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 왕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하 24:8-20
8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0 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 그의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의 왕 여덟째 해이라
13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 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18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요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20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왕하 24:8-20 / [예루살렘의 제 1차 함락] 여호야긴은 18세에 왕이 되어 겨우 3개월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다로 예루살렘 사람 엘라단의 딸이었다. 9) 여호야긴은 자기의 선왕들과 똑같이 여호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악한 일들을 하였다. 10) 여호야긴이 왕이 된 직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11) 그의 군대가 먼저 와서 예루살렘 도성을 완전히 포위한 뒤에 느부갓네살이 그곳으로 왔다. 12) 그러자 여호야긴이 자기의 어머니와 대신과 장군과 신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서 느부갓네살왕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이때가 ㄴ) 느부갓네살왕 8년의 일이었다. (ㄴ. BC 597년) 13) 바벨론 왕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가져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미 예언하신 대로 솔로몬이 성전에 금으로 만들어 두었던 기구들을 모조리 깨뜨려 버렸다. 14) 또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에서 지도층에 속하는 모든 사람과 부자들을 1만 명이나 포로로 붙잡아 끌어 가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들을 비롯하여 유능한 기능공들도 사로잡아 갔다. 그는 가난하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만 남겨 두어 더 이상 독립을 주장하는 반란이 일어날 수 없게 하였다. 15) 이렇게 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왕과 그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들과 그의 신하들과 유다 지도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어 갔다. 16) 그 밖에도 7천 명의 부자와 1천 명의 유능한 기능공들을 붙잡아 갔는데, 특별히 대장장이들은 모두 잡아갔다. 그리고 무기를 쓸 수 있는 사람들도 모두 잡아갔다. 17) 그는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라고 불렀다. 18)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이 되어 11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인데 립나 사람 예레미야의 딸이었다. 19) 시드기야는 자기의 형인 여호야김과 똑같이 여호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악한 일들을 하였다. 20) 이제 유다 멸망의 날이 다가왔으니 마침내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에게 분노를 터뜨리어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셨다.
유다 19대 왕 여호야긴과 20대 왕 시드기야는 므낫세의 죄를 버리지 못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은 재위 기간이 3개월에 불과하였고, 시드기야는 11년만 재위했습니다.
여호야긴의 악정(8-9) 여호와께서 유다를 버리신 이유가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당대에 멸망시키지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벧후 3:9). 그러나 여호야긴은 유다 14대 왕이었던 므낫세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로 인하여 쇠사슬에 매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환난을 겪었던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여호야긴의 재위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여호야긴은 3개월간 왕위에 있었지만 즉위 이전부터 활동하던 선지자들의 회개 메시지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친과 조상들의 악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긴의 최후를 ‘천하고 깨진 그릇’에 비유했습니다(렘 22:28).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10-17) 여호야긴이 악정을 행할 때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들에 의하여 포위되었습니다. 전에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점령하려고 군대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2).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직접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에 여호야긴은 항복하고 성전과 그의 왕궁 보물을 내어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내시들과 권세 있는 자들과 용사들과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왕위를 박탈하고 숙부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그를 시드기야로 불렀습니다.
시드기야의 통치(18-20)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지 않았으며, 목을 곧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대하 36:12-13). 그는 버려야 할 므낫세의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 죄를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패역함으로 인하여 바벨론의 침입을 허용하셨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계속 악을 쌓아갔습니다.
적용: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는 므낫세의 죄를 끊지 못하여 패망의 길로 갔습니다. 당신도 끊어버려야 할 악습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둥소리가 나야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천둥지기’라 했습니다. 산골짜기 같은 데에 있어서 물길이 닿지 않아,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입니다. 평평하고 기름진 땅은 대지주들이 차지한 경우가 많았고, 가난한 농부들은 소작을 부쳐 먹거나 물길이 닿지 않는 천둥지기에서 벼를 길러야 했습니다. 때로는 절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일에 한없이 매달려 발버둥 쳐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노력했던 일들이 갑자기 허무하게 느껴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우리들 삶에 천둥이 내려치는 그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긴
손재호 목사 / 왕하 24장 8-17절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배반한 여호야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야김을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긴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호야긴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자신과 어머니와 그의 신하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들까지 다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그의 나이가 십팔 세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다스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여호야긴도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심판하시는 것도 여호와의 말씀대로 됩니다. 오늘 본문 10-13절을 보면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니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이 바벨론 왕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솔로몬이 만든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다 파괴된 것은 아니고 바벨론에 노략당하여 간 것도 많습니다만 이렇게 파괴가 되었다고 기록하는 이유는 에스겔서에서 본 대로 여호와의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우상으로 더럽혔기 때문에 바벨론 왕을 통하여 파괴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누가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기명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다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는 성전까지도 다 파괴하여 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삼일 만에 짓겠다고 하시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요 2:19).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여 만든 성전이라도 우상이 가득하니 친히 부수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참된 성전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성전이십니다.
오늘 본문 14-17절을 보면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과 그 모친과 백성의 지도자들과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로인해 비천한 자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힘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을 다 잡아 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야긴의 아자비 곧 숙부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름을 고친 것은 느부갓네살의 봉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도 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22: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다 왕의 집’이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이 다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다윗의 왕위에 앉을 일을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집이 망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 22:6-9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내가 정녕히 너로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을 만들 것이라.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병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면 이방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섬겼기에 이렇게 망했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도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속화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추구합니다. 그로인해 재물과 온갖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맛 잃은 소금처럼 버리워져 짓밟히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야긴과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 22:21-22절을 보면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안할 때에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것은 어려서부터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런 모든 악으로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레미야 22:24-30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니야’가 바로 여호야긴입니다. 각주 2)번에 보면 예레미야 24:1절과 역대상 3:16절에서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을 가리켜서 ‘여고냐’라고 하고 있고, 열왕기하 24:6절과 8절에서는 ‘여호야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긴이 여호와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빼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로잡혀 가게 하시고 이 사람의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실제로 자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역대상 3:17-18절에 보면 그에게는 자식이 일곱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왕이 될 자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가고 나서 바벨론 왕이 그의 숙부를 대신하여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야긴과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의 끝에 항상 놀라운 약속에 대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레미야 23:1-4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말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목자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양들을 흩어버리고, 몰아내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응하심으로 왕이 폐위가 되고 포로로 잡혀감으로 양들도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양떼들을 다시 모아 오신다고 합니다. 그들 위에 목자를 두심으로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릴 일이 없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목자를 세우시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예레미야 23:5-8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오히려 다윗을 창조하신 다윗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 땅 곧 바벨론으로 쫓겨났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야긴 왕이 비록 악을 행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이러한 약속으로 인하여 여호야긴 왕이 고개를 들게 되는 일이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열왕기하 25:27-30절을 보면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 이월 이십 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로잡혀간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내고 그의 머리를 들게 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여 주신다고 합니다.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일평생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고 그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죄를 지어 포로로 잡혀간 왕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알게 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5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서 다시 여호와의 말씀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온 자들 위에 다윗의 언약을 따른 선한 목자를 세워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언약대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시는데 어떤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무엇을 인식하게 됩니까? 우리는 출애굽한 자들이 아닙니다. 제2의 출애굽이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자들은 이 세대가 악한 세대임을 압니다. 따라서 이 악한 세대를 사랑하다가 이 악한 세대에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자기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하를 말씀대로 창조하시고 말씀대로 이끄시며 말씀대로 결론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악한 세대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건지심을 받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우리 주님의 구속의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이 악한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게 하시고 오직 우리 주님께 두며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호야긴과 같이 그 시대 유다 백성들과 같이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세세토록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사로잡혀 가고
열왕기하 24:1- / 곽면근 목사
Ⅰ. 사로잡혀 가고
1. 16대 왕 요시야
요시야가 8살에 왕위에 올라 31년을 통치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딱 두건인데 하나는 22~3장에 나오는 성전 수리에 이은 종교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23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전쟁에서 죽는 사건입니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했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성경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요시야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면 여러 우상들과 신전들을 제거했다는 것을 강조할 뿐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선대 왕들 즉 14대 므낫세와 15대 아몬은 친앗수르 정책을 택한데 반해 요시야는 친바벨론 정책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요시야가 선택을 잘한 셈이 됩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주전 621년이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주전 612년에 앗수르가 패망합니다. 애굽이 앗수르를 치기 위해 올라올 때 요시야가 막아선 때가 주전 609년, 그 전쟁에서 요시야가 죽습니다.
2. 17대 왕 여호아하스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고 온갖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고 수백 년 만에 유월절을 지키기도 해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는데 실제로는 여호와의 신앙이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새로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죄인들의 기준에 근거하면, 신을 위해 대단한 일을 했으면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당연히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강한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는 여호와 이외에 그 많은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여러 신들을 제거하는 것은 각 신들이 주관하는 각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요 각 기능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과연 다른 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했다면 여호와가 요시야를 얼마나 도와줄지 궁금해 하며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나라는 결코 강력해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보다 커지지 못했고, 바벨론부터 강대국이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동안 별로 힘이 없던 애굽보다도 세지지 못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의 종교정책은 완벽히 실패한 것이요, 여호와의 뜻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십삼 세에 왕이 되었는데 통치 기간이 불과 석 달이고 애굽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3. 18대 왕 여호야김
애굽에 의해서 왕이 엘리아김은 애굽에 의해서 이름도 여호야김으로 바뀌었습니다. 애굽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당연히 친애굽 정책을 써야 했고 우선은 애굽의 바로 느고가 요청한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요시야의 두 아들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두 살 터울이었는데 두 형제의 행적이 32, 37절처럼 똑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앗수르는 패망해서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고 바벨론과 애굽이 서로 경쟁을 하니까 유다로서는 눈치를 보면서 상황에 따라 조금 유리해 보는 쪽에 붙었다가 상황이 바뀌면 다시 유리해 보이는 쪽에 붙는 것을 반복하다가 바벨론은 배반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판단착오였습니다. 주전 605년에 애굽과 바벨론이 당시의 패권을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데 바벨론이 이기고 애굽이 패한 것이 24장 7절입니다.
4. 19대 왕 여호야긴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불과 석 달만에 바벨론에 의해 폐위가 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아직 유다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애굽이 유다의 내정을 간섭해서 왕을 사로잡아 가고 대신 새로운 왕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운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19대 왕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바벨론에 의해 새로운 왕이 세워집니다.
Ⅱ. 누가 왕인가?
1.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이 국가 또는 민족 또는 공동체로서 역사에 등장하게 된 시초는 출애굽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약 400여년 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애굽을 벗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들이 나라를 지켜보고 다스려보겠다고 시작한 제도가 왕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정의 끝이 이스라엘의 대표인 왕이 애굽으로 잡혀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도록 진두지휘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제도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의 결과로 입애굽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애굽에서 노예된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자유민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하신 최초의 일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본토 친천 아비 집에 바로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지역적으로 따지자면 아브람은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 지역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아들을 낳고 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에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의 후손은 정반대로 가나안을 떠나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의 앞과 뒤를 어떻게 대조하고 있는 지가 보이실 것입니다.
2. 왕정 제도의 의미
사사기의 마지막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나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표현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자신들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사와 왕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기에 이스라엘이 어려운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는 하나님의 대행자요, 사사들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이 제안하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세우신 것도 아닙니다. 왕은 전적으로 인간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자신들과의 관계에서 배제한 것입니다.
3. 누가 왕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정제도를 허용하시면서 ‘과연 누가 왕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하는 왕, 때로는 세습을 통해 이어지는 왕, 때로는 반역을 통해 이어지는 왕을 모두 허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인물,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정책을 모두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이 해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막아서 시도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결론은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사로잡혀 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으로 잡혀 가면서 나라가 패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존재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하나님이 왕의 책임과 역할을 해오셨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배우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패망을 또 다른 계시의 사역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책임과 역할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