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0일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알라모돔에서 열렸던 멕시코와의 평가전은 5만여석 티켓이 매진됐다. 멕시코는
한국축구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잊지 못할 팀이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FIFA 공인 제 1호 경기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
- 1월 30일 한국과 멕시코의 A매치. 멕시코는 한국 축구사에 기록된 첫 A매치 상대였다.
1948년 벽두, 아직 정부 수립 전이었지만, 체육계는 올림픽 참가의 열망으로 끓어 올랐다. 미 군정청(軍政廳)과 협의해서,
참가비 마련을 위한 특별복권을 발행할 정도였다. 올림픽 위원회(IOC)와 국제축구연맹(FIFA)에도 정식으로 가입했다. 그해
3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국내 최강이던 조선전업(朝鮮電業), 인천조우(仁川朝友), 연희대학, 고려대학, 동국대학 등 5개
팀이 풀리그로 선발전을 치러 일단 45명을 선발하고,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대회에 나설 수 없었던 지방선수 일곱 명을 추가로
뽑았다.
4월 13일 이들 53명을 다시 홍(紅)·황(黃)·청(靑)·백(白) 네 팀으로 나눠 경기를 갖고 26명을
추린 뒤 홍백팀 최종 선발전을 거쳐 5월 15일 16명의 역사적인 대한민국 첫 대표팀 명단을 확정했다. 경기가 열린 곳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운동장이었다.
축구계 안팎의 불평과 불만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다. 예우(禮遇)냐
실력(實力)이냐. 그 동안 축구발전을 위해 헌신한 노장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 먼저냐 아니면 젊고 활력이 넘치는
신진기예(新進氣銳)들을 중용하는 것이 옳으냐였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38명의 우리 선수가 일본 축구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김용식(金容植)은 7년 동안 단 한 번도 탈락하지 않았고 이유형(李裕灐)과 배종호(裵宗鎬)는 37년부터 붙박이 일본
대표선수였다.
-
- 20세기의 스포츠 영웅으로 1999년 작고한 김용식씨
김용식은 36년 베를린 올림픽에도 출전, 일본이 1회전에서 스웨덴을 3대2로 물리칠 때 한 골을 넣고 한 골을 어시스트했다. (8강 이탈리아 전은 0-8패)
21세기에도 노장을 우대할 것이냐, 젊은 선수들로 팀을 리빌딩할 것이냐의 문제는 매년 겨울 모든 프로팀들이 겪는 성장통(成長痛)이다. 하물며,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다는 그것도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 나서는 길임에랴.
대
한민국 축구대표팀은 이러한 내분으로 합숙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갈등이 가라앉지 않자 체육회는 ‘건강 상 장기여행에 무리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출발 직전 박정휘(朴廷徽) 감독의 출국을 막는다.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중간 기착지 홍콩에서 홍콩 선발을
5대1로 물리친 대한민국 대표팀이 우여곡절 끝에 경기에 나선 ‘제1호 A 매치’는 1948년 8월 2일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
축구 첫 경기였다.
한국은 배종호, 김용식, 정남식의 연속 골로 중남미의 강호 멕시코를 5대3으로 물리친다.
멕시코는 이 멤버 그대로 출전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0-4패), 유고슬라비아(1-4패), 스위스(1-2패)에게
3패를 당하며 물러서기는 했지만 내용상 대둥한 경기를 펼쳤을 만큼 세계 축구계의 강자였다. 이런 팀을 신생국 한국이 ‘기술축구’로
격파하자 FIFA관계자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한국의 돌풍은 ‘거기까지’ 였다. 8월 5일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한국은 0-12로 대패했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국축구 사상 역대 최다차 패전 기록이다. 폭우가 쏟아져 끈적끈적해진 잔디밭이
발목을 잡아당겼고, 물이 먹어 무거워진 공과 축구화는 상대적으로 건장한 북유럽선수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이유라지만, 열 두 골 차 패배라니.
스웨덴은 이 대회 우승팀이다. 1회전에서 오스트리아를 3대0으로 이긴 스웨덴은
한국을 꺾고, 준결승 상대 덴마크를 4대2로 돌파하고, 8월 13일 축구의 성지(聖地)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3대1로 격파한 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한국의 사상 첫 경기는 노장들의 분전으로 ‘질 것이라던
경기’를 뒤집었고, 2호 경기는 노장들의 ‘체력문제’가 적나라하게 문제점을 드러내며 대패로 막을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누가
옳았고 누가 그렀는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결과가 아닌가. 아무튼,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런던 올림픽 직전
축구협회 임원진이 총사퇴했고, 대표팀이 서울을 출발해서 런던으로 향하던 무렵엔 현효섭(玄孝燮)이라는 축구인이 대학생이던 10명의
젊은 대표급 선수들을 꼬드겨 집단으로 월북했다. 당시 축구협회에서 활동했던 현효섭이 고대 4명 연대 4명 등 총 10명의 대학
유망주들과 북한으로 간 것이다. 축구계는 발칵 뒤짚혔다. 이들은 북으로 건너가 북한정권 수립 기념 체육대회에 남쪽 축구팀 이름으로
참가했다.
이들이 집단 월북한 이유에 대해서는 억측이 분분했다. 일부가 남로당원이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북한이 유럽의 사회주의권 국가에 원정을 시켜준다고 꼬셨다는 말도 전해진다. 하지만 가장 신빙성있는 분석은 런던올림픽 대표 선발을
둘러싼 알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올림픽 대표선수 16명 중 11명이 30대였다. 당연히 대학선수들은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설움을 당했다. 이런 불만 때문에 대규모 월북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월북 선수 10명 중 4명은 대표팀 2차후보, 2명은 1차 후보에 각각 선임됐던 것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런
던에서 돌아온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음 ‘공식경기’를 치른 시점은 그래서 1949년 1월 1일이다. 홍콩 원정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홍콩에게 5대2로 승리. 요즘도도 FIFA는 전쟁 중인 나라의 홈경기 개최권을 유보한다. 안전문제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제1호
홈경기가 1956년에야 비로소 열릴 수 있었던 사정이 여기에 있다. 그해 4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 예선 경기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3대0 승리했다. 처철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