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 려원
사람은 누구나 몸 안에 거대한 양초 하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생명이란 양초가 피운 불꽃같은 것이어서 뜨겁게 타오르거나 가만가만 타오르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꽃을 피워낸다. 어쩌면 죽음은 타버린 양초의 꿈인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천수를 누리는 이, 사람의 몸 안에 남아있는 생명의 양초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노화와 죽음은 과학적으로 염색체의 텔로미어 길이와 관련된다고 하는데 질병이나 노화로 인한 죽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양초가 제대로 타오르기도 전에 갑자기 부는 바람에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린 셈이다.
달력을 벽에 걸 때마다 생명의 덤에 대해 생각한다. 빛바랜 것들이 벽에서 분리되고 산뜻한 잉크 냄새나는 새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365일은 주어지는 당연한 숫자처럼 여겨지지만 어떤 절박함의 순간이 찾아오면 더 이상 365일은 평범하고 사소한 숫자가 아니다.
생명의 덤을 청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생명에도 덤이란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던 날, 도화 빛 얼굴의 젊은 여인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던 날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생기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 되고 만다.
“아직 젊네요.” 병동 수녀님이 침대 발치에 적힌 나이를 보고 말씀하신다. ‘아직’이라는 말은 어떤 것에 견주어 ‘아직’일까? 남은 생에 견주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아직’이라는 것일까? 다행히 내 안의 양초는 여전히 타고 있다. 그때 이후 달력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한 해를 ‘덤’이라 생각했다. 더 걸어야 할 시간들이 잉여로 주어져서일까 똑같은 거리가 달라 보였다.
‘덤’이란 물건을 사고팔 때 가격을 깎아주는 대신 물건을 몇 개라도 더 얹어주는 것을 말한다. 덤을 받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마도 덤과 함께 전해진 봉투 안의 온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가는 야채 가게 아주머니는 눈보라가 치든 태풍이 불든 상관없이 노점을 차린다. 공판장에서 갓 떼어온 싱싱한 야채들 사이 아주머니의 얼굴은 늘 해맑다. 덤으로 건네준 고추 한 두 개가 개인에게는 별 게 아니지만 모이면 꽤 상당한 양일 텐데 벌이가 시원찮은 아주머니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덤을 주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새로 자리 잡기 시작한 상인들은 단골 고객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덤을 듬뿍 준다. 덤을 받으면 그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상추나 콩나물을 사게 된다.
늘 다니던 야채 가게가 문을 닫은 지 벌써 며칠 째다. 1년 열두 달 쉬는 일이 전무하던 아주머니 얼굴을 못 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옆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청양고추를 산다. 고추를 몇 개 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가격은 두 배나 비싸다. 야채 값이 폭등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개수가 적은 듯하여
“몇 개라도 덤 좀 주세요.”
“이봐요. 기껏 고추 몇 천 원어치 사면서 우리더러 덤 주라 하면 우린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거 한 박스 떼어오는 데 얼만 줄 알기나 해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아주머니의 말에 공연히 부끄러워졌다. 늘 덤을 주던 그녀가 사실은 이윤이 남아서도, 장사가 잘되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온 손이 부끄러웠다. 덤이란 주는 자의 뜻이지 받는 자가 요구할 사항은 아닌 것이다. 덤은 봉투 속의 온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눈물, 또 누군가에겐 희생이기도 하다.
마트에 가면 랩으로 돌돌 말려진 채소들에 가격과 포장 날짜, 바코드가 찍혀있다. 덤을 주는 이도 없거니와 덤을 기대할 수도 없다. 대형마트에서 덤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시장의 덤과는 다르다. 대형마트의 덤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하나를 더 주는 것으로 사람의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하나를 집어 들자 샴쌍둥이처럼 딸려오는 것들을 카트 가득 채우고 돌아오면서부터 충동구매를 했다는 후회가 생긴다. 쌍둥이 상품 하나를 더 주기 위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간 단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에 그제야 생각이 미친다.
다시 달력을 바라본다.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어제를 생각한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라 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을 산다는 사실이다.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별 일 없이 살아온 어제 덕분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오늘은 어제의 덤이다. 당신이 잠든 뒤 눈을 뜬 아침이 다음 생(生) 일지 다음 날(日)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눈을 뜬 순간이 다음 생이 아니라 내일이기를 바란다면 어제의 덤인 ‘오늘’을 대충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내일이 오늘의 ‘덤’이 될 테니까.
고추 몇 개라도 일부러 챙겨 주시던 야채 가게 아주머니의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버렸다 한다. 아주머니에게 신은 생명의 양초를 덤으로 주지 않으셨다.
“그만 주셔도 되어요.”
“어서 줄 때 받아. 딸 같아서 주는 거니.”
그녀는 사계절 내내 거리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공짜로 얻은 덤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따뜻한 생명의 온기였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온기가 내 안의 생명의 양초에 더하여졌다는 사실을 아주머니가 부재한 지금에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생명의 온기를 나눠주며 살고 있을까? 붕대처럼 랩을 칭칭 감고 진열대에 드러누운 초록 오이, 어쩐지 내 모습 같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는 오이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