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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왕산]비운의 왕 잠못이루는 가락 '마지막 영토'
왕이시여!
무엄하게도 왕이 1500년째 고이 잠들고 계신 왕산(王山)의 정상을 밟는 무례를 범했
습니다.
가락국의 애환이 서린 왕산을 오른 것은 오로지 산청군 금서면 화게마을의 덕양천 계
곡에 뿌리를 내린 능수벚나무의 은근한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를 풀어 헤친 능수
버들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능수벚나무의 하얀 꽃은 흰옷 입은 가락국의 여인처럼 소
박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산벚나무
의 꽃잎이 봄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봄날의 왕산 산행은 이렇게 들뜬 마음
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즉위 11년만인 서기 532년. 국운이 다한 가락국을 신라의 법흥왕에게 넘겨주는 대신
사랑하는 백성들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 왕의 깊은 뜻은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왕과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과 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돌무덤(傳 仇衡王陵)
중간쯤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사대(射臺)도 왕의 밀알정신이 잉태한 결과물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랑 김유신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던 숲은 그때처럼 연초록 잎
들이 나날이 초록색 물감으로 덧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형왕이시여!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에 주소를 둔 왕의 돌무덤은 너무나 초라합니다.왕은
수로왕 이래 면면히 이어져 오던 가락국의 국통을 끊어놓고 어찌 따뜻한 흙속에 뭍힐
수 있냐며 차거운 돌무덤 속에 묻히기를 자청하셨습니다. 왕산의 경사진 산비탈에 거
친 돌로 7개단의 단을 얼기설기 쌓아만든 피라미드 모양의 돌무덤은 오랜 세월을 증명
이라도 하듯 능수벚꽃 만큼이나 아름다운 석화가 피어 있습니다.
산새도 왕릉을 피해 날고 물밀듯 밀려오는 신라군처럼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오던 칡
덩굴도 왕의 무덤 앞에서는 고개를 돌려 되돌아 나간다니 한갓 미물이라도 왕에 대한
경외심은 인간들보다 나은 듯합니다.
왕릉에서 1.4km 떨어진 소나무숲 속의 수정궁터는 왕이 나라를 신라에 넘겨준 후 여
생을 보냈던 곳으로 김수로왕이 이곳에 수정궁이라는 별궁을 지어 요양하였다는 이
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가락의 여인들이 연분홍 꽃으로 다시 태어난 듯 진달래
꽃이 만발한 수정궁터는 궁궐터라기보나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산막터에
더 가깝습니다.죽어서 돌무덤에 묻히기를 소원한 왕이 어떻게 여기에 호화로운 궁을
짓고 살아겠습니까.
수정궁터 인근의 약수터는 왕산의 온갖 약초 뿌리에서 우러난 성분들이 녹아 흐르는
샘으로 왕도 이 물맛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돌무더기 속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여름
엔 차고 겨울엔 따뜻한 한천수라 예로부터 산청 지역의 의원들이 이곳의 약수로 약을
달였다고 합니다. TV드라마'허준'의 인기 때문인지'유이태 약수터'로 명명된 이후 하
루에도 수백명의 산행객들이 장사진을 이뤄 행여 왕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지 걱정됩
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시여!
수정궁터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2km쯤 오르면 나타나는 평전(平田)은 왕산이 예사로
운 산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해발800m 지점의 평전은 수백 평 넓이의 평평한
지대로 가락국 병사들의 훈련장이었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곳입니다.수백 명이 동시
에 목을 축이고도 남을 정도로 솟아나는 평전샘과 발끝에 차이는 고풍스런 기와 파편
들로 보아 이곳에 수백 명의 가락국 군사들이 거주했었다는 전설이 빈말은 아닌 모양
입니다.
평전에서 왕산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500m의 산행로는 가파르지 않은데다 솔향이 그
윽해 '사색의 산행로.라 명명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성 싶습니다.왕의 보좌보다 백성
들의 안위를 우선한 왕의 뜻을 헤아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소나무가 두 그루가 다정한
전망대에 닿습니다.
왕산 전망대에 서면 산의 모습이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과 산
사이에 삶의 터전을 잡은 산청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곰이 웅크
리고 앉은 형태의 웅석봉과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의 연봉들이 왕산을 보듬은 산세
는 가락국의 병사들이 왕을 호위하는 형상입니다.
해발923.2m 높이의 왕산 정상에서 굽어보는 경호강의 흐름은 곡선이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과 황매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산들
사이로 흐르는 경호강은 멀리서 왕산을 둘러싸고 반원을 그리다가 나지막한 야산이
라도 만나며 S자를 그립니다.
산과 강이 서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산청의 산과 강은 역사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는 왕의 지헤와 덕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의 가리왕산(加里旺山)을 비롯한 이 땅의 산들이 무지막지한 일제에 의
해 왕(旺)으로 바뀔 때도 왕의 왕산만은 그대로 왕(王)을 유지할 수 있었나 봅니다.
..........(모셔온글임)........ 출처 : http://cafe.daum.net/blueager 가락 대구남구 청년회. 스크랩이 안되 퍼왔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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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 (금관가야 왕) [仇衡王, 구해, 김구해]
금관가야(金官伽耶)의 제10대 왕(521~532 재위). |
첫댓글 개인적인 생각으로 무덤이 더 높거나 피라밋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 후대에 와서 무덤의 돌을 일부 담을 쌓는데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덤의 돌과 담의 돌이 같아 보이네요.
후대에 만든 흔적으로 보입니다. 구형왕무덤이 있었다면 인도나 남중국에 있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