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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 07:47:19, 조회 : 899, 추천 : 0 |
그가 한국에 온 것은 2003년 8월. 당시 비즈니스 행정학을 전공하는 부룬디 국립대 3년생이던 부징고는 대구유니버시아드 하프 마라톤에 출전예정이던 부룬디 국가대표였다. 다만 축구와 달리기를 좋아했을 뿐. 전문적으로 마라톤을 하지 않은 그는 그저 잘 뛴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대표에 뽑혔다. 그러나 그는 비자발급이 지연돼 한국에 늦게 도착한 탓에 레이스에는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
아쉬움만 남은 유니버시아드대회 직후. 그는 인생 최대 결심을 했다. 한국에 남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그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구호난민신청을 했다. 올해 안으로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게 회사 동료의 예상.
부룬디는 소수파 집권 종족과 다수파 피지배 종족간 내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 부징고도 15세이던 1993년 내전 중에 부모와 동생 등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는 한국에서 카메라 렌즈를 만드는 중소기업 등에서 기능공으로 일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계속 뛰었다. 홀로 있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출구가 달리기였던 셈. 그가 국내마라톤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지난해 5월 열린 경향신문 서울마라톤에서였다.
그는 당시 하프코스 1위를 차지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개인사정으로 불참한 회사 동료의 번호를 달고 뛰었기 때문. 그는 그해 11월 국내 신문사가 주최한 대회에서 첫 풀코스에 출전, 2시간26분8초로 3위를 차지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듯 처음에는 자리를 피하던 부징고는 “우승을 해서 너무 기쁘다. 그냥 뛰는 게 재밌어서 뛸 뿐 프로선수가 되거나 할 생각은 없다”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회사동료들이 인터뷰를 도와주자 비로소 미소를 머금기 시작한 부징고. 그는 “한국이 너무 좋다. 영원히 한국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며 햐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마스터스 최강자 버진고 도나티엔(30)이 국내 마스터스 대회에서 처음으로 2시간 20분의 벽을 깨뜨리는데 성공했다. 도나티엔은 18일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동아일보사 서울특별시 대한육상경기연맹 공동주최)에서 2시간 18분 39초를 기록, 남자 마스터스 부문 대회 정상에 올랐다.
국내 대회에서 2시간 20분의 벽이 깨진 것은 이번이 처음. 도나티엔은 자신이 갖고 있던 종전 기록(2시간 20분 57초)을 2분 18초가량 앞당겼다. 도나티엔은 200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작성한 자신의 최고기록(2시간 19분 25초)도 함께 갈아치웠다. 지난해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한 도나티엔은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해 기쁘다”며 “날씨가 좋아 최고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유창한 한국말로 소감을 밝혔다. 이어 도나티엔은 “회사 동료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해왔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앞으로도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아프리카 브룬디 출신인 도나티엔은 국내 귀화를 앞두고 있는 선수.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중거리선수로 출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도나티엔은 대회가 끝난 후 망명을 원했고, 유엔으로부터 구호 난민 자격을 얻었다. 현재는 경남 창원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업체 (주)위아의 해외영업부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회사 동료들과 꾸준히 훈련을 하고 있다. 도나티엔은 “계속 열심히 훈련해 기록을 앞당기고 싶다”면서도 “직업 선수로 나설 계획은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존댓말 반말 구분하는 게 힘들었죠. 요즘도 한국말을 더 잘 하려고 매일 2시간씩 공부해요.” 브룬디 마라토너 출신 난민인정자 버진고 도나티엔(29). 참가하는 아마츄어 마라톤 대회마다 우승을 휩쓴다. 마라톤 성적도 좋지만 주위 도움으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운 덕에 귀화를 꿈꿀 정도로 비교적 안정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도나티엔은 2003년 8∼9월 열린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석했다 바로 난민을 신청했다. 내전으로 불안했던 브룬디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소수족 출신이었다. 그가 15살 때인 1993년 종족간 충돌로 부모가 무참히 살해됐으며, 살 터전마저 빼앗긴 뒤 갖은 위협에 시달렸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들른 한국에 난민제도가 있다는 말은 한줄기 희망이었다. 단장도 코치진도 없이 혼자 입국했으니 제재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기댈 사람도 없었다. 난민을 신청할 때까지 그는 오롯이 홀로였다.
여느 난민들처럼 인정받기까지 2년 가까이 걸렸지만 도나티엔에겐 숙식, 한국어 교육, 직업 소개를 도와준 이들이 있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소개해준 난민지원단체 코람데오에서 총무로 일하면서 지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어를 더 많이 가르쳐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이주민 토킹센터를 소개받아 일요일마다 3시간씩 한국어를 배웠다. 마라톤 운동 클럽에서 만난 이들은 마라톤 동호회가 활성화된 기업을 소개시켜줘 2005년 6월 난민 인정과 함께 취업도 했다.
도나티엔은 한 차량부품 제조업체의 영업부에서 장비를 만들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마라톤 연습은 아침 저녁으로 2시간씩 하면서 대회에 출전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평균 2시간씩 책을 보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하는 게 힘들어서 취업한 다음에도 고위직 인사들에게 실수하기도 했지만, 이젠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
“귀화하려면 한국말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불안해하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는 2011 귀화하여 한국명 '김창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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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선수 김창원 역시 어려운 과정이 많았네요
열심이 살아가도록 많은 관심이 필요 하네요
김창원님, 담에 만나면 싸인 꼭 해주세요.
그런 사정이 있는줄은 몰랐네요
김창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