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8
2월16일[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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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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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5mdeFbvihs
[도미니코수도회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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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정신 놓고 폭풍 흡입할 때, 초대한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는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 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될 수 있으면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이 바래기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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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GgBdCx6W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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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의 이유가 하느님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단신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는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신랑과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희생은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모든 희생은 피 흘림입니다. 피는 생명인데 내가 흘리는 피로 끈끈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부부관계이고 가정이고 나라이며 넓게는 인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남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까요? 어차피 세상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희생을 합니다. 그 희생이 자기 자신이 될 때는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에서 주인공은 호화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성공한 월스트리트의 경영자 잭 캠벨입니다. 그는 직업적 성공을 위해 개인적인 관계와 가족생활을 희생하면서 자기 경력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잭은 의문의 남자와의 이상한 만남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다음 날 아침, 현실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새로운 삶에서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며, 대학 시절 연인 케이트와 결혼한 평범한 가장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방향 감각을 잃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잭은 점차 사랑, 가족, 일상의 단순한 기쁨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족의 따뜻함, 부모로서 도전과 보상, 헌신적인 파트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대체 생활에 더욱 몰입하면서 그는 개인적인 관계보다 자기 경력을 우선시함으로써 자신이 놓쳤던 것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됩니다. 어차피 고생하는 것으로 따지면 같은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고생했던 것은 외로운 지옥이었음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단식은 이러한 희생과 같습니다. 희생의 목적은 소속감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만을 위한 희생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희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가정을 위해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며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가족들은 그러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하는 희생이 가정을 위한 것이라면 가정을 지켜주는 더 큰 공동체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하지만 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가정을 위한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 가장 큰 공동체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요 모든 공동체의 원인인 하느님과 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이 먼저 신랑이신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도, 나라도, 가정도, 배우자에 대한 희생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국가 유공자로서 가정에서도 환영받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희생이 이기적이지 않도록 모든 공동체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을 위한 희생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단식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희생으로 온 인류, 나라, 가정, 배우자를 위한 희생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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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좌 신부 때입니다. 1994년이니까 어느덧 30년 전입니다. 지구 초등부 교사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 신부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이 말의 텍스트는 시간을 묻는 것이지만 이 말의 콘텍스트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가?’는 질책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의도를 잘 모르고 ‘지금 10시 3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텍스트는 맞지만 콘텍스트는 파악하지 못한 50점 자리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나 머리가 아파!’라고 말하면 남편이 ‘약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텍스트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친정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새로 구입한 청소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정말 두통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맥락의 콘텍스트를 잘 파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집단 간에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콘텍스트를 잘 선점하고, 프레임을 잡는 곳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선거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야당에서는 정권심판, 중간평가라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발목 잡기가 지나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중간평가를 다루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콘텍스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국민들은 텍스트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식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 테러,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두고도 야당과 여당의 콘텍스트는 첨예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규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우려를 발표합니다. 야당은 신상공개, 테러를 벌인 동기, 공범여부, 정당 활동에 대한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당은 경미한 사고, 우발적인 사고, 정치적인 동기는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는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식’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단식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단식에도 몇 가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곤 합니다.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서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때에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가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께서는 세월호의 유족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식의 진정한 콘텍스트는 단식의 행위와 날수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예수님께서도 단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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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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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겉으로는 단식하며 의인인 체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며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정의와 공정을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단식은 자신의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곧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단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고자” 정의와 공정에 헌신하는 희생적 삶이며,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들과 내 것을 나누는 사랑의 삶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 되고,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는 치유자가 됩니다.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받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합니다. 불의와 불공정, 이기주의적 사고, 다른 이에게 무관심한 개인주의로 서로에게 준 상처는 이 의인들의 단식으로 낫게 됩니다. 단식이 고통스럽듯이, 헌신과 나눔이라는 단식도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으로 우리의 상처는 낫게 됩니다. 또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단식의 실천에서, 주님의 부재 곧 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듯 느껴지는 두려움도 극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헌신 속에서 주님을 부르면 대답하여 주시고,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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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유대인들의 단식은 원래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서 참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식이 ‘슬퍼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참회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일상적인 신심 행위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많이, 또 자주 하면 좋은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단식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마태 6,16ㄱㄴ)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미 메시아가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와 계시는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참회하면서 슬퍼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말씀은, “지금은 기뻐할 때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구세주께서 오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살고 있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이 말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에 관한 율법 실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 교회의 단식과 금육 문제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극기 고행과 단식과 금육을 잘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그런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단식이 없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이고, 그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메시아와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인지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신심 행위로 단식을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아마도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더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단식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단식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일에 그렇게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모르거나 외면하면서 단식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강요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병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병자도 마찬가지인데,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단식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도 자비도 없는 일, 무자비하고 냉정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신앙인들이 신랑을 빼앗긴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몹시 슬퍼했던 신자들은 슬픔이 너무 커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단식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은 정확하게 말하면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신랑을 떠난 일’입니다. 죄를 짓고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신랑에게로(주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단식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보속’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보속입니다.>
그러면 꼭 단식을 해야만 하는가?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인가? 우리는 단식과 금육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간에 어떤 신심 행위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단식재와 금육재를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율법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지만, 반대로, “혹시 내가 지키는 단식과 금육도 위선이 아닐까?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주눅 들고, 걱정하고, 괜히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도 신앙생활의 기쁨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보속’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보속의 의미로 하는 단식도 기쁨 속에서 해야 합니다.
“혹시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라는 걱정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제1독서로 읽는 이사야서의 단식에 관한 말씀은, 단식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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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8-9장은 열 가지 기적 이야기를 모아 전합니다. 카파르나움(9,1 참조)에서 일어난 두 가지 다른 기적 사건들 사이에 마태오 복음 9장 9-17절이 삽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9,9-13 참조). 이 일은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유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 학자들(9,3 참조)과 바리사이들(9,11 참조)이 그리하였듯이 예수님의 행동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라 금욕하며 살았고(3,4; 11,18 참조), 바리사이들도 일주일에 두 번 규칙적으로 단식을 지켰기 때문입니다.(루카 18,12; 디다케 8,1 참조)
여기서 단식은 개인의 신심 증진을 위하여 행하는 사적 단식을 의미합니다.(마태 6,16-1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혼인 잔치를 비유로 들어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천상의 삶에 대한 기쁨의 이미지를 제공합니다.(22,2-13; 25,1-12 참조)
이러한 축하의 자리에 애도 예절이 적합하지 않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게 될 때, 곧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게 되시면 그들은 단식을 할 것입니다.
단식은 중요한 신심 행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엄격한 율법 준수 또는 금욕주의적 삶을 위한 목적을 넘어서 그 근본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식은 신심을 더욱더 견고히 하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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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9,14)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단식은 잘 알다시피 어떤 목적 하에 일시적으로 먹기를 중단하는 겁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의료나 미용 목적의 단식이 유행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긴 했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적 행위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절대자 앞에 나아갈 때 맑고 정갈한 상태를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으로 행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이나 패망,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와병, 민족적 수치 앞에서 옷을 찢고 먼지를 머리 위로 날리며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걸치고 단식했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전해질 때 역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그분 마음을 돌리고자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인간이 하느님께 통회와 청원의 마음을 담아 취하는 겸손의 표현이고 또 다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단지 굶는 행위라 본다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라는 말이 가능하긴 합니다. 단식의 지향보다 그 빈도수에 관심을 둔다면 그럴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식을 그 의미나 지향보다 횟수와 형식에 관심을 두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이사 58,4)
그리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이사 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풀어 주고, 끌러 주고, 내보내고, 부수어 버리고, 나누고, 맞아들이고, 덮어 주고, 숨지 않는 것" 즉, 가난하고 약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연대입니다.
그저 먹고자 하는 자기 욕구를 절제하는 단식에 그치지 말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로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행위가 진정한 단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내가 굶고 비워내는 행위에서 타인을 채우고 풍요롭게 해 주는 행위로 승화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진정한 단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단식이 온전히 이타적이기만 한 행위일까요? 내가 굶어 남의 배를 채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움의 행위에 따르는 놀라운 은총을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을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피조물로 이 지상에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빛과 치유, 의로움, 주님 영광의 보호, 주님의 경청과 즉각적 응답... 이렇게 주님과 단단히 결속할 수 있다면, 몇 끼 굶는 게 문제겠습니까! 내 밥그릇 비워 남 주는 게 대수겠습니까! 단식의 가치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라면 어찌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식은 사랑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실 때 혼인 잔치와 신랑, 잔치 손님의 표상을 사용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르익어 절정을 이루는 혼인 잔치, 그 사랑이 세상에 공표되고 인정 받는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사랑 이외의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신랑은 신부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신부 역시 신랑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듭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소리 높여 축하하며 사랑의 흥을 돋우고, 손님들은 사랑의 포도주에 취해, 저마다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사랑 안에서 헤엄칩니다. 이 자리에선 남녀노소, 빈부격차, 인종, 민족, 그밖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신랑이 현존하는 혼인 잔치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기고 잔치가 끝나고 친구와 손님들도 뿔뿔이 흩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신부는 누구보다 황망히 울며 애태울 것입니다. 님을 잃은 슬픔에 잠겨, 비로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느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단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그들처럼 단식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단식을 살지 못한 부끄러움에 다시 처음부터, 단식의 가나다부터, 단식의 ABC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단식 자주 하십니까? 안 하신다구요? 정말 부럽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늘 함께하시니까요. 그래서 단식할 필요가 없으시니 감축드립니다.
저는 사순절 시작하기 전부터 단식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신랑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맘이 너무 짠할 때가 많아서입니다. 그분이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안에서 함께 고통받고 억압받고 계시니, 어찌 혼인잔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그분과 함께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을 때, 그분을 그리며 가난한 이들과 동참하여 단식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엔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도 벌이겠지만, 가끔은 사랑의 단식을 통해 그분을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그분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보다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주님 어전에 가납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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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예언서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모은 곡식을 모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특별희년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이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단식이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깨끗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9,15)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사랑의 단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의 단식’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자비와 희망의 단식’이야말로 새 시대에 행하는 새로운 단식이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새 포도주가 됩니다.
결국, 단식은 이미 베풀어진 주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얼굴]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9항)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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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지고 뉘우친 마음이며 이를 위한 선행의 행위가 바로 단식입니다. 단식 행위는 경건한 신심 행위이기에 행위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서 안에서의 단식은 수덕 실천의 기능보다는 애환 중에 하는 슬픔의 예식이나 참회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가 낳은 아들이 중병에 걸려서 단식하였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단식을 중단하였습니다.(2사12,16~2참조)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다윗은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단식하고 운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 아이가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오.”(2사12,22)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참회 혹은 슬픔, 고통의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도 단식은 이런 참회, 슬픔, 고통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속죄의 날일 경우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단식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 그에 따르는 슬픔을 표시하면서 이를 깊이 참회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단식이란 참회의 뜻도 있지만 그런 참회를 통하여 자기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동참의 뜻도 있습니다. 이런 정신이 확연히 드러난 성서가 바로 오늘 독서인 이사야의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6~7)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단식은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표시하는 참회의 뜻과 이를 사회적으로 확대하여 굶주린 이들과 진정으로 함께 하겠다는 동참과 나눔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식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58,4)라며 질타합니다. 마침내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더욱더 단식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은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성전에 들어와서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18,12)라고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기는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바리사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 6,17)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8) 라고 촉구하신 그 이유가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다음 광야로 물러나 40일간 단식하시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셨나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단식과 참회는 비움이자 낮춤이며 자기 포기이며 연대와 동참의 표시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의 빈자리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웠고, 하느님의 뜻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에 나와서 삶에 지치고 고달프고 힘겨워하는 사람들과 연대와 친교를 나누는 표현으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가7,34)라고 비난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첨부하셨는데,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7,35)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그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신들을 사랑하시어 부유하신 분이 가난해지셨으며,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게 되시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잃고 난 뒤, 참으로 처절하고 애통하게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사랑에 의한 단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다음에 그들은 진정한 단식을 할 것이며, 자신들을 사랑했던 그 분의 그 사랑으로 그들 또한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단식한 까닭은 사랑의 기억과 자신들을 사랑했던 주님께 대한 사랑의 통회이며, 사랑에서 울어 난 참회의 표시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나의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무이한 참된 단식을 준비하셨는데 그 단식은 바로 십자가상에서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사랑의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의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며,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기 위해 참된 단식을 실행하셨습니다. 그 참되고 거룩한 죽음의 단식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고 세리와 죄인들은 참으로 참회와 자선의 단식을 실행하였으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순절 기간 우리 또한 단식하며 예수님처럼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 참된 단식을 실천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던졌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단식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오늘도 세상의 많은 사람은 왜 단식하는 걸까요? 이 모든 사람이 오늘 이사야의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단식하였으면 좋겠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부터 참된 단식을 실행하길 바랍니다.
예전 세월호 특별법 입법 청원 행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신문에 읽었던 죄를 지은 것은 정부와 정치권인데, 왜 유족들이 단식하고 아이들이 땡볕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하는가, 라는 글귀가 아직도 생생하게 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 질문은 오래전 진도 팽목항을 순례할 때 제 마음에 떠 올랐던 의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단식해야만 했던가? 오늘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로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날입니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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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비자들에게 종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후에 신앙을 버리시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불행을 해결할 수 없다면서 기껏 얻은 신앙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데 하느님 믿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중에서 너무 미운 사람이 있다면서, 어떻게 성당 다니면서 저럴 수 있냐고 그런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듭니다.
사실 종교로 인해 세상 안에 혼란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을 비롯한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세에는 선교를 명목으로 한 식민지 지배도 있었습니다. 최근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까지 종교인의 잘못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해하시는 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따르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 안에서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종교 잘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행복의 기준 자체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의미와 가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음을 두고서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단식의 의미와 가치는 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식의 의미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을 동참하는 이유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와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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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지니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
(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 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6-7)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욕망을 끊을 수 있는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습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됩니다.
사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있을 때 잘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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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깊기만 하면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경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홀로와 더불어가, 관상의 깊이와 활동의 넓이가, 잘 조화되고 균형잡힌’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 논쟁”이고, 제1독서 이사야서 주제는 “참된 단식”입니다. 유다인의 전통적 수행, 자선, 기도, 단식 셋중 하나에 속하는 단식이고 모든 고등종교 전통에 자리잡고 있는 단식수행입니다.
단식하니 식당이 떠오릅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음식점은 얼마나 많은지요. 흔히 “먹자고 하는 일인데...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수도공동체만봐도 먹는 일은 현실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면 곧장 식당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동공동체의 중심은 성당과 식당이라고 합니다. 식당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공동체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주방장 수도자는 수도공동체의 큰 복이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식당에서는 식사食事가 이뤄지고 농장에서는 농사農事가 이뤄지니 말그대로 삼사三事,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식사와 관련된 단식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제4장은 온통 수행덕목들에 대해 74절까지 나열되어 있고, 10-13절까지는 육체의 금욕에 관한 내용들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
육체를 다스리라.
쾌락을 찾지 말라.
금식을 좋아하라.”
육체에 끌려가지 말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바로 단식입니다. “금식을 좋아하라”라는 말씀은 영어로 하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Love fasting”(단식을 사랑하라),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마디입니다. 모든 수행생활의 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하는 수행이기보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도생활을, 삶을, 공부를, 기도를, 노동을, 침묵을,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수행의 최고 경지입니다.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행할 때 마음의 순수요 심신의 자유로움에 건강입니다. 수도승들의 영적 아버지라 칭하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중 여덟가지 악한 생가들중 첫 자리에 나오는 것이 바로 탐식입니다. 그 발생학적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식에 이어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나태), 허영, 교만입니다. 가장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음식의 무절제인 탐식이요 식욕을 채운 이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음욕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닦기 힘들다”는 말도 바로 탐식을 경계한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식욕食慾, 이성에 대한 성욕性慾, 물건에 대한 물욕物慾, 인간의 기본적 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은 선도 악도 아닌 현실이며 문제는 탐식貪食, 탐애貪愛, 탐욕貪慾에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악덕의 뿌리인 탐식의 절제의 영적훈련이 단식이요, 수도승전통에서는 “단식을 사랑하라” 합니다.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에서 유혹받았을 때 주님은 40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단식에 대한 능력도 탁월하셨지만 결코 단식을 수행의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권장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금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식 자체가 수행생활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에서 참으로 자유로웠기에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무엇보다 분별의 지혜를 요하는 단식이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적절할 때의 단식입니다. 자칫하면 에고를 부풀릴 수 있는 자기중심적 단식이 될 수 있을 것이요 경쟁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점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축제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절한 때 단식이 있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야할 축제인생을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단식의 관행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매주 2차례 월요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세례자 요한 제자들은 자주,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은 평소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으며,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에 의하며 예수님 사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단식했다 합니다. 오늘날은 밥을 안먹는 금식禁食보다 고기를 안먹는 금육禁肉이 더 적절하다 싶습니다. 너무 많이 고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남판단하며 죄짓는 교만보다 더 낫다는 영적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가는 온갖 불순한 것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 이미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나팔을 불지 않는’ 이웃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단식, 겸손한 단식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겸손한 단식, 겸손한 수행 자체가 보상이요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다합니다. 참 좋은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이사야 예언자가 통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체를 환히 밝힙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로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100% 공감하셨을 내용입니다.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환히 밝히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자기도취의 이기적 단식이 아니라 불쌍한 이웃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들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에 이어 이런 자발적 사랑의 실천인 참된 단식이야말로 단식의 최고봉입니다. 이런 겸손한 단식, 사랑의 단식, 참된 단식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이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빛같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런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인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단식 자체가, 침묵 자체가 답이 아니라 사랑의 잣대가 답입니다. 배곺은 자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하고, 말할 기회가 없는 홀로 있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아닌 말을 하게 해야합니다. 정작 단식해야할 이들은 많이 먹어 비만해 있는 이들이요, 침묵해야할 이들은 말 많이 하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못먹어서 병이 아니라 무절제하게 잘 많이 먹어서 병도 많습니다. 먹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살기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워해야할 것은 탐식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께 맛들여 참된 단식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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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예수님의 단식!>
오늘 복음(마태9,14-15)은 '단식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다른 사람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단식에 대한 말씀인 오늘 복음과 독서(이사58,1-9ㄴ)를 통해 '예수님의 단식', 곧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단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식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과 독서가 전하는 단식, 곧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식과는 크게 다릅니다.
오늘 독서는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6-7)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나쁜 영들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단식'이며, '단식의 본질'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는 이런 단식을 자주 하고, 그리고 많이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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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TPEwCMWs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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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예수님께서
먼저이시고
단식은
그 나중의 것입니다.
사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우는
고마운 사순의
시간입니다.
그동안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슬픔도
함께하고
사랑하기에
신랑을
빼앗긴 아픔으로
신앙인들은
단식을 합니다.
대체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단식은
사랑이며
단식은
치러야만 할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쓸데없이
커져버린
자아의
모습을
단식으로
만납니다.
우리의 삶이란
달콤하고
맛난 것만
먹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희미해질수록
뒤바뀔 때가
많아지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단식과 십자가는
성장해야 할
영혼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비우면서
깨닫게됩니다.
고마워 할 것을
고마워하며
사는 삶이
잘사는 삶입니다.
단식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관계의
사랑입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비워야
집중해야 할
우리의
주님이 보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빼앗긴 것을
다시 사랑으로
거두어들이는
십자가의 단식이길
기도드립니다.
슬픔에
응답하는 방식은
단식이며
사랑에
응답하는 방식은
십자가입니다.
단식과 십자가는
주님을 향한
가장 뜨거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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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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