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통신 3보> - 이래도 갈등, 저래도 갈등
영어······.
전세계인의 공통필수과목이면서 학생시절의 최대로 중요한 수학능력평가요소인 영어.
이 영어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공포스럽다고나 해야 할까.
중국어 수업인지 영어 수업인지 모를 정도다.
3월 8일 월요일 아침 8시 수업 첫째 날 첫째 시간에 조심스럽게 강단 앞으로 등장한 젊고 예쁘장한 중국어 선생님의 목소리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의 입에서 얼굴과 몸매만큼이나 예쁜 목소리와 함께 유창한 영어가 줄줄 나왔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수업이 시작되는구나.'
그 동안 정말 궁금했다.
어떻게 중국어 수업이 진행될까?
한국에서 같으면 말이 통하니까 외국어 강의를 잘 알아들을 수 있을 테지만 중국에서는 어떻게 강의를 알아듣고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 나의 중국어 마스터 기준인 '식당 차림표 읽기'가 가능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처음 접한 영어 강의에 나는 가슴이 콱 막혀 버렸다.
그 동안 대학에서나 대학원 같은 곳에서 한 시간 내내 영어, 혹은 다른 외국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간혹 회사에서 보내 주는 외부교육에서 외국인 강사가 외국어로 강의하고 우리말로 통역하는 방식의 강의는 여러 번 들어 본 적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영어 실력에 있어서만은 그 동안 내게 최고 학벌이란 타이틀은 다 허사였다.
영어로 된 논문은 영한사전이 있었으므로 문제없이 해석하고 읽는다고 해도, 말로 하는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직장 생활 핑계로 그 동안 영어 말하기 실력은 쌓지도 않았고 쌓을 기회도 잘 없었다.
요즘은 실제로 어느 정도 영어로 말을 잘 할 수 있느냐가 - 비록 이명박 대통령식 영어일지라도 - 진짜 영어 실력의 가늠자인데도 말이다.
(중국어 수준의 최종 목표 : 식당 차림표 읽기... 이것 읽고 해석되면 난 하산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기 중국어 수업 첫째 시간에 온전한 영어 강의를 처음 들은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수강생들이 모여 있으므로 세계 공통언어인 영어로 앞으로의 모든 수업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린 10대의 학생까지 있는 자리에서 영어를 잘 못 한다는 티를 낼 수도 없고, 더군다나 가방 끈이 길다는 자존심까지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말 못할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다.
'원, 참. 중국어 수업보다 영어 수업이 되게 생겼구먼. 영어 관문을 넘어야 중국어 관문을 넘을 것이 아닌가?'
물론 영어를 못 하는 불편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처음 여기에 도착한 직후 영빈관 숙소를 계약하고, 학교에 등록하고, 그리고 식당에서 밥 사먹고 하는 등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영어를 못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업시간에 자유자재로 영어를 못 하므로 인해 질문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몰라도 아는 척 해야 하는 불편이야 말로 정말 부끄러운 것이었다.
영어로 하는 중국어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 하면서도 선생님과 눈이 맞았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어야 할 때는 곤혹스러운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에 오기 전 어학연수에 관한 상담을 했던 경북대학교 엄창옥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난다.
'어차피 영어, 일어, 중국어 등을 마스터하려고 하면 가장 기본인 영어를 먼저 배우세요. 미국이나 캐나다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나면 일본, 중국에 가더라도 많은 자신감이 생길 테니까요.'
라고 충고한 것 말이다.
실감나는 얘기였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 외에 내겐 또 한 가지의 갈등이 있다.
수업수준을 잘 못 선택한 것 말이다.
내 생각엔 어차피 확실하게 중국어를 배우려면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가장 기초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성모, 운모, 성조 등 발음연습 하는 것은 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자를 쓰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고역이다.
정말 초등학교 1학년처럼 '가운데 중, 배울 학, 한 일, 두 이' 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글자 획 긋는 방법부터 가르치는데, 이건 뭐 인내력 테스트도 아니고 정말 미칠 지경이다.
그렇다고 좀 더 한 끝빨 높은 다른 반으로 갈 형편도 아니다.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한자를 중국식으로 읽고, 말할 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중국어를 처음 배운 지는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때 한 1년 정도 바짝 공부하다가 그 이후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기에 지금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초1 레벨 반의 교재 세 권. 아주 잘 되어 있다. 하지만 난 여기서부터 잘못된 선택을...)
그래서 처음부터 시작해 보겠다고 가장 초급반으로 들어갔는데, 이건 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수업시간에 동양권이 아닌 비한자권 외국인들이 열심히 하는 한자 쓰기에 가만히 있기도 뭣해서 나도 한자를 쓰고 있으면, 돌아다니던 선생님이 일일이 수정을 다 해 준다.
나한테 와서는 '가운데 중(中)자'에서 '입구(口)자'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고 있는 획(ㅣ)이 위가 더 짧고 아래가 더 길어야 한다고 콕 찍어서 이야기를 할 때는, 이건 정말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벗씨와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위로하는 말 말이다.
"한 학기 내내 영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어 수업 진도가 좀 늦으면 어때. 어차피 나중에라도 해야 하는 영어인데, 이렇게 완벽하게 가르쳐 주는 영어 수업이 어디 있어. 안 그래?"
하긴 그렇긴 하다.
중국어 끝나면 영어 배우러 영어권으로 또 다시 떠나기로 했으니깐······.
그런데 그저께 중국 정주에서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곳 상하이에 잠시 들른 우리 아들 다래가, 우리가 처한 난처한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이곳을 떠났다.
"아부지, 당장 다음 주부터 과외를 받으세요. 한자는 다 알기 때문에 그 한자를 중국어로 읽고 말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과외 선생님을 구해서 진도를 나가도록 하세요. 지금 초급반 수업교재로 받은 책 세 권을 다 마스터해 봐야 단어 수준이 600개밖에 안 되잖아요? 이 정도 실력은 유치원 수준이에요. 최소한 한 학기 마치고 나면 중학교 실력은 되어야지요."
사실 내가 속한 반은 초1, 초2, 초3 레벨 중에서 초1 레벨 수준의 가장 기초반이다.
이 뒤에는 중1, 중2, 중3 레벨 반이 있고, 그 뒤에 다시 고1, 2 레벨 반이 있다.
중국어를 1년 반만에 마스터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왔는데, 한 학기 마친 결과가 단어 600개 정도 아는 수준이면 정말 너무 심하기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부터 4월 말까지 초1 레벨에 해당하는 책 세 권을 과외를 통해서 빨리 마무리하고, 5월부터는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맞을 것 같다.
하루 수업 세 시간 중에서 한 시간 반은 읽고 말하기 수업하고, 나머지 반은 한자 쓰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한 과를 가지고 이틀씩이나 하고 있으니 이 과정을 빨리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 사람들은 저기 모여서 뭐 할까? 나중에 말이 되면 가서 물어봐야겠다. 홍구공원에서)
우리 아들 얘기를 듣고 나니 새로운 힘이 생긴다.
가급적 빨리 다음 주 중으로 과외 선생님을 구해서 이 기초 과정을 마스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이번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을 때는 중국여행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더 쉬운 목표로 학교 옆 홍구공원(루쉰공원)에 도대체 왜 사람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지 이유라도 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벌써부터 내 중국어 실력이 좋아져서 반이 바뀌고 나면, 예쁘고 젊고 영어 잘 하는 지금 선생님과는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앞선다.
한 한기 내내 영어 공부 제대로 해 보겠다고 위로하고 있을 때가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래도 갈등, 저래도 갈등이다.
히히.
2010년 3월 21일
멋진욱 서.
첫댓글 하여간 부러버요~ 영어와 중국어까지 2개국어 한꺼번에 공부하게 되었으니~그야말로 일거양득이네요 ~ ㅎㅎ
영어 리스닝 공부 정말 잘 되어요. 이제 많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히히.
영어 수업 레파토리가 똑같은데도 저는 아직 귀가 안 뚫렸습니다. 처음엔 신경써서 들어보다가 집중력 떨어지면 귀찮아서... 이른바 농땡이 학생.ㅋㅋ
예쁘고 젊고 영어 잘 하는 지금 선생님과는 이별해도 된다. 항상 곁에 더 예쁜 분이 계시는데....... 빨리 공부 좀해라. 진도도 팍팍 나가고....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준비 따앙~~~~~~~~~~! 히히.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그냥 살살 하는데... 좋게 봐 줘서 고마버용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히히.
자알계시죠-두분
제가 사진 잘 찍어 올리죠? 전문가 입장에서 한 수 지도를... 히히.
한 눈 팔지말고 공부하시죠 8월까지 확실한 가이드가 필요합니다.(성호부지가)
글쎄요~ 이 정도 책 수준으로 가이드씩이나... 하지만, 기대하셔도 좋습니당~^^
4월에 엘지화학 상해 법인 및 창조우 방문길에 실력 점검 하겠습니다. 열공 하십시요.
정확하게 언제 오시는지요? 부탁 드릴 것이 있어서요. 히히.
조만간 일정 연락 드리리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1년 후의 단우님 모습이 기대됩니다~^^ 조기~ 식당 차림표에 제일로 싼게 뭐예요? ㅎㅎㅎ
구내식당 정말 쌉니다. 우리 돈 3천 원이면 둘이서 배 터지게 먹고 남습니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