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1박 2일의 수련회 위에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의 생각이 충만한 자, 늘 주님의 십자가로 달려가는 자이오니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대구로 오는 길에 나눈 대화로
저희들에게 주신 후속 은혜가 풍성하였습니다.
아들 안에서 하나가 된 영생의 공동체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말씀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본문 주해)
1~3절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아가시는데, 바로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이다.
그곳은 예수께서 자주 가시던 곳이기에 가룟 유다도 잘 아는 장소이다.
지금 예수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자신을 팔아넘기고 또 사람들을 이끌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을 이미 다 아시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도 잘 아는 그곳으로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잡히시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4~9절 : 가룟 유다가 등과 횃불과 병기를 든 무리를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다.
그 무리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하신다. 그러자 ‘나사렛 예수라’고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6절, 새번역)
‘내가 그’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앞에 잡으러 온 자들이 뒤로 물러가 엎드린다. 무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 경외와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장이라고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실 수 있지만,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이루시기 위해 잡히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8~9절, 새번역)
그러시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다 보내라고 하신다.
이는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이다. 지금 잡히시면서도 그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기도하신 내용이기도 하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10~11절 : 흥분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하여 칼을 빼들고 결국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린다.
그러자 예수께서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신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눅22:36~
38)
예수님의 제자들도 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칼은 힘으로 휘두르라고 가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불법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씀(사53:12)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검을 사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닌데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예수님을 구하고자 한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11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이다.
예수님은 이 잔을 마실 것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그가 무력하거나 불운한 결과가 결코 아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예정하신 일이다.
12~14절 : 로마 군대와 천부장(사령관)과 유대 당국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안나스에게 데리고 갔다. 안나스는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안나스는 AD. 6~15년까지 대제사장직을 역임하던 자로서, 그의 대제사장직은 그의 사위인 가야바와 다섯 아들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던 자이다.(요11:49~50)
이 말을 가야바가 한 것은 예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하심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낫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다.
(나의 묵상)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기 위해 스스로 그 길을 나서신다.
유다가 이끄는 무리들이 잡으러 올 것을 아시기에 감람산으로 스스로 가셨다.
자기 사람들을 잃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이루시려고 스스로 ‘내가 그’임을 나타내심으로 제자들을 보존하신다.
흥분한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니 그것을 몸소 고쳐주신다.
예수님의 이 모든 행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가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주님과 똑같이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내 얼굴을 십자가로 향하는 자가 된다.
영생을 얻은 자 되니 십자가를 밝히 보게 된다.
1단계, 주님께서 내게 보이신 이 십자가의 길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두려웠지만 용기백배했었다.
그것은 진리에 까막눈이었던 자가 눈을 뜬 기쁨이었다.
그 기쁨이 컸기에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칭찬을 들으며 우쭐했던 것처럼....
2단계,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죄인’이라는 단어가 나 자신에 대한 표현으로 너무 가볍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여전히 죄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니, 나라는 존재는 숨 쉬는 것에도 죄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처음 기쁨과 용기가 약해지고 의기소침해져서는 몸을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다는 증거이고, 또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3단계, 죄 없으신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지만, 나는 스스로 갈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게 하셔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안팎의 죄악을 마주 대하지만, 성령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1, 2 단계를 다 극복하고 3단계만을 사는 자가 아니다. 여전히 이모저모를 되풀이하면서 살아간다. 육체를 입은 자로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미 성령께서 나를 어떻게 주도면밀하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 가신 길은 참 어렵다.
그리고 그 길에는 분명 더 깊은 4단계, 5단계......가 있을 것이니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 그 깊은 길이 어렵지만 기쁨이 회복이 되고 또한 기대가 되는 것은 언제나 함께 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찬191장)
(묵상 기도)
주님,
턱도 없는 자가 주의 길을 간다고 기뻐합니다.
철이 든 것인지, 덜 든 것인지 모르지만 저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제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주관하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저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