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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4일(화)
* 시작 기도
(눅 18: 41-43)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주님...
여리고에서 주님은 한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분명 예수님인데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부인을 통하여 숨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는 자기부인, 자기부인 하지만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부인이 자동으로 되셨습니다.
오늘도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만 드러내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신부로 세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8:1-14
제목 : 내가 그니라.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 나의 묵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을 성도인 우리들을 위하여 간구와 소원을 올려 드렸다.
주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아버지를 사랑하시므로 아버지의 명령인 영생을 주기 위하여 구세주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 분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신 자들이 주님이 계신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본질이자 또한 아들의 영광을 그들도 함께 볼 수 있기를 원하셨다.
이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실 주님의 유언이자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셨다.
그 간절한 기도에 우리 역시 부응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사랑이기에 그 기도에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걸고 반응해야 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다락방에서의 제자들과 고별 담론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으로 들어가신다.
본문 1절에서 ‘제자들과 함께’란 말이 두 번 나오고, 2절에서도 ‘제자들과’라는 말이 나오는데 2절의 ‘제자들과’ 역시 원문에 의하면 ‘제자들과 함께’이다.
특히 이처럼 3번이나 언급되는 ‘제자들과 함께’에서 번역이 빠진 부분이 있는데 이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에서 ‘그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투’이다.
이처럼 ‘그의 제자들과 함께’라는 말이 단 두 구절 사이에 세 번씩이나 언급된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끝까지 그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실 잠시 후에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主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선포하신 주님의 약속을 현재적으로 선취하심을 보여준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다.
기드론 시내는 감람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드론 시내 저편은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드론 시내는 구약 시대에는 왕의 골짜기로 불리기도 했는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건넜기 때문이다.
(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이 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기드론 시내를 지나 광야로 들어가서 지은 시가 시편 63편이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어쩌면 가슴을 후벼 팔 정도로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도 그는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하여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들어간 광야를 일컬어 ‘성소’로 표현하는 것이다.
(시 63:1-3)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아들의 반역이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면서 그것을 아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의 인자하심 곧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기에 자신은 주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다윗 왕이 굴욕을 경험한 그 현장에서 우리 주님 또한 가룟 유다를 비롯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에게 굴욕을 당하신다.
그러나 이 굴욕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굴욕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랑하는 자들 곧 제자들과 오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을 위한 굴욕이다.
그런데 기드론 시내는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우상을 불태우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우상들이 파괴된 곳이며 악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나 대제사장 및 바리새인의 종들에게 굴욕을 당한 수치스런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이 당한 그 수치와 굴욕이 오히려 죄의 세력인 사탄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진정한 승리의 왕으로 등극하신 지극히 역설적인 의미의 장소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편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는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을 대동해서 등과 횃불 그리고 무기를 가지로 예수님께로 왔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할 일을 아시고 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그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계시하신다.
본문 4절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당할 일 곧 어떻게 되실 지를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을 체포하러 온 유다를 비롯한 일단의 무리 앞으로 나아가셔서 ‘너희가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때가 되어 십자가로 나아가셔야 할 때임을 아시기에 피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 전에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꾀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피하셨으나 이제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신다.
이는 예수님만 아니라 주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십자가 고난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뒤로 밀려가서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는 예수님의 신적 자기계시이자 아들이 계시하시는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4절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나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는 그 현장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셔서 ‘내가 그’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내가 그’라는 말은 너희들이 찾는 그가 바로 나, 나사렛 예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요 아들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다윗의 詩인 시편 56:9절의 말씀의 성취이다.
(시 56: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체포와 죽음은 실패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진정한 승리임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신적 자기계시인 ‘내가 그’는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이루시기 위한 아들의 행동하심이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이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함께 이제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소속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오신 곳,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진정한 삶이요 영생이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생명, 조에)을 얻으리라.
한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증거를 오늘 본문에서 잘 보여준다.
(8-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베드로가 의협심을 보이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한편 군대와 천부장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종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을 하고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한 자였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던 자였다.
그저 주님은 사랑이시니까 나를 사랑하는가 보다 했을 뿐, 그의 사랑을 가슴이 뜨겁도록 느껴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나를 위하여 아버지의 때에 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그 순종이 사랑이었음을 오늘 내 온 맘과 몸으로 깨닫고 경험한다.
잠을 깨우는 주님과의 교제, 말씀묵상이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인 영생이 현재로 있다.
만물 안에서는 어떠한 경우도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될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 안에서 누리는 영생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는 땅의 상황을 초월하는 하늘의 기쁨이다.
내가 가난해도, 병이 들어 아파도,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로 인하여 온 세상이 혼란해도,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하늘의 기쁨은 땅의 고통을 넉넉히 삼킨다.
(고후 5:1-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이제 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는다.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나는 나의 남은 인생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지금 베트남 하이퐁에 선교사로 서 있다.
이들의 죽어가는 영혼이 복음을 통하여 살아나 온전히 주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이 한 몸 죽는 것도 유익하다.
육신으로 한 번 죽는 것은 누구나 예외가 없다.
조금 일찍 죽고 나중에 죽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알아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잘 선용해서 이 땅에서부터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를 위하여 나 자신을 주께 드린다.
따라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원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오늘 내게도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무엇이관대 이런 은혜를 베푸셨나이까?
죽어 마땅하며 죽기에만 합당한 나, 복음도 모르고 영생의 의미도 알지 못하여 늘 헤매던 자였나이다.
이런 나에게 ‘내가 그’라 말씀하시며 창세전 언약과 함께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주기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이 나를 살렸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주님을 위하여 나의 남은 인생을 드리기 원하나이다.
나를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함께 할 수 있겠나이까?
내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오니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주의 보혈로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내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여 주시어 우리 주님의 품에 늘 거하여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의 존재양식을 새롭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