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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외국의 학자들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양의 역사,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역사 중심에 한민족의 조상인 '환국'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이젠 DNA분석과 언어, 풍습, 등으로 모두 한민족과 연관이 있음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학자가 부정합니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서희건(徐熙乾 : 1944∼)씨가 1985년~1986년도에 [주간조선]과 [조선일보]에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한국의 옛 역사책들을 강제로 수거하여 불태우고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기사를 썼는데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日총독 "조선인은 조선사(史) 모르게 하라"
한국의 일반인들이 국사를 배운 것은 광복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3백여 년 전인 1670년 <동몽선습(童蒙先習)>이 간행되어 서당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학동들이
윤리와 함께 국조 단군과 고대사 삼국사를 배웠다.
천자문을 뗀 다음에 배운 기초 교과서였다.
조선말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며 대한제국 학부가 펴낸 최초의 교과서도 역사, 지리를 포함한
<국민소학독본>이었고 두번째 나온 것이 <조선역사(1895년)>였다.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가 서당에서의 <동몽선습>강의를 금지한 1915년까지 단군조선으로 시작되는
조선사를 배웠다.
일제가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 역사를 가르쳐 우리 국사 교육은 단절되었지만 광복후 많은 국사 교과서가
나와 국사 교육도 광복되었다.
이 때 단군도 되살아났고 삼국의 시조도 국민들이 배운 것이다.
그런데 현행 교과서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한국 고사서의 초기 기록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며 빼버린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학문적으로 분석, 비과학적인 증거를 구체적으로 논증한 한국 사학자의
논문은 별로 없다.
거의가 일본학자들이 일본고대사를 끌어 올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말살한 한국 고대사 왜곡 논문을
비판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최근 학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고려대 김정배 교수(한국사)는 '우리의 선배들 중 일부가 일제 사학을 연구 사료로 수용하여
이런 혼란이 일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대학 최재석 교수(사회학)는 '일인 학자들의 왜곡된 주장이 광복 40여년을 넘도록 우리 국사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는 것은 식민사관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비판 연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본의 식민사관은 한국을 침탈하기 이전에 준비됐다.
그 정체를 밝혀주는 자료가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편찬하여, 그들끼리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 편수사업개요>에서 드러난다.
"일·한 합방이 된 이 마당에 조선인에게 그들의 역사를 읽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옛날을 생각하게 하여
독립국 시대의 구몽(舊夢)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자고로 사적이 많으며 조선인은 예로부터 독서와 작문력이 있어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민족을 무지몽매의 영역에까지 억압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문명 세태에서 불가능하다.
그런데 고래(古來)의 사서(史書)는 현대(일제강점기)와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시대의 옛꿈에 빠지게
할 폐단이 있고 신작들은 日·淸(청나라), 日·露(러시아)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등 그 사서들이 심히 고혹케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못 읽도록 절멸하는 것은 오히려 비밀리에 이를 전파하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러한 사서들을 대신하여 공명·적확(?)한 새 사서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읽게 하는 것이
동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첩경이며 여기에 바로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새로이 하는 주된 이유와 취지가
있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 편수 취지다. 여기서 조선 사료 인멸의 증거가 드러난다.
또한 조선사편찬을 놓고 그들 내부에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보다 교활한 방법이 채택되어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쓰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일제는 한국 침탈 전부터 조선사 왜곡 편찬 계획을 가졌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침탈한 일제는 2개월도 못 된 11월 조선 전국에서 사료 강탈에 나섰다.
가장 악질적인 기구였던 조선총독부 취조국 지휘로 경찰을 앞세워
전국의 서점과 향교·서원·양반가의 서고를 뒤진다.
이들은 강탈한 한국 사료를 분류,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일제가 인멸한 서적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광복후 출간된 <제헌국회사>는
20여만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장지연의 <대한新地誌>, 이채병 <애국정신> 등과 엄청난 고서(古書)들이
이 때 수난을 당했다.
일제의 한국 사료 압수 작업은 3·1독립선언까지 계속되었다.
3·1독립선언으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부진한 <조선사>
편찬을 독려하여 1922년 "조선에서의 교육 시책의 요결"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 이상 서희건기자의 기사에서 발췌 -
위 글에도 나오듯이
일제가 <조선사 편수사업>이라는 것을 하여 <조선사>라는 책을 만든 이유는 한국의 역사를 최대한 폄하,
조작하여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 : 부모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고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한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조작된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만들며" 그리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없애고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한국의 역사를 별볼일 없는 역사인 것처럼 조작하고 한국의 조상을 별볼일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오인하게
하여 한국인들이 '차라리 일본인이 되자'고 생각하게 만들라는 거죠.
식민지의 역사를 폄하하여 식민지 사람들의 독립의지를 꺽는 짓은 일제 뿐만이 아니라 예로부터 식민통치를
하던 자들이 흔히 하던 수법이죠.
일제는 그들의 <조선사 편수사업>이라는 것이 공정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한국인 학자들도 참여시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병도(李丙燾 :1896 ~ 1989) 전 서울대교수이고 그 이병도씨는 해방 후에 한국 대학(강단)
역사학계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해방 후에도 그는 일제와 함께 한국사 폄하, 조작사업을 하던
그 내용을 크게 바꾸지 못하고 답습하여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죠.
"식민사학의 우두머리'라 불리던 그가 1986년도에 갑자기 그 이전까지의 태도와는 180도 다른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죠.
[단군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다]는 요지의 글이었죠.
이병도의 참회 - "단군(檀君)은 신화(神話) 아닌 우리 국조(國祖)" <- 관련글
이병도씨는 위 기고문에 그치지 않고 1989년도에 최태영박사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의 조작을 좀 털어낸 고대사책을 내게 됩니다.
이병도,최태영,1989년
위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책은 물론 만족스러운 내용은 아니지만 한나라가 고조선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가 아닌 만주 서부 (요하 유역)에 존재했다 하는 등 예전 일제식민사학에서
좀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이병도씨는 이 책에서 고조선 말기에 [위만]이 고조선 땅에 세웠다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한반도가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즉 대부분의 고조선 영역은 위만에게 합병당하지
않고 건재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한나라가 그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합병하여 세웠다는
한사군(漢四郡)이 역시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학의 조작을
좀 붕괴시키는 내용이죠.
그런데 2002년도에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임둔군(臨屯郡)이 요하유역에 있었다는 유
물이 다량 발견 되었죠.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고 쓰여진 봉니(封泥)가 위 지역에서 대량 발견된 것인데
봉니(封泥)는 다른 곳에 보내는 문서를 상자를 도중에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끈으로 가로세로 묶어서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인데 그 매듭을 풀면 그 진흙덩이가 깨지므로 아무나 열어보지 못하는거죠. 임둔태수(臨屯太守章)의 직인이 찍힌 봉니(封泥)가 다량 발견되면서
실제로 임둔군(臨屯郡)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요하유역이라는 사실이 유물로도 드러났다 하겠는데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 관련글
그림들 출처 : 한국상고사입문
왼쪽 그림은 일제식민사학이 조작한 [한사군]이고 오른쪽은 유물 등으로 드러난 실제 [한사군]이라
하겠습니다.
이병도씨가 일제강점기에 일제식민사학의 조작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도 수십년간 그 조작을 답습하다가
그의 인생 말년인 1980년대에 이르러 과거를 반성하고 일제의 조작을 좀 폭로하는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책까지 냈는데 문제는 한국 대학(강단) 역사학계의 주류(실세)라는 그의 후배, 제자들 중에 아직도 일제가
심어놓은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선배, 스승인 이병도씨의 '양심선언'을 '노망'이라느니 하면서
폄하하고 아직도 일제식민사학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겠죠.
이건 비난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비판입니다.
왜 '비난이 아닌 비판'이라 하냐면 만약 필자가 사학전공자였다 하더라도 아마도 해방 후에도 일제가 심어
놓은 세뇌의 덫에 안걸리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며 같은 한국인인 교수와 선배들의 주장을
대개 답습하는 또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누를 범하기 쉬웠을 것 같기도 하고 마치 '내리는 비에 옷이
젖듯이' 교묘하고 집요한 조작에 물들기 쉬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조작만이라면 극복하기 쉬웠을 것도 같지만 한국의 사학과 학생들이 고대사를 공부할 때
사마천의 사기 등 중국사서들을 '교과서'처럼 보면서 할 것인데 일명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이러한
책들은 모두 '중국 국수주의'에 입각해서 쓰여진 책들입니다.
중국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의 '정사(正史 : 국가 공인 사서)'라는 책들은 모두 그 나라의 국수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책들은 그 나라에서 정사(正史)로 취급되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무시되죠.
한국의 경우는 아주 특수한 경우라 하겠는데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기간도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한국의 '정사(正史)'라는 책들은 대개 '한국 국수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중국 국수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거죠.
예를들어 '중국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도 그러한데
어떤 사학전공자가 20살 아직 어린 나이부터 '중국 국수주의'가 심한 중국사서들을 교과서처럼 배우고
역시 '중국 국수주의'에 물든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그렇게 배우다 보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국수주의'에 물들 수밖에 없는 거겠죠.
따라서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국인 한국의 역사를 무시하게 되기 쉽겠죠.
- 물론 안그런 분들도 계시겠죠.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국수주의'에 물들어서
자신의 조국인 한국을 무시하게 된 사람이 설상가상으로
한국역사를 교묘하고 집요하게 폄하시킨 일제의 조작에도 물들다 보면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러한 '중국과 일본의 세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죠.
사람이 앞뒤로, 전후좌우로 동시에 공격받으면 피하는게 쉽지 않죠.
그래서 '비난이 아닌 비판'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을 위한 마음이 강해서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국사를 위해서 애쓰시는
한국의 많은 사학전공자분들이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진실을 바탕으로 남의 민족도 존중하는 것일 것이고
국수주의 (가짜 민족주의)는 남의 민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가져온 곳 : http://blog.daum.net/giher404/12483
"日황실문고에 수탈된 한국고대사 史書 많다"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사단법인 한배달(회장 金義徹 뉴코아백화점 회장)은 日帝에 의해 수탈된 한국 고대사
관련 역사서들이 일본 황실 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26일 지적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일본 황실문고에서 일하다 해방 직후에 귀국한 朴唱和씨(당시 56세.사망)는 당시 청주
사범학교 교사로 채용된 뒤 이 학교의 崔基哲교장(現서울대 명예교수.89세)에게 "황실문고에는 한국의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이 모두 있다고 할 만큼의 역사서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단군관련 자료였다"고 말했다.
朴씨는 "일본 황실문고에서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했다"면서 "당시
같이 근무했던 일본인으로부터 `이런 중요한 사료들은 모두 빼앗아 왔기 때문에 한국에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해방직전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심해지자 황실문고를 오하리(尾張) 공작의 집 지하로 옮기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면서 "이들 자료들은 일제 패망이후 다시 황실문고로 옮겨졌거나 오하리의 집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朴씨는 "배재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중국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중 일본관헌에 붙잡혀 황실문고에서
일하게 됐다"면서 "해방후에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한다고 수차례 당국에 호소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와관련, 사단법인 한배달은 "일제는 해방직후인 1910년 11월부터 1년2개월동안 전국에서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에 대한 1차 압수수색을 실시, 51종 20여만권을 수거했다는 기록이 총독부 관보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단군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 ▲장지연의 「大韓新地誌」
▲이채병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등이 집중적으로 수난을 당했다고 이 단체는 설명했다.
일제는 이어 5년여동안 강압적인 수색을 추가로 실시했으나 책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되자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를 통한 조선사 편찬을 핑계로 1923년부터 15년동안 4천9백50종의 책을 수탈한
사실이 「조선사편수사업개요」에 기록돼 있다고 이 단체는 밝혔다.
이 단체는 또 "「조선사편수사업개요」에는 조선사편수회의 구로 이타(黑板勝美)고문이 `수집자료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중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海東諸國記, 唐將書畵帖 등이 있는데 이들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는 내용의 회의록이 있다"면서 "이들 책이 국내에 없는 점으로 미뤄 일제가 수탈해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 명했다.
趙玉九 한배달 사무국장은 "와병중인 崔교수는 최근 유언하는 심정으로 일제의 역사서 수탈사실을 밝혔다"
면서 "다음달 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황실문고에 소장된 수탈자료의 목록 공개 또는 반환을
일본정부에 요청해달라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출처 : 연합뉴스 (1998.09.26) (서울=연합) 尹瑾寧 기자
국사교과서 새로 써야한다 : http://blog.naver.com/greatcorea10/220554318858
명도전이라 알려진 중국의 화폐는 사실 '환국전'입니다.
고조선의 역사 : http://blog.daum.net/o7482/212
지금의 역사 교과서가 위서다.
서양 학문을 빙자하여 일제가 조작해 만든 역사를 비판 없이 그대로 계승한 지금의 교과서가 위서이다.
<나의 인생을 바꾼 책 : 1985년 10월 20일자 주간조선>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점에서 만난 주간조선 서희건 문화부 차장이 쓴 글 “단군조선 이렇게 말살되었다.
” 일제시대 때 일본이 우리나라 9천년 역사 말살을 위해 우리나라 역사서 20만권을 불태웠음을 고발한
연재 기사 였다. 비분강개 하는 마음에 근 1달을 잠을 못자고 학교 공부에 전념하기 힘들어 했고 진로
문제로 고민했었다.
<일제 분서갱유 20만권>
1910년 강제 한일합방 후 일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식민통치에 가장 저해요소가 되는 “민족 정체성의
근원”인 조선 역사책 20만권을 불태운 것이다.
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 수가 2만권이라면 도서관 10개를 불태운 거와 같은 수. 책이 귀하던 시대를
감안하면 전국 역사책을 다 태운 것과 같다.
<남은 사료를 보존하라. 환단고기>
이에 1911년 대한독립군에서 한반도 밖에 남아있던 역사서 5권을 청나라 “사고전서” 식으로 한권으로
묶어서 “환단고기”란 이름으로 편찬하게 된 것이다.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이
자금을 대어 “목판”에 새겨 출판했다.
여담이지만 주간조선의 이 기사를 통해서 1911년 광복군과 독립군에서 자금을 대고 계연수 선생이 수소문을
해서 수집한 역사책 5권을 하나로 묶어 목판 인회하여 출간한 환단고기를 비롯해서 규원사화, 단기고사와
같은 역사책이 살아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 희대의 조작 환국 환인>
일제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9천년 역사를 2천년 일본역사 보다 짧은 역사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하자가 많아서 남겨놓은 삼국유사 문장에 “환국”을 붓으로 칠해서 “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삼국유사 마저 실존 역사로 적힌 부분을 신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 양심 최남선>
이 사실을 밝혀낸 분이 놀랍게도 육당 “최남선” 선생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제의 역사 왜곡에 홀로 맞서
싸우시다 비분강개하여 탈퇴하고 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역사 왜곡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역사 왜곡, 진짜 "위서"의 등장
<위서의 시작 이병도>
조선사편수회는 16년 동안 무려 100만엔에 이르는 거액의 사업비를 투자 하여 1932년 부터 1938년 까지
식민주의 사관 역사책을 편찬한다.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어로 정리된 조선의 역사서 "조선사 37권"이
그것이다.
이 때 일본 조선사 편수회에서 내 세운 조선인 사학자가 을사오적 “이완용”의 조카로 일본 교수 이마니시 류
(今西龍)의 앞잡로 한국 역사 왜곡의 선두에 섰던 “이병도” 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인 순사 처럼 앞장서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선봉장을 섰다. 그는 광복 후 서울대 교수가 되어서 현 사학계의 거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제자 김원룡, 이기백 교수가 그 뒤를 이었다.
<"환단고기"에 위서론 누명 씌운 이기백 교수>
이기백 교수는 뒤에 춘천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사람이 정통사서인 "환단고기"를 위서론이란
누명을 씌운 사람이다. 적반하장도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사학과 학생들 말이 “이기백 교수께서 환단고기 책을 3일동안 정독을 하시고 위서임을 아셨다.”는
거였다.
<3일 만에 읽었다 = 한자 원전 읽을 실력 없는 사람>
만일 이기백 교수가 “중용”을 3일 동안 정독하고 “위서”라고 말했다 해 보자. 당장 도올 김용옥 교수가
“한자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son of a dog.” 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한문 고대 경전의 문장은
1) 어디서 띄어 읽고 어디서 끊어 읽을 지,
2) 명사인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
3) 단어인지 이름인지 지명인지
4) 단어 뜻은 어느 시대 뜻으로 할 것인지
알아내는데 “몇년”이 걸린다. 문헌 속 뜻 이해하는데 십년에서 일평생 걸린다.
<원전을 직접 읽지 않은 이기백>
3일만에 읽었다면?
1) 임승국 선생의 환단고기 한글 한역본을 읽었던지
2) 삼성기 상 하 정도 까지 읽었던지 일 것이다. 직접 읽어 보면 알겠지만 단군세기부터는 방대한 역사
내용이 나오기에 진도 못나간다. 더군다나 “넘사벽 - 단군세기 서문”을 봤다면 3일설을 운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기백 교수는 “한자 원전”을 읽지 않았다는 소리다.
학문하는 자세도 안되있었다는 말이다.
1980~90년대 초, 시대 비극론
<1980년~90년대 초 당시 학풍>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1) 1980~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논문심사에 “표절”이란 단어가 없었다.
2) 일본 논문을 한글로 베껴서 제출하고 박사학위 받던 시절이다.
3) 실력이 안되면 교수님께 돈 드리면 박사학위 논문도 대필해 주던 시대다.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데 왜?>
당시 교수들이 자랑스럽게 하던 말.
"일본이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번역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번역한
것이 없어서 참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어로 번역 되 있는 것을
한글로 번역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왜 직접 한자를 읽고 한글로 번역하지 않아요?” 하고 물어보면
“일본어로 번역이 다 되어 있는데 왜 번거롭게 한자를 읽고 다시 한글로 번역해야 하는데?”
<한자 실력 없는 교수들의 고민>
1) 일본어로 역사 논문을 분석해서 자신의 가설을 세우는 것과
2) 한자로 된 원전을 직접 읽고 직접 해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사학계에서는 후자를 “원전학”이라 하여
“한학자”들이 할 일이라고 넘겨버렸다.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번역하지 않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우리나라 고서들이었다. 동의보감 마저도
재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다. 일본어에는 능통해도 정작 한자 고전을 재대로 읽어 내서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의
교수들이 없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학문적 연구가 진척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당시 한국 인문계 교수들 사이에 하던 말이 있다. “한학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나라 고서들을 한글로 번역을 하셔야 하는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현실
<왜 한자 실력이 있는 교수가 없는 것일까?>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순수 한글 쓰기를 주장하여서 한자를 학생들에게 아예 안 가르치던 시대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 들어 갈 때 한자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그 전 세대 까지는 그런 것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초,
중,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영어”만 공부 시키는 현실에서 “한자”를 잘 읽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현재 21세기 “한의대”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한의대에 시험 쳐서 들어오는 애들이 수학, 영어는 잘하는데
정작 “한자”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아직까지도 등한시 되는 고전 번역>
논문은 지도해줄 실력이 있는 지도 교수와 논문을 심사 해 줄 실력의 교수진이 없으면 논문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인가? 21세기인 지금에도 인문학계에서는 “원문 번역”을 논문으로 인정 하지 않고 “원문 번역의
오류에 대한 고찰” 과 같은 내용도 논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럽 EU가 자신들의 고전을 번역하는데 투입하는 돈이 1년에 100억 유로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의 번역 작업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요 기초인데 우리 나라는 아직도 근본과
기초를 무시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고전을 읽어 낼 수 있는 한자 실력을 가진 교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불편한 현실>
그러면 고전을 읽을 수 있는 한자 실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아니다. 고수들이 전국 팔도
지천에 깔려 있다.다만 서양학문의 정규 과정인 대학교 입시와 대학원을 거쳐 교수가 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일 뿐이다. 대학교 정규 과정을 못 거쳤지만 “향교”에서 어려서부터 천자문, 소학, 대학, 중용, 서경, 시경
읽고 자란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직접 한자 고대 원문을 읽으신 분들은 안다. 고대 중국의 역사는 동이족 역사 문화라는 것을. 경전의
원문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고증학의 나라 청나라 시대의 “사고전서”에 이미 모든 것을 다 규명을 해
놓았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이런 고대 경전과 소통, 호완이 너무나도 잘 된 다는 것도 직접 읽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고증없는 고고학을 빙자한 일본인들에 의한 상상속의 소설 역사를 역사책에 떡 하니 써 놓고 있는
강단사학자들의 역사책을 보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1) “일본어” 하는 사람이 “강단”사학자
2) 원전 읽을 수 있는 “한학자”가 “재야” 학자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신의 문제가 아닌 실력의 문제>
결국 일본어 번역본 논문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 한자 원전을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실력의 “한학자 교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 역사 교과서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위서의 틀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의 미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
<한국 역사에는 미래가 없는가?>
아니다. 있다.
결론은 세상이 변했다는 점이다.
21세기에 새로운 시대 환경에서 완전히 다른 한자 세대가 나오고 있기에 새로운 미래를 꿈 꿀수 있는 것이다.
http://www.hwandangogi.or.kr/?c=community/157/848&uid=16624
중국과 일본에 의해 조작되어지고 왜곡된 고구려의 역사만 바로 세워도 이정도입니다.
실로 아는게 없으면 알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는 알아 볼 생각은 않고...
아는바가 없으면 모른다라고 말하면 되는 학자들이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위서를 거론합니다.
일본 황실서고와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장되어 있는 '규원사화'만 연구해도 세계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조들은 실로 대단했었고 우린 그 환국(桓國)의 황손들입니다.
최상용 글 배호사랑방 카페에서
첫댓글 반갑습니다..^^
환인 하느님과 올 해가 한기 9215 년 입니다.. ^^ 서양사의 원류 쑤메르가 환인 하느님 12 제후국 중 하나 동이 쑤메르( 소머리 ) 입니다..^^ 쥬이시 유대인의 어원이 지역 실력자 동이 쑤메르가 현지 팔레스타인에 가서 원주민을 보니 반라에 짐승같이 살기에 거두어서 쥬이시( 떠돌이 강도 )라 칭하고 교화하여 문명화하니 동이 쑤메르의 길가메시 홍수신화를 동북공정처럼 훔치더니 지금은 첨부터 자기들 것( 성경 바이블 )이라 우깁니다 ..^^ 이것이 왜 평양 근교에서 희브리어가 각인된 와당이 나온 이유 입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이도여치 광명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