연을 주고 받다가 훗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부부는 3남3여를 두었다. 장남 이경화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미국 뉴 멕시코주 앨비커키에 살고 있고 두 딸은 경기도 오산, 군포에 살고있다. 이원수는 딸 많은 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넷,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 있다.
목수인 아버지(이문술)을 따라 경남 양산, 창원, 김해, 마산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고향의봄의 배경이 되는 곳은 창원의 소답동이다.
그곳은 꽃이 많아 '꽃동네'로 유명했는데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를 배경으로 동시를 썼다고 한다. 그 일대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가득했고 새터라 부르고 고택의 앞길을 '이원수길'이라고 한다.
마산에 살던 16세의 소년 이원수는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라는 잡지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투고하였고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동요가 되었다. 그런데 한 해 전인 1925년 <어린이> 11월호에 최순애의 (오빠 생각)이 당선되었고 이 동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 이원수보다 최순애가 문단 6개월 선배인 셈이다.
이원수는 (오빠 생각)이란 동시가 마음에 들었다. 같은 잡지에 실렸다는 핑계로 최순애에게 편지를 썼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7-8년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다. 1935년 어느날 이원수는 최순애가 사는 수원으로 가기위해 기차표를 끊었지만 어이없게도 만나기로한 그날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만나기로한 그날 최순애는 숄을 두르고 윗옷에 꽃을 달고 기다렸으나 못만나게 되었다. 최순애보다 8살 많은 오빠 최영주는 (배재고보, 니혼대 졸) 이원수라는 문학 소년의 재주를 알아보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동생과 결혼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최영주 집안은 수원에서 큰 과수원을 했고 딸들도 이화,배화,동덕을 유학하였다. 최영주는 서울에서 지내는데 주말이면 수원본가로 내려왔고 온 가족이 오빠를 그렇게 기다렸다고 한다. 최영주는 <어린이>잡지사에서 방정환과 함께 일을 하였다한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때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에서 최순애는 비단댕기로 썼는데 오빠 최영주가 비단구두로 고쳤다고 한다.
이원수는 마산공업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하였으나 독서회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고 최순애와 결혼을 하였으나 살길이 막막했다. 다행히 처가에서 집을 사라고 큰 돈을 보내주었지만 생활비로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함안에서 장남 이경화를 낳았고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후 도미하여 벨 연구소, 항공사 엔지니어로 크게 성공하고 뉴멕시코에서 살고있다고 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으시고 제일 처음 가르쳐주신 단어가 소,말,아버지,누나, 소란 단어를 가르치면서 말은 빠르게 달리지만 인내력이 없고 죽어서도 별볼일 없지만 (일본과 같이) 소는 어려움이 있어도 잘 참고 견디며 느린 거북이 빠른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기듯이 소가 말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저의 사촌누님이 최씨댁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잊어버린 옛 이야기를 월간조선 2018년 7월호에 상세하게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