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平居士 李資玄
우선 그의 시를 하나 소개한다.
樂道吟(도의 즐거움을 읊다)
家住碧山岑-내가 거처하는 곳은 푸른 산 기슭 從來有寶琴-이전부터 전해오는 보배로운 거문고 있어 不妨彈一曲-한 곡조 타는 것도 무방하지만 祗是少知音-이 소리 아는 사람 얼마나 되리
李資玄의 호는 息庵, 淸平居士, 고려 문종 때에 급제하였으나 29세에 大樂署丞이라는 높은 벼슬을 던지고 청평사로 들어와 은거해버렸다. 예종이 이자현을 만나 묻기를 "몸을 닦고 천성을 기르는 묘법이 무엇인지 듣고 싶구려."라고 말하자 이자현은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성을 기르는 방법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나이다 (養心莫善於寡欲)"라고 대답하였다. 예종은 이자현이 은거를 그만두고 출사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茶와 香과 법복을 하사하였다. 예종이 얼마나 그를 흠모하였는지 그에게 하사한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願得平生見-평생에 한 번 만나 보기를 원했으나 思量日漸加-그리운 생각 날로 더 하였도다 高賢志難奪-높은 선비 지조를 꺾기 어려웠으니 其奈余心何-한스런 내 마음 어찌 하리요
인종도 그를 아껴 병이 들자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眞樂이란 시호를 내렸으나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에서 선도를 즐겼다. 요즘 세태는 장관 하나 해도 그 앞에 굽실거리는데, 고려 때는 이러했다.
강원도 청평사는 청평거사인 이자현의 호에서 절 이름을 따 왔고, 지금도 절에 남아 있는 청평사 연못은 이자현의 솜씨라고 한다. 李仁老는 破閑集에서 이자현에 대해 '재상의 문에 몸을 일으켰으나 뜻은 늘 紫霞(자색 안개)에 잠겼다. 殷元忠을 따라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춘천의 청평산이야 말로 遁世之境이라는 말을 듣고 이곳에 들어가 문수원을 꾸미고 살았다'고 적고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청평사 문수원 중수비 뒷면에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한 작용이 縱橫無盡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 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참으로 구름 같이 매이지않고 살다 간 丈夫의 일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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