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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사건의 실체(1)
민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 사람 눈을 보다보면 눈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절 합격시켜 주신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치만 저에게서 얻는 게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판단합니다. 감당도 제가 합니다. 땡땡이치지 않고 최선만 다해주시면 됩니다. 목걸이 걸어줘요?”
민은 목걸이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민아는 민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언니와 함께 나눈 목걸이다. 죽음 앞에 언니를 세워 둔 방관자. 아니면 언니를 죽게 했을 수도 있는 남자. 제법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걸지 않고 계속 만지작거리길래. 그럼 갈까요?”
민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선글라스와 차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누군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줘 본 적 없다. 누군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왜 그런 괜한 말을 했을까. 뒤늦게 자책한다. 그저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그녀의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을 지나려는데 민아는 그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민은 목걸이를 건네받으며 그녀의 갈색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혀 그녀 곁에 앉았다. 민아는 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머리를 살짝 낮췄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꽃향기가 난다. 민이 목걸이를 민아 앞으로 가져가자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가녀린 목선이 드러났다. 좋은 향이 배어나온다. 민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여자. 눈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목에….
“강민 입니다.”
그녀가 민을 쳐다본다.
“내 이름이요. 강민. 정식 인사가 늦었네요.”
“네, 정민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나도 하나 합시다. 나도 내 얘기 참 못하는 사람인데 정민아 씨는 자기 얘기 더 못하는 사람인 것 같네요. 다음에 만날 땐 얘기 참 못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답답한 얘기나 들어줍시다. 만날 때마다 한 가지씩만.”
민아는 미소 지었다. 거짓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연기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진심을 다해 미소를 지어야 한다. 민은 그녀의 미소를 보니 기분이 참 좋아졌다. 슬픈 눈, 많은 말을 하는 눈, 내뱉지 않는 침묵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좋았다.
[ 밤새도록 일하는 그녀의 모습. 지친 모습으로 골목길을 올라가는 모습. 언덕에 서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며 우는 그녀 ]
“저는 할 말이 별로 없어요.”
“평소 자기 얘기를 안 하니 할 얘기가 없다고 느끼는 거예요. 해보자고요, 하나씩.”
그녀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떼어낸다.
“알겠습니다.”
“OK, 나도 OK! 난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가야합니다. 조만간 봅시다.”
“네, 들어가세요.”
2시간 가까이 흘렀다. 윤이 전화가 오고 문자가 오고 난리다. 영화관 들어서자마자 윤은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윤은 아버지가 내주신 관을 몇 시간째 비워둔 것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윤은 검사가 아닌 경영자를 했어야 했다. 다행히 선미가 그런 윤을 다독였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윤은 몇 시간이나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VIP 영화관 관은 텅 비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민과 윤은 영화를 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윤과 민을 위한 강민석 회장의 배려였다. 민이 많은 사람과 있으면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강민석은 관 하나를 비웠다. 가끔 선미도 참석했다. 처음에는 궁금함에 따라 왔지만 요즘은 매주 참석이다. 각자 선호하는 자리도 달라서 저만치씩 떨어져 앉았다.
민은 영화관 맨 뒷줄 좌측에 앉는다. 윤은 스크린이 바로 보이는 정 중앙에 앉는다. 선미는 민이 앉는 옆자리에 앉되 한 칸 띄우고 앉는다. 영화관 자리 선정에도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윤은 사교성이 높은 사람, 민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윤의 옆에 앉은 선미의 성향을 굳이 보자면, 짝사랑이 의심 가는 사람이다.
“오늘 누구 만났어?”
영화 끝나고 저녁을 먹자 선미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민과 윤은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씩을 더 하기로 했다. 바로 옆집에 살지만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민은 윤이 집에서, 윤은 민이 집에서, 아니면 서로 집을 바꿔서 잘 때도 있다.
“얼마 전에 면접 본 경력사원.”
“아직 합격 발표도 안 난 경력사원을 왜 만나?”
“더 빨리 합격시키고 싶어서. 다른 데 가면 안 되니까.”
“그 정도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야?”
“그냥 느낌이 그런 것 같더라고.”
“그래, 사람 잘 보는 네가 결정했다면 맞는 거겠지.”
이 세상에서 민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윤이다. 민이 가장 힘들었던 9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 세상에 부모님 외에 자신의 9년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
“민아, 나 어제 승아 꿈 꿨다. 가끔 나타나긴 했는데 어제는 너 찾더라.”
민은 미소 지으며 맥주 한 모금을 깊게 마셨다.
“이제 그만 승아 보내줘야 하지 않겠냐.”
“보내주고 싶지. 정말… 그러고 싶다.”
민은 맥주 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깊게 한 입 마셨다.
“왜 그렇게 승아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야? 승아랑 한 교실에서 수업 받았던 나도 이제 점점 무뎌지는데. 너랑 승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람과 사람이 100번을 만나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그저 첫 번째 만남의 연속인 것이다. 민과 승아가 말을 나눈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어쩌면 윤의 말대로 승아와의 추억이 더 많은 사람은 윤일지도 모른다. 한 교실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많은 추억을 쌓았을지 모른다. 민에게는 그런 추억이 없다. 학교의 추억도, 친구에 대한 추억도, 그렇다할 추억이 없는 9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니 그 후로도 단 한 번 열지 않았던 마음을 유일하게 열었던 사람이 승아다. 승아와 함께 했던 2시간은 자신의 평생과 맞바꾸어도 좋을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걘 네 꿈에 와서 왜 나를 찾았대?”
“훗. 글게 말이다.”
이번엔 윤이 뭔가를 망설이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민아.”
“어.”
“그 방화사건.”
“방화사건? 어떤?”
“승아가 죽었던 그 방화사건, 재조사 들어갈 것 같다.”
“재조사? 왜?”
“가끔 승아가 꿈에 나타나면 마음이 찝찝해서 자료 찾아봤었어. 근데 역시 뭔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어.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우선 그렇다는 것만 알아둬.”
분명 윤이 그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승아가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분명 알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민은 윤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건번호 8167. 방화사건. 이 사건은 1988년 4월 강원도 강릉 정우초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 1명 사망. 45명의 부상자를 낸 사건.]
민은 고개를 돌렸다. 윤의 잔상을 더 보지 않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그 사건은 자신과 무관한 일인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찝찝하고 목을 조이는 듯한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뭘까. 무엇 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울까. 침대에 누워 윤의 마지막 잔상을 되새겨보았다. 되새기고 되새기다보니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 * *
4월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다. 경력사원 최종 합격자 발표가 되고 한 달이 지났지만 민은 회사에 가지 않았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지켜온 규칙이었다. 회사의 인재는 뽑되, 회사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민의 신념이었다. ‘병원 일에만 신경 쓰기도 버겁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였고.
의대 생활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군의관 3년을 거쳐 전문의가 되었다. 미국에서 학부와 인턴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 공기를 처음 맡았을 때, 제일 먼저 ‘안인바다’ 생각이 났다. 공부가 끝나면 그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7년 간 귀국하지 않았다. 독해야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수백, 수천까지 잔상을 쉽게 넘기기에 민은 너무 어렸고, 매일 밤 잔상을 돌이켜 보며 두려움, 무서움과 마주해야 했다.
귀국하자마자 사찰을 찾았다.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법당에 올라 절을 올렸다. 가부좌를 틀고 부처님을 마주했다. 인자한 부처님 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18년 동안 말 못한 자신의 세월을 마음껏 털어놓고 싶었다.
“왜… 저한테만 왜 이렇게 가혹하신가요?! 왜… 저는 이런 운명을 타고 났습니까!! 왜! 한 번만… 단 한 번만… 승아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발… 처음입니다. 제가 세상에 발을 내딛고 처음 얼굴을 본 아이입니다. 제발….”
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의 말을 쏟아냈다.
“이제 그 울분도 그만해야 한다.”
주지스님이었다. 18년 전이나 18년 후나 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있었고, 온화한 말 속에 칼이 있는 분이었다.
“전…. 성인, 군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아니요! 아니요! 그때 왜 저를 절에 두지 않으셨어요?!! 그때 전 이 생활에 익숙했고! 더 이상 바깥 생활이 궁금하지 않았다고요! 절!!! 바깥세상을 아무 것도 모르는 절!!! 밖으로 내모신 이유가 뭐예요?!!! 도대체 왜!!!”
궁금했다. 막상 절을 떠나면서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증이 겹겹이 쌓였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수많은 물음표로 다가왔던 궁금증을 풀어내고 싶었다. 주지스님은 민의 울음이 잦아질 때까지 말없이 민의 곁을 지켰다.
“그 당시 네 주위엔 두 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너를 보내야 했고,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 시간동안 너를 내 곁에 두어야 했고, 그 시간이 됐기에 널 보냈다.”
첫댓글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여요~ㅎ 제가 추리소설을 엄청좋아라 하거든요~ㅎㅎ 끝에 주지스님이 하신 말씀이 뭔~
말씀일까요?? 작가님!! 정말 재미있게 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민과 민아, 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가며 써내려가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어떤 사건일까요?
점점 더 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끝까지 함께 해주셔요~ ^^
뒤로 갈수록 점점 궁금해 지네요. 그 때 화재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네, 앞으로 화재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풀릴 겁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