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8,27-33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조커’(2019)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악의 화신이 되어 가는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광대복장을 입고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젊은 아이들은 구타하고 조롱하며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시장 밑에서 일할 때 태어난 고담시의 시장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생활에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어머니의 망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믿을 사람은 어머니 한 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학대하고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리고 고담시티의 악의 상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조커가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는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 조커가 될 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악이 정당화됩니다.
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게 그렇게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사탄이 되게도 만듭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니까 이럴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이 짐승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이라는 말은 거의 사탄이 되는 것까지도 정당화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탄도 자신들은 영원한 종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분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이 사람을 사탄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조커가 ‘나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가졌어도 끊임없이 ‘인간이면 다 이럴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느님이 되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8,27-3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셨으나,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아시고 고쳐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 대답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32절).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혹독하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책망하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생활 속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여도, 베드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행복을 위한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고난을 겪고 십자가라고 하는 어려운 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모두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 혹은 고통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십자가와 고통은 항상 영광의 신비로 부활의 신비로 연결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항상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큰형님께서 일본으로 회사 출장을 갔다가 선물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샤프펜슬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 연필을 사용할 때였고, 여유 있는 집의 아이들만 샤프펜슬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샤프펜슬을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만에 샤프펜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분명히 필통 안에 넣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아침에 내 샤프펜슬이 너무 좋다면서 빌려서 써 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의심이 가득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친구만 보게 되었고, 이 친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훔쳐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의심은 점점 커졌고, 그 친구에 대한 미움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문제의 샤프펜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 깊숙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찾고 나서도 친구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웠을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과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의심, 부정적인 생각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정답을 말한 사람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였습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게 되면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믿음 없는 곳에서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사탄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바로 주님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아프리카 속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9,13)
하느님의 일은 모르쇠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세우는
무지개를 보지 못하리.
하느님의 빛을
사람이 가리고 있으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계약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려져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은
내 뜻이나 내 신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예수를 팔아 내 뜻이나 내 생각을 고집했을까?
나는 얼마나 많이
예수를 팔아 내 가치관이나 신념만을 고집했을까?
나는 얼마나
예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했을까?
예수를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을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 29)
낮아짐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사랑의 발길을
먼저 내딛는
사랑의
스승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보여주시는
소중함의 본질이신
소중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삶의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대자유의 삶을
사시는 진정한
자유인이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앓으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시는
십자가의
기도이십니다.
마지막 여정이
수난과 죽음을
거치는 부활의
여정임을
보여주시는
참된 부활이시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지막
고향이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시는
맑은
완성자이시며
참된 인생이
되십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오늘은 더욱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ㄱ)
'고난과 배척을 받으신 그리스도!'
오늘 복음(마르8,27-33)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과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ㄴ)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8,28)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곧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믿고 있는가?
혹시 죽음(희생) 없는 부활(영광)만을 바라는 신앙은 아닌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