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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영광으로
□ 본문 : 시편 57편 7-11절
교회는 7월 첫째 주일을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주 주보에 맥추감사퀴즈용지가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퀴즈에 답을 적어서 오늘까지 헌금함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을 읽어보면 퀴즈의 답이 나옵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이렇게까지 답을 알려드리는데도 틀리게 적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도 너무 엉뚱한 대답이 아니면 선물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퀴즈의 목적은 선물을 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거면 그냥 주지 왜 퀴즈를 내서 사람을 귀찮게 하느냐고 말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성경을 통해 맥추감사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맥추절은 첫 열매를 드려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는 5∼6월입니다. 보리(小麥, 밀)를 추수하고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입니다.(출34:22) 그래서 일본어성경은 ‘初穂の刈入れの祭り’라고 표현합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감사에는 두 가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이고, 또 하나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감사입니다. 본격적인 추수는 9∼10월입니다. 그때 추수한 곡식을 드리는 감사가 추수감사입니다.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초막절,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추수감사는 풍성합니다. 여러 곡식과 온갖 과일들을 추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곡백과라고 하지요. 그러나 맥추감사는 말 그대로 밀의 첫 열매입니다. 본격적인 추수까지 아직 멀었습니다. 그때까지 추수한 밀로 살아가야 합니다. 첫 열매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첫 열매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풍성한 추수를 했다고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열매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추수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가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면 맥추감사는 주실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풍성한 추수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습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오늘을 삽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육신이 연약합니다.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상황은 이렇게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풍성히 채워주실 것을 믿고, 이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가 첫 열매 감사입니다.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가 맥추감사입니다.
추수감사도 맥추감사도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지만, 영적으로 보면 추수감사보다 맥추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도 귀하지만,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입니다. 오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이 바로 이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57편 서두를 보면 언제 이 시편을 노래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57편이 기록되었습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정예부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지냈습니다. 피를 말리는 것 같은 시간을 몇 년 동안이나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제 이 고난이 끝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캄캄해도 한 줄기 빛이 보이면 그래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면,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다윗은 감사의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그래서 절망을 영광으로 바꾸는 인생을 삽니다. 물론 다윗의 절망을 영광으로 바꾸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을 바꾸실 수 있도록 다윗이 맥추감사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9절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이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는 것은, 이제는 굴에서 벗어나 궁궐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며, 다윗은 여전히 사울을 피해 굴에서 숨어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궁궐에 살고 있는 것처럼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입니다.
맥추감사는 첫 열매 감사입니다. 그런데 추수한 것이 하나도 없는 다윗이 어떻게 첫 열매 감사를 드렸습니까?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감사가, 찬송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다윗은 굴에서 하나님께서 맥추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감사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의 절망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굴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드리지 못할 장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드리지 못할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은 항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드리지 못할 고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믿음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맥추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도 절망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윗과 같은 첫 열매 감사, 맥추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1. 마음을 확정하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확정되었다’는 ‘세워지다’ ‘고정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굴에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쫒기고 있습니다. 언제 사울에게 발견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죽음을 보지 않고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마음을 확정해야 합니다. 굴에 있을 때,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상황이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다윗처럼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다윗처럼 찬송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우리 인생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감사할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확정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빌립보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발에는 차꼬가 든든히 채워져 있습니다.(행16:24) 도망가지 말라고 채운 것이 아닙니다. 문이 잠겨있는데 어떻게 도망가겠습니까? 차꼬는 고문기구입니다. 매를 맞아 온 몸이 아픈데 차꼬까지 채워져 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열매, 찬송의 열매를 드립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집니다.(행16:26)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때, 감사와 찬송이 나옵니다. 감사하고 찬송할 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립니다. 감사하고 찬송할 때 매인 것이 벗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맥추감사주일을 한 주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문제를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문은 닫혀있고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지만, 모든 상황보다 크시고 모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깁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닫힌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일이 이번 맥추감사주일에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 주님의 인자와 진리를 구하십시오.
10절 말씀입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지금 다윗은 주의 인자와 진리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얼마나 큰지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가 얼마나 광대한지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고 말입니다. 인자는 ‘헤세드’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사울에게 쫓겨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굴에서 살아야 합니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면 감사할 수도 찬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의 인자가 커서 하늘에 미친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신실하심입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는커녕 사울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의 진리가 궁창에 이른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놀라운, 이렇게 아름다운 감사와 찬송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맥추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를 새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어 주십시오.” 지금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맥추감사를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도를 다윗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다윗과 같은 상황에 있다면 대부분은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더 이상 굴에 숨어살지 못하겠습니다. 빨리 도망 다니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사울을 좀 어떻게 해주세요. 저 이러다가 죽겠습니다.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사울에게 쫓겨야 합니까? 속히 사울을 심판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절대로 이런 기도에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응답해 주실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다윗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에게 이와 같은 모진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왜 죄 없는 다윗이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에 의해 도망 다녀야 합니까? 만약 다윗을, 다윗이 예상하고 있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려고 하셨다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이 예상하고 있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평범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가나안 땅을 향한 약속을 성취할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삼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영광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영광이었습니다. 이 영광을 위해 하나님은 다윗을 특별하게 연단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윗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영광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다윗은 자신을 향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난이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이 연단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속히 굴에서 나가해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울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굴속의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으면 끝까지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찬송합니다. 굴속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첫 열매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쫓기는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으면 맥추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습니까? 도저히 찬송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구하십시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보고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증거가 예수님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굴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울을 통해서도 좋을 일을 행하십니다. 절망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도 큽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굴에서 나와야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굴에서도 감사합니다. 사울이 사라져야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으면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감사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하루 속히 굴에서 나오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하루 속히 사울에게 쫓기는 고난이 끝나기를 원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다윗의 목적이었다면 굴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울이 사라지기 전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목적이었다면 맥추감사는 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주신 것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주시지 않은 것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지 못합니까?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광이 목적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첫 열매 감사가 없습니다. 맥추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먹기에도 부족한데 어떻게 첫 열매를 드릴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삶의 목적이 주님인 사람은 첫 열매를 드릴 수 있습니다. 첫 열매는 최고의 사랑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추수감사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며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며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맥추감사는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 첫 열매를 드립니다. 나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며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며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나의 영광입니까? 추수감사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풍성한 추수를 주셔서 감사하는 것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10분 1을 드리는 것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10분의 9는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인지, 아니면 나의 영광인지는 맥추감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 열매는 모든 것을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주님입니까, 나입니까? 궁궐에 살 때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궁궐에서 감사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사는 지는 굴에 있을 때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절대로 굴에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굴에서도 감사합니다. 굴에서도 주님은 변함없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굴속에서 이렇게 찬송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감사와 찬송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궁궐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감동 받습니다. 그리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나도 저렇게 궁궐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굴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헛된 신도 궁궐에서 자신을 찬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헛된 신은 굴에서 자신을 찬양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욥을 시험했습니다. 궁궐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굴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예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욥은 궁궐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굴에서도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욥의 목적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굴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시편 대부분은 궁궐이 아니라 굴에서 지어졌습니다.
맥추감사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지금 굴속에 있어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합시다. 사울로 인하여 쫓기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정금과 같이 나오도록 연단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합시다.
맥추감사는 첫 열매 감사입니다. 내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에 생명과 같은 첫 열매를 드립니다. 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굴에 있습니까? 극심한 고난 가운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증거 할 기회입니다. 궁궐에서 드릴 수 없는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시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 없는 상황에서 드리는 감사와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물입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29-31)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입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는 주일, 첫 열매로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 원합니다. 가난하고 슬픕니까?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망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