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석민]드라마로부터의 교훈
필자는 TV 드라마를 좋아한다. 광팬이라 할 정도다. 필자는 저녁모임 중 슬쩍 사라지기로 유명한데, 그 이유인즉 드라마를 제시간에 보기 위해서다. 스스로 이 약점을 잘 알기에 TV 자체를 멀리하려 하지만 눈길만 스쳐도 빠져버리니 대책이 없다. “드라마 좋아하는 게 어때서.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트렌드가 다 담겨 있다고….” 안식구의 한심스럽다는 눈길에 둘러대는 핑계인데 반드시 틀린 얘기만은 아니다.
요즘 필자가 ‘꽂혀 있는’ 드라마는 KBS 1TV의 일일극인 ‘다함께 차차차’다. 15년 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 딸아이를 키우고 시댁식구들을 건사해온 중년여성, 그녀를 사랑하는 순수하고 밝은 심성의 새 연인, 사고로 기억을 잃고 새 가정을 꾸렸다가 최근 기억을 되찾은 전남편, 그가 과거를 못 찾게 집요하게 가로막는 현재의 처, 그 애증관계가 주요 줄거리다.
이 중 관심대상은 단연 여주인공 ‘하윤정’(심혜진 분)이다. 화장보다 기름칠이 익숙한 터프한 카센터 여사장이다. 너무도 씩씩하고 오롯해 오히려 애틋한 캐릭터다. 그녀를 보면 필자 마음속에 왠지 비슷한 이미지로 각인된 한 여성 정치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다.
‘다함께 차차차’ 하윤정과 박근혜
그 연상의 고리는 삶의 시련과 성의 한계를 극복한 당당함일 것이다. 우리 시대를 종횡으로 어떻게 절단하건 그 중심에 그녀가 있다. 대통령 영애 시절부터 그녀가 헤쳐 온 삶의 파란과 시련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치판이 보통 판인가. 그 협잡, 음모, 배신의 ‘아사리판’에서 유신공주란 비아냥거림을 이겨내고 당당히 입지를 굳혔다. 노무현 정부 시절 거대 야당을 통솔하며 선거를 연거푸 이기고 자신의 당내 세력을 일구는 건 아버지의 레거시나 지역기반만으로 거저 될 일이 아니었다. 이명박(MB)정부 출범 직후의 총선에서 공천이 배제된 그녀의 장수들이 단기필마로 그녀 이름 석 자가 적힌 깃발만을 들고 나가 싸워 이기고 개선한 사건은 삼국지의 전투처럼 보는 이의 피를 끓게 했다. 이 모든 성취, 영웅적 신화의 재연을 가능하게 한 건 결국 그녀의 원칙과 신의였다.
그녀는 이제 세종시 문제로 무엇보다 어렵고 중요한 결정에 몰려 있다. 당 책임자로서 행정중심도시 안에 합의하는 악역을 떠맡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 원안에 단 한 번도 흔쾌히 동의한 바 없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그녀는 지금 이 순간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종시 원안의 졸속성, 그 근원적 한계를. 하지만 원칙과 신의는 그녀의 모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적과의 약속이었다 한들 현재까지 그녀는 자신의 말, 신뢰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입장에서 요지부동이다. 필자는 ‘이러한 박근혜 전 대표의 모습에서 우리 정치권에 참으로 희소한 빛나는 소신을 읽는다…’라고 적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다.
야합안에 대한 고수가 원칙과 신의라니. 세상에 이 말들을 그렇게 쓰는 법도 있는가. 최근 박 전 대표의 행보에서 필자에게 읽히는 건 국가와 사회의 명운보다 표 계산을 앞세우는 냉혹한 권력에의 의지, 또는 현 권력 핵심부에 대한 불신과 미움에서 비롯된 독한 몽니의 심리일 뿐이다. 차라리 후자였음 싶은 게 필자의 간절한 기대다. 이 경우 박 전 대표의 단호한 언어와는 달리, 최근 그녀가 겪고 있을 심리적 부조화 내지 자기모순의 번민이 적지 않을 것이기에 오히려 안타깝다. 미움이 한풀 꺾이면 그녀는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희망이 없다. 이때 박 전 대표는 절대로 ‘원칙’과 ‘신의’라는 말을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그 말들을 이렇게 훼손시킬 순 없다.
드라마 속 우리의 여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여곡절 끝에 새 연인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전남편의 생존을 확인하고 깊은 번민에 빠진 하윤정은 최후 순간 ‘도망치는 신부(runaway bride)’가 되어 식장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결혼식을 고수하는 게 새 연인에 대한 신의였을까. 드라마를 지켜본 시청자라면 아무도 동의 안 할 것이다. 그랬다면 둘의 관계는 하시라도 갈라질 가식적 동거로 전락했을 것이다.
세종시 해피엔딩, 실낱같은 기대
드라마의 결말은 예측불허다. 하지만 진정한 ‘원칙’과 ‘신의’를 지켜낸 여주인공은 전남편과 그의 처를 홀가분히 떠나보내고 배신감도 잠시, 자신을 더욱 깊게 신뢰하게 된 연인과 사랑의 결실을 거두리라는 게 필자의 예상이다. 점차 막장이 되어가는 세종시 드라마도 이렇듯 해피엔딩으로 마감될 수 있을까. TV 드라마 속 여주인공도 저러한데 “하물며…” 하며, 키를 쥔 박근혜 전 대표에게 다시금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보는 게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