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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는 칠레와 소련, 북한과 한 조를 이루게 되었다. 칠레는 4년 전 최악의 난투극을 벌인 원수. 아주리는 먼저 꼴도 보기 싫은 칠레를 2-0으로 완파, 4년 전의 치욕을 되갚으며 산뜻한 출발을 한다. 소련과의 2차전에서는 전설의 골키퍼 야신의 선방에 막혀 0-1 패배를 당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마지막 조별예선 상대가 약체중의 약체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66년 월드컵은 세리에A에서 유행하던 카테나치오가가 이탈리아 대표팀에 도입되는 과도기였다. 당시 아주리는 카테나치오와 스펙터클한 공격축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어차피 게임은 승리하는 자의 것... 욕을 좀 먹더라도 승리지상주의를 밀어붙일 것인가?아니면 골은 역시 공격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공격축구가 역시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더 효과적일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북한을 상대로 카테나치오를 펼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는 일단 공격축구로 가닥을 잡고 북한을 상대하기로 했다.
북한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계처럼 정확한 플레이와 빠른 스피드, 개미 같은 조직력, 근성과 투쟁심은 강호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체격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두 명의 선수가 업히고 띄워주는 고공플레이인 일명 ‘사다리 전법’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까지 겸비한 팀이었다. 북한은 조별예선에서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0-3으로 대패했다. 하지만 강호 칠레와는 1-1로 비기며 선전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1무 1패였다. 돌풍이래봐야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그러나 태풍이 찻잔을 깨버리고 확대될 줄이야... 깨진 찻잔은 바로 이탈리아였다. 북한의 1-0 승리. 결승골의 주인공은 '사회주의 축구영웅' 박두익이었다. 경기장을 찾은 약 2만 명의 팬들은 북한 축구에 경악했다. 방송 아나운서는 북한의 승리를 육성으로 타전했다.
“로마제국이 무너졌다. 무명의 북한 선수들은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것 같다.”
한편 이탈리아인들은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는 뜻으로 박두익을 ‘치과의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카테나치오를 썼다면….’
실제로 이탈리아가 카테나치오를 썼다면, 북한은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고 박두익도 치과의사가 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전 패배는 향후 이탈리아 대표팀이 승리를 위해 축구의 재미를 포기하는 카테나치오를 주된 전술로 택하게끔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런 경향이 다시 세리에A에도 역영향을 끼치는 등, 북한은 본의 아니게 이탈리아 축구역사, 특히 카테나치오에 많은 영향을 준 나라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원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으로 입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슨 낯으로, 아니 무슨 깡으로 시민들을 본단 말인가? 아주리는 제노바 공항으로 목적지를 바꿔 야음을 틈타 입국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매복해 있던 시민들에게 적발되고 만다. 곧이어 선수들의 얼굴에 셀 수없이 많은 썩은 토마토가 날아들었다.
4년 후에도 썩은 토마토 세례를 당하는데, 이번에는 카테나치오가 문제였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는 개최국 멕시코와 서독을 무너뜨리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브라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루이지 리바와 펠레의 대결로 관심이 집중된 경기였지만 리바는 절정에 오른 펠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는 펠레를 앞세운 브라질 공격수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철저히 농락당하며 1-4의 완패를 당한다. 빗장이라는 말뜻이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한, 오직 이기기만을 위한 재미없는 축구가 즉흥적이고 화려한 ‘즐기는 축구’와의 경기 결과에서, 그것도 큰 점수 차로 패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도 공항에서 썩은 토마토로 입국인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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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정치와 축구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원래 부패한 기업가였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의 눈과 귀를 장악한 언론재벌이었는데, 이탈리아 언론의 질이 안 좋은 데에는 그의 영향이 크다. 억만장자가 된 베를루스코니는 AC 밀란을 사들여 세를 불렸다. 이 세가 표로 형성되었고, 결국 그는 구단주로 다져진 인기를 발판으로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우민정책의 일환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정치와 축구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정치, 오페라, 축구를 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세리에A 경기를 보면 관중석에서는 팬들이 오페라를 부르고, 구단주는 정치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또한 축구도박 ‘토토 칼치오’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마약과도 같다. 축구 승부조작 의혹이 가장 잦은 나라가 이탈리아다. ‘작전세력’에게 돈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선수들이 뛰고 있는 동안, 마피아 조직원들은 돈을 세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축구경기 자체도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축구 선수들은 골을 먹으면 심판을 향해 뭔가 항의하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억울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잘 짓는다. 한마디로 ‘순결한 피해자’인 척 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심판의 심리를 자극해 보상판정을 받기 위해서이다. 할리우드 액션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한다. 심판이 경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고 한다. 선수와 코치도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수들이 애써 고생하지 않아도 좋은 판정을 얻는 방법이 있다. 심판을 매수하면 되지 않는가? 이탈리아는 심판 매수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심판을 매수하는 건 어떤 면에선 구단의 ‘능력’이다. 결과적으로 ‘이기면 되는’ 거니까….
이런 배경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눌렀을 때 “심판이 매수됐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단순히 억지를 부린 게 아니다. 그들은 에콰도르인인 모레노 주심이 한국 측에 매수되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이탈리아가 조별예선에서 에콰도르를 격파한 것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복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관측도 나왔다.
월드컵이 끝난 후 이탈리아에서 모레노 안티 사이트가 생겨났다. 모레노를 때리는 플래시 게임도 생겨나서스트레스를 풀고자하는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접속했다. 또한 광고업계에서도 모레노의 지명도를 의식해 이탈리아의 한 자동차 회사에서 모레노를 빼닮은 배우를 심판의 모습으로 출연시킨바 있다. 모레노를 닮은 심판이 많은 광분한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거리에서 뒤쫓기고 있는 이 CF에서 자동차 회사가 하는 조언.
“당신, 자동차가 필요한 거 아니야?”
또한 시칠리아섬의 공공화장실 하나가 모레노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탈리아에서는 길이나 건물에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지만 축구 심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모레노가 처음이었다. 물론 공공화장실에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것 자체도 사상 최초였다. 당시 이탈리아를 맡았던 트라파토니 감독은 농담을 섞어서 모레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체중의 남미 주심이 (둔한 몸매 때문에) 빠른 경기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의 적을 편들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정치와 지배는 다르다. 지배는 수직적이다. 하지만 정치는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자신들이 정치, 오페라, 축구의 전문가이자 공동의 플레이어라고 생각한다. 즉 축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순히 감상만 내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발언이 다음 시합에 반영될 것으로 믿기에, 최대한 세세하게 분석하고 비평한다. 이탈리아는 축구경기가 끝나면 분석기사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텔레비전에서는 선수들의 기술과 실수를 슬로우 모션으로 계속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전문가만큼 해당 분야를 잘 알겠는가? 시합이 마음에 안 들면 온갖 비난과 억측이 난무하게 마련이고, 그만큼 감독과 선수들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때 언론은, 당연히 대중의 편을 든다. 언론의 전횡이 가장 기승을 부린 때는 1982년이었다. 스페인 월드컵이 열렸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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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세계제패 실패에 대해 참을성 없는 이탈리아 언론은 사사건건 대표팀을 물어뜯고 있었다. 자국 언론과 적대관계를 맺으며 냉대 받던 아주리 군단을, 오직 노장 감독 엔조 베아르조트만이 제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언론에 시달리던 선수들을 위해서인지,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선수들이 자기 스스로 알아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잘 될 것이다”
예선에서 이탈리아는 룩셈부르크, 덴마크,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와 계속된 전반기 4시합에서 전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하지만 지역 예선 후반기에 의외의 고전을 하면서 어쨌든 본선 진출에 성공하지만 이탈리아 매스컴의 맹비난을 견뎌야 했다.
‘아주리는 형편없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던 중, 이탈리아는 나폴리에서 몇 수 아래의 최약체 룩셈부르크를 맞이했다. 상파울로 스타디움에 운집한 7만 명의 관중은 아주리 군단의 시원한 골 러시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킥오프 후 선제 득점을 올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꾸준히 경기를 지배하면서도 더 이상 득점하는데는 실패했다. 아니 실패했다기보다는 득점을 안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민망하게도 카테나치오를 썼기 때문이다.
카테나치오도 상대 나름이다. 아무리 승리가 중요해도 그렇지 약체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그렇게 노골적으로 선취골을 끝까지 지키다니... 이탈리아는 결과적으로는 편하게 지역 예선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경기를 해서 강호들을 이기겠냐’는 언론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아주리는 본선을 대비한 평가전에서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지 못했다. 82년 2월에 파리에서 치른 프랑스전에서는 0-2의 완패. 4월의 라이프니치에서의 동독전에서도 0-1의 패배. 게다가 스페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제네바에서 치른 스위스전에서도 1-1의 무승부에 머무른다. ‘이길 수 없는 아주리’에 쏟아지는 화살의 양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비난의 화살은 주로 감독 엔조 베아르조트를 향해 있었고 그의 편은 오직 아주리뿐이었다. 매스미디어, 이탈리아 국민뿐 아니라 이탈리아 축구 연맹의 임원들까지도 반(反)베아르조트 측에 섰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기적이 시작됐다. 완전히 고립된 선수들과 베아르조트였지만, 주변이 적으로 가득 차면서 오히려 팀 내의 단결력과 승부욕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자국 언론과 국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고초를 당할 게 분명했다.
1차 예선의 상대는 폴란드, 페루, 카메룬 등 모두 비교적 약한 상대였다. 이들을 상대로 이탈리아는 3전 3무승부라는 민망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다시 비난의 폭풍. 가장 억울한 것은 ‘심판의 악령’이 다시 부활한 카메룬전이었다. 이탈리아는 선취점을 올리며 카테나치오를 가동했지만, 카메룬의 확실한 오프사이드에도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고, 결국 1-1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다. 행운의 여신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다시 베아르조트와 선수들에게 쏟아지는 이탈리아 언론의 무차별 공격. 2차 예선 개막 하루 전날, 베아르조트는 아예 취재진의 출입을 완전 통제해 버렸다. 적대관계를 공식화해버리는 게 편한 상황이었다. 주장 디노 조프는 보도진을 앞에 두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나와 동료들은 <2차 예선 진출의 특별 보너스 지급 관련 보도> 및 <비도덕적 보도>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 향후 우리들이 보도진을 앞에 두고 말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매스컴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일까?
문제의 ‘보너스’란 이탈리아 의회가 진원지였다. ‘2차 예선 진출에 관련하여 1인당 2,000만 리라의 보너스가 지급되었다.’는 한 의원의 무책임한 발언을 언론이 기정사실화 해 보도한 것이다. 또한 ‘비도덕적 보도’란 한 매스컴이 이탈리아 대표팀 캠프에서 동성애 행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보도를 한 것을 말한다. 무책임한 보도였다. 사실무근이었으니까.
아님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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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포진한 죽음의 조에서 2차 예선을 맞은 이탈리아는 겉으로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때도 그렇고, 코너에 몰리면 근성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포진한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그랬다. 이 경기의 키 플레이어는 이탈리아 최악의 더티 플레이어 젠틸레였다.
베아르조트로부터 특명을 받은 이탈리아 최고의 더티 플레이어 젠틸레는 마라도나를 피에 굶주린 악마처럼 전담 마크, 경기시간 90분 동안 마라도나를 말살해버렸다.
이탈리아는 후반 22분 선취점을 올리지만 그때부터 카테나치오를 구사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또다시 맹공을 퍼부어 추가 득점, 상대의 만회골에도 불구하고 2:1로 아르헨티나를 격침시킨다. 그리고 승리의 주역 젠틸레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한 쪽에 몰려있던 이탈리아 기자들을 향해 욕설을 날렸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2차 예선에서 1위가 되기 위해서는 브라질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를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브라질은 지코 등 역사상 최강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브라질을 상대로 이탈리아는 위축되기는커녕 월드컵 역사에 보기 드문 격렬한 골 쟁탈전을 벌였다. 로씨의 두 골로 2-1로 전반전을 리드했던 이탈리아 선수들의 체력은 후반 23분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브라질의 입장에서는 무승부만 거둬도 준결승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펙터클한 공격으로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브라질 선수들의 기질이 기적을 불렀다. 브라질 선수들이 공격에 치중하는 과정에서 수비라인에 순간적인 빈틈이 포착되었다. 역습이야말로 카테나치오와 함께 이탈리아 축구의 전매특허다. 단 한 번의 마지막 기회를 로씨가 득점으로 연결, 3-2로 한 점 달아났을 때 남은 시간은 15분이었다. 이 시간 동안 이탈리아는 사력을 다해 카테나치오를 전개했고, 결국 브라질에게 한 점 차 승리를 거뒀다.
파울로 로씨는 선수 생활 내내 무릎부상으로 시달렸으며 체력적인 문제로 감독들이 선호하는 타입의 선수는 아니었다. 게다가 22세의 나이에 승부조작사건에 연루되면서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뻔한 아찔한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세계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로씨의 두 골에 힘입어 준결승 상대 폴란드를 2-0을 완파한 아주리 군단. 서독과의 결승전을 위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에 들어섰을 때 이미 스탠드는 이탈리아의 삼색기로 뒤덮여 있었고 총리 산드로 페르티니까지 와 있었다. 베아르조트와 선수들은 이 해맑은 냄비근성을 보고 과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전반부터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공세가 서독의 골문을 두드렸다. 이탈리아는 페널티킥을 놓치는 아까운 장면을 연출하지만 후반 로씨와 알토베리의 연속골로 2득점, 뒤이어 한 점 따라붙은 서독을 따돌리고 42년 만에 월드컵 우승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을 달성한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베아르조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이탈리아 보도진에게 질문했다. 자신과 선수들을 줄기차게 괴롭혔던 그 기자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질문은 없는가?”
기자들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저 한마디를 하기 위해 베아르조트와 선수들은 최선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원 글은 딴지일보에 있던건데 딴지일보가 해킹을 당한 이후 과거 글들이 모두 지워져서 다른 곳에 있던걸 그냥 긁어왔습니다. 이동국에 관한 논란을 보니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르더라고요. ㅎㅎ
재밌게 잘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