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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6일밤.]
* 10.26 당일 낮에 삽교천 방조제 준공행사에 다녀옴.
* 10월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하여 신민당의원들이 일괄하여 의원직사퇴서를 제출, 정보부는 정운갑대행 체제에게 신민당의 당권을 넘기는 공작을 진행중.
* 1979년 10월16일-19일 사이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도 동참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위수령이 내려지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 10월 17일 늦은 밤 김재규는 부산사태 현장을 목격하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가담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민심이 대통령을 떠났다고 판단했다. 다음날 돌아와 박대통령에게
"체제저항, 정책불신, 조세저항이 겹친 민란이며 전국 5대 도시로 확대 될 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며 "재발하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옆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을 죽여도 까딱없는데.. "라고 거들었다.
◐김재규의 살의의 발동 시점은?
김재규가 정총장에게 전화를 건 시각은 대통령과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경호실장으로부터 받은 뒤인가 전인가에 있다. 대통령과 만찬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 받은 30분후 4시 40분경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실에 전화함. 대통령과 저녁을 같이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육참총장을 별실로 초대할 때부터 김재규는 살의의 불씨를 지펴가고 있었으나 확정된 의지는 아니었다. 이날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다른 모습을 보였더라면 김재규의 생각도 바뀌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몰아부치고 있었다. 김재규는 자리를 비워 정총장에게 가서 초청해 놓고 함께 저녁을 같이하지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 카터와 박정희
* 1979년 5월 김영삼 총재 당선,6월 29일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카터는 주한 미군을 철수를 들고 나오고 김영삼까지 싸고 돌자 박정희는 두 사람을 더욱 경멸하였다. 카터는 아주 모욕적으로 밤9시를 넘어 도쿄를 출발하여 김포에 도착하였으며 정확한 도착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박대통령은 미리 나와서 근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 박대통령은 카터 방한에 앞서 통역을 담당할 최광수 의전수석을 불러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에 대하여 미리 생각해 두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 김재규와 박정희
* 김재규 (당시 53세)는 김녕김씨 김문기의 18대손이다. 그는 정보부장 직위를 이용해 학자에게 압력을 넣어 무리하게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키려했다.
* 박정희 보다 나이가 아홉 살 아래,고향도 같고 키도 같고,육사동기(2기)이고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도 같았다. 1954년 9월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장군은 사단장, 5.16후 호남비료사장,보안사령관,3군단장, 유정회 의원,정보부 차장,건설부 장관으로 있다가 1976년 12월 신직수 부장과 교대함.
* 박정희는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생이고,자신의 비호 아래서 커온 김재규가 만만해서 그랬는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김재규의 무능을 나무라곤 했다.
* 김재규는 인간적 바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격동기를 주도할 만한 안목과 추진력은 갖지 못했다.
* 8월 YH여공 농성사건, 9월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결정, 10월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부마사태로 격랑을 타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커지면서 김재규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고 있었다. 이런 과부하(過負荷)상태에서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 열등감, 차지철 편을 드는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뒤섞여 부글 부글 끓고 있었다.
▣ 김재규와 김계원
* 김재규는 김계원 비서실장을 선배로 깍듯이 예우하면서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는 사이.
1960년 당시 김재규가 진해 육군대학 부총장,김계원 소장이 총장으로 부임, 그무렵 마산에서 회식을 마친 뒤 돌아가던 김재규 지프가 절벽아래로 굴렀다. 마침 뒤따라 가던 김계원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중상을 당한 김재규를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해준 일이있다.
*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후 정보부장을 잠시 지낸 다음 대만주재 대사를 오래했다. 1978년 12월 10대 국회선거를 앞두고 고향인 영주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재규는 그런 그를 비서실장으로 천거하였다. 김재규와 김계원은 차지철을 미워하는데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 김재규는 경호실장과 사이가 나쁘고 박대통령 신임도 최악의 상태, 11월초순 김치열 법무로 경질설 나돌던 김재규는 각하의 오판은 차지철의 그릇된 정보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꼭 그놈을을 없애버리겠습니다. 김계원에 불평함.
* 오만한 차지철 조정력 없는 김계원, 울분 참는 김재규 갈등속의 유신실세 3인은 키도 박대통령과 비슷한 모두 164㎝안팍.
* 5시 20분에 혼자 안가에 도착한 김계원에게 김재규가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오?" "나도 모르겠소."
▣ 차지철의 오만
* 김재규나 장관이 결재를 받으려 오는데 경호원들에게 지시하여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먼저 결재를 받고 나올 때 까지 기다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경호실 정보처를 신설하여 정치 및 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어떤 사태가 야기되었을 때는 정보부장에 앞서 보고 하였다. 다른 요인들보다 먼저 정보를 차지하는 것이 권력게임의 요령이었다. 정치공작을 경호실장이 하고 정보부는 그 심부름을 하는 형편이었다.
정치공작이 실패하면 차지철은 책임을 정보부로 돌려버리곤 했다.
* 육군 대위 출신인 차지철은 3군총장을 불러놓고 자신은 상석에 앉아 부하 다루듯하며, 군통수권자 인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사진을 찍은 일도 있다.
* 정치에 신경쓰느라고 본연의 임무인 경호는 소홀히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40분쯤 차지철은 대통령을 모시러 가려고 사무실을 나설 때 부관이 권총을 건네자 갖고 있어라고 하며 돌려 주었다.
[박대통령 최후]
▣ 5인의 자객
* 의장과장 박선호(45세)에게 암살준비 지시를 내렸다. 박선호는 중학교 은사이며 자기를 아껴주는 김재규 명령을 받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총장이 와있고 부장이 총을 차고 나와서 각오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부장이 육군총장과 함께 유혈 쿠데타를 하는구나. 내가 거부하면 성공하건 못하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 박선호는 해병출신 심복 경비원 관리 책임자 이기주(32세)를 불러 엠 15로 무장하게 하고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인 유성옥(36세)을 불러 명령하였다. "주방앞에 차를 대놓고 거기서 기다리다가 부장님의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주방으로 몰아 넣고 반항하면 사살해."
* 김재규와 박선호과장과 정보부장 수행 비서관 박흥주 대령(40세),경비원 이기주, 운전수 유성옥 이 다섯명의 자객은 정보부의 경직된 상명하복 관계에다가 특수한 의리 관계로 뭉쳐 다섯명의 방심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기습하게 된다.
▣ 만찬장의 여흥
◐ 대통령이 김재규를 질책하다.
* 당시 경호관례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들은 정보부가 관할하는 궁정동 시설에 도착한 뒤에는 대통령 경호를 정보부에 넘기게 되어 있었다.
* 6시 5분에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부산사태는 김영삼의 신민당이 조종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선입견을 깔고서 김재규와 정보부의 무능을 질책했다. 차지철은 "그까짓 새끼들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탱크로 싹 갈아뭉개 버리겠습니다."
◐ 도승지 한잔 하시오.
* 대통령의 오른쪽에 경호실장,앞의 좌측에 비서실장,우측에 정보부장이 앉았으며 대통령 좌우에는 신재순(23세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생,광고모델로 일한 적 있다.)과 가수 심수봉이 앉았다.) 박대통령은 미국 대사가 김영삼을 만났다는 KBS 7시 뉴수를 듣고 심사가 뒤틀렸다.
"도승지 한잔하시오." 대통령은 김계원실장을 도승지,김부장을 포도대장이라 불렀다. 차실장은 술이 약하고 김재규는 간이 나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한시간 40분 사이 대통령과 김계원이 시버스 리걸 한병 반을 비었다. "이제 노래나 좀 듣자."하고 박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심수봉이 '그때 그사람'을 불렀고 차실장을 지명하자 차지철이 도라지를 불렀다.
* 남효주사무관이 들어와 김재규에게 귓속말로 '박선호 과장이 전화왔다고 합니다.' 하니, 7시 40분쯤 김재규는 밖으로 나가서 준비상황을 확인하고 들어왔다. 차실장이 앙코르로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김실장은 "각하 차 실장이 저런 노래도 다 하는군요."
▣ 김재규의 행동개시-"버러지같은 자식"
* 김재규가 들어왔을 때는 차실장의 지명으로 신재순이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를 부르고 박정희도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후렴 '예예예....'할 때 김부장은 행동을 개시하였다. 오른손으로 옆에 앉은 김계원의 허벅지를 툭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똑바로 되겠습니까?" 하고는 차지철을 쏘았다. 차지철은 오른손에 총을 맞고는 실내화장실로 뛰어 가면서 "경호원. 경호원" 소리쳤다.
* 김계원은 "각하앞에서 무슨짓이야!" 라고 소리치며 김재규를 밀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뭣들 하는거야" 벽력같이 지른후 눈을 감고 정좌하여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실장을 쏜 뒤 4-5초 후 박대통령을 쏘았다. 연발하려 하였으나 불발이었다. 순간 불이 꺼졌다.김계원은 마루로 뛰어나가며 "불켜 불켜 !"
* "각하 괜찮습니까? 신재순이 묻자 박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응, 나는 괜찮아(신재순은 너희들은 피해라로 들렸다) "
▣ 절친한 친구를 쏘다.
* 두 번째 총소리에 경호원 대기실의 박선호는 의자에 앉아있던 경호관 안재송과 정인형(박선호와는 친구임)을 사살하였다.
"총을 뽑지마, 움직이면 쏜다. 우리 같이 살자!" 하며 약 15초 붙들었다. 그러나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가 쏘았다. 정인형도 몸을 일으켜 권총을 뽑으며 박선호를 향해 덮쳐오자 절친한 친구인 그를 쏘았다.
* 배전시설 관리자 강무홍은 총성을 듣고 순간적으로 전기합선으로 생각 스위치를 내렸다. 박선호가 대기실에서 마루로 뛰어가는 순간 전기불이 나갔다. 이 전기불이 조금 일직 나갔더라면 박선호가 당했을 것이다. 박선호는 "나 과장이다 불켜 !"
* 승용차 안에 있던 박흥주,이기주,유성옥 세사람은 총소리와 함께 7미터 떨어진 주방을 향해 뛰어가서 경호원을 죽이기 위해 주방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 애원하는 차지철
* 김재규는 대기실에서 두명의 경호관을 죽이고 마루로 나온 박선호의 손에서 총을 뺏아 았다. 차지철은 "경호원, 경호원"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김재규와 맞서게 되자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들고 "김부장,김부장" 하고 애원하였으나 김재규는 한발로 치명상을 입혔고 차지철은 쓰러졌다. 와장창하며 문갑이 넘어지자 심수봉이 방안을 뛰쳐나갔고 신재순은 식탁 발밑 파인 곳에 몸을 숨겼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귀 뒤 50센테에서 머리를 쏘아 절명시켰다.신재순은 화장실에 가서 숨었다. 김계원은 마루에 서 있었다.
*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 "뭐라고 하지" "각하께서 과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알았어."
▣ 전조-부엉이 울음
* 박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생, 만 61세, 1979년 오후 7시 50분에 사망.
* 청와대 본관 청기와 위에 이상한 물체가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무장한 경호원이 나가보니 부옹이 같은 큰 물체가 기분 나쁜 울음을 토하고 날아갔다. 곧 이어 총소리가 났었다.
* 비서실장은 각하를 국군병원으로 모셔다 두고는 와이셔츠 바람에 신발도 짝짝이를 신고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왔다. 이재전중장( 경호실 차장)을 돌어오게 하여 "각하께서 큰일을 당하셨소. 유고 내용을 발설치 말고 경호실을 장악해 주시오."
*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장 장세동대령은 경복궁 단실에서 총성을 듣고 300미터 떨어진 궁정동 안가에 와서 확인하였다. "무슨 총소리인가?" 하니 중정 소속 경비원은 훈련중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는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육본으로 갑시다.]
▣ 김부장 육본 벙커로 갑시다.
* 김재규는 정승화총장, 박흥주 대령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 곱표를 하였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저격당했습니까?, 외부의 침입입니까? 내부소행입니까? " 하고 계속 물어도 김재규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 "어디로 갈까?" 하고 김재규가 박흥주 대령에게 당황스럽게 묻자 정총장이 "병력배치를 하려면 육본 B2벙커로 갑시다. " 박흥주도 찬성했다.
김재규는 정보부로 가지않고 육본으로 간 것은 중대 실수 였다. 지휘소를 정보부안에 설치하고, 궁정동 현장을 봉쇄하며, 시해 상황에 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했었다.
그런데 박대통령 사체처리에 대해서도 아무런 지침을 주지 않았다.
* 정총장은 부엉이 2(2급비상상태)를 발령하였다.
* 김계원의 연락을 받고 청와대로 정부 요인들이 왔고 최규하 총리는 울면서 "김일성이가 알면 어떻게 하나? "
* 김계원은 "국방장관 일행이 이리로 못오겠다고 하니, 총리께서 그 쪽으로 가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럼, 그쪽으로 갑시다." 김계원은 빨리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신현확 부총리는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대통령이 유고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본사람이 없지않습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계엄령을 선포하자는 말입니까? "
최총리 신현확 총리,노재현 국방장관 이 국군원을 찾아 박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였을 때는 오전 한시가 지나고 이었다.
* 27일 새벽 4시를 기해 노재현 국방장관의 제안에 따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사령관에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임명하였다. 전국계엄시는 정부 의 모든 행정기관이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게되고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명령만 받게 된다. 자칫 군정이 되기 쉽다. 그러나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계엄이라면 계업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통제를 받게되는 차이점이 있다.
* 최규하 총리를 모시고 늦게 나타난 김계원 실장은 처음 김재규가 군을 장악했다고 오판하고 육본벙커에 모인 각료 장성들에게 " 차지철이 문제....," 라고 하다가 분위기를 파악한 후에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려고 정총장을 옆방으로 데리고 갔으나 김재규가 따라 들어와 말을 못했다.
* 최규하 총리는 밤 11시에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개최하겠다고 하달하였다.
▣ 김재규를 체포하다
* 마침내 11시 20분쯤 김계원은 유혁인 정무수석의 권유에 따라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몰래 불러내어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알렸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총장 빨리 잡으시오"하니 정숭화 총장은 김진기 헌병감을 불러 "김재규를 복도 커브지점에 수사관을 대기해 두었다가 거기로 유인하여 체포하고 보안사령관에게 넘기라" 라고 지시했다.
* 처음 정보부 정동 분실과 담하나 사이를 둔 보안사 정동분실로 데려갔다. 정보부에서 처들어 올까봐 전전 긍긍하다가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도중에 버스는 잠수교쪽으로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옆으로 쓸어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큰일은 없었다.
김재규는 "정보부 부하들이 쳐들어 올거야", "내가 각하를 살해 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으니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찾아야 돼" 하며 수사관을 협박하기도 하였다.
김재규는 구타당해도 무사처럼 꼿꼿했다.
* 김계원은 29일 연행 구속되고, 정승화는 1979년 11월 1일에 참고인 진술서를 썼다.
▣ 박대통령의 시신
* 유성옥 등 두명의 정보부 직원이 감시하였다. 20여분 인공호홉 심장 마사지 등도 무위로 돌아갔다. 군의관들은 응급처치중 감시자들이 수건으로 얼굴을 자꾸 덮어서 죽은 이가 누군지 몰랐다. 헌 넥타이핀, 혁대도 헤어져 각하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통령의 사체는 숨이 끈어진지 세시간 동안이나 이름 모를 변사체로 누워 있었다.
* 감시자들은 전화도 통제하였다. 국군 서울 지구 병원 공군준장 김병수 원장에게 전두환 보안사령관 우국일 참모장 둥으로 부터 사체 신원을 캐묻는 전화가 빗발치자 불길한 생각이 든 김병수는 몇 년전 본에 대통령의 아랫배 반점으로 각하임을 알게 되었다.
보안사 우국일 참모장은 전화로 "여러 가지 어렵고 위협적인 상황에 있는 것 같은 데 답은 예스,노로 대답해 주시오. 운명하셨나?" "예" "실장이야?" "아니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럼 코드원 이야?" "예"
▣ 전두환의 등장
*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진 진공 상태에서 10.27 비상계엄조치에 의해서 권력의 축이 이미 군부로 이동하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이 시해돼 군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정부기관중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사람이었다. 권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혼미한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수집을 통해서 신속한 판단을 내리고 주인없는 권력을 낚아채었다.
막강한 합수본부설치 기안을 명령한 것은 아직도 김재규가 체포되기 전이었다. 당시 48세의 육군 소장,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고, 1979년 10월 28일 오후 4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 중간발표를 하였다.
▣ 미국의 시각
* 김성진 문공장관은 4시 10분 중앙청 기자실 흑판에 대통령 유고 발표문을 썼다.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자정 무렵에 미국측에 통보한 정보가 언론에 흘러 들어갔다. 한국 정부가 공식발표전인 새벽 4시 30분에 미국언론들은 박정희 유고를 보도함.
*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포기한 것은 박정희의 반대때문이라기 보다 미국 군부, 정보기관, 재향군인회, 군수산업체, 공화당의 반대때문이었다.
*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했다기 보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제거하고 집권하면 적어도 미국이 반대는 하지않을 것이라는 심증 정도는 갖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강대국 미국의 힘을 배경으로 삼아 그렇게도 박정희를 몰아세우고 민주화세력을 비호해왔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죽은 박정희에게 바친 찬사와 민주투사들에 대한 경멸 섞인 의구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정부는 민주화세력의 반 박정희 투쟁을 지원하고 이용하면서도 속으로는 완화된 유신체제 정도의 통치가 한국사회 수준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은 그런 완화된 유신체제로 보게 된다.
- 글라이스틴의 박정희에 대한 냉철한 평가-
"한국 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할 위치는 확고하다. 최근에 와서 정권의 정통성이 약화되긴 했지만 대부분 한국인 들은 그를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분단과 전란과 빈곤으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눈부신 경제발전과 자부심을 가져다 준 지도자로 보고 있다. 농촌출신인 그는 농민들을 위한 애정을 한시도 잊지않았다.
물론 그는 사교성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국민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식의 자신만만함은 그의 모델이었던 일본 명치유신시절의 영향이었다. 지금은 그의 위대한 성취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면서 다른 해결책을 요구하는 미래에 대비할 때이다."
▣ 최후의 목격자
* 신재순은 피흘리는 대통령을 안고 있다가 김재규가 권총을 머리에 갖다대자 실내화장실로 피하였다. 다음에는 사무관 남효주와 신재순이 차지철을 부축하여 일으키려고 하였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아" 하고는 차지철은 다시 쓰러졌다. 남효주는 신재순을 부속실로 들여 보냈다.
심수봉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신재순은 간첩들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자,경호대기실에 둔 핸드백안을 가지려 가려고 했다. 주민등록증이 있기 때문에 주소를 알고 집까지 찾아와 죽일 거라고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문을 빼꼼히 여는데 누군가 "야 들어가 문닫고 가만 있어"
* 김재규 구상에 따르면 감금해 뒀으야 할 두 여인 그러나 지시를 받지못한 박선호는 20만원이 든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고 풀어주었다.
지금은 중년여인이 되어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신재순은 최후의 목격자이다. 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나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듯 해탈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난 괜찮아 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 박선호 지시로 겁에 질려있던 안가 경비원 김태원은 이기주에 이끌려 대기실로 들어가 쓰러져 있는 경호원들을 향해 확인 사살을 하였다.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고 기절한 경호원 박상범은 용하게 살아났고 뒤에 전두환 대통령을 경호하여 미얀마 아웅산에서도 무사했고, 김영삼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보훈처장 지냈다. 그가 살아난 것은 김태원이 적극적으로 확인 사살을 할 생각 이 없어 그가 쏜 총알이 대부분 빗겨가고 있었고, 또 부상하여 기절한 사람 중에는 정보부 소속 직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태원은 정상이 참작되는 듯 하였으나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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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하에 배은망덕한 김재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