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한국 식 동창 관계가 없다. 모두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기 때문에 동창 관계도 그렇다.
다만, 하바드 출신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끌고 땅겨주는 분위기가 있다. 사회지도자라는 의식 때문이다.
반면, 서민적인 버클리 대학 같은 경우, 그러한 것이 거의 없다. 미국 학교들이 고등학교 건 대학교건 대부분 다 그렇다. 모두가 제 힘으로 서는 풍속이다.
영국에서는 옥스포드 대학 동창생들은 식당 같은 공중석상에서 만나면 서로 가벼운 목례만 알 듯 말 듯 하고 지나친다. 영국의 엘리뜨로서,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줄까봐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외국들의 경우이고, 한국에서 동창은 공기와 세끼 다음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실리에서도 그렇고 서로 기대어 사는 정서로도 그렇다.
한국에 머므는 동안 내가 한 번 무엇을 부탁할 일이 있어서 서울시 산하 연구소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 곳 책임자의 재량에 따라 편의를 보아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좀 이야기를 듣더니 그는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당신은 내 친척도 아니고 동창도 아닌 데 왜 편의를 보아줄 이유가 있습니까?’
‘아!’ 나는 크게 후회하였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줄 알았으면 녹음을 해놓을 걸.
학술적으로 얼마나 진기한 자료일까!
어쨋던 솔직해서 좋았다.
사회가 그러하니, 동창들이 똘똘 뭉칠 수 밖에.
YS의 차남 현철 씨는 경복 출신이다. 평준화 시절 경복이지만 경복은 경복이다.
삼성은 그래서 가장 유능한 부회장 급 둘을 눈물을 뿌리며 귀양보냈다. 하나는 미국으로, 하나는 중국으로. 그 자리에 경복고 출신을 앉히기 위해서.
경복고 출신이 위에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고치려고 YS를 고발하는 서신을 장장히 써서 총리, 대법관 이하 좍 돌렸다.
그리고 이회창 씨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목하고 그를 밀었다.
YS가 후보 경선 직전까지 이회창 씨 대하여 주저하고 있을 때 나는 직접 중재에 나섰다. 새벽 세시에 결국 고집 불통의 이회창 씨가 협상에 동의하고 YS는 동이 트자 이회창 씨를 비토하지 않겠다는 발표하였다. 이회창 후보의 오른팔로서 설득에 참여했던 고흥길 의원(분당 지역)은 나에게 그 일에 관하여 크게 고마워 하였다.
현철 씨의 선배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깜짝 놀랄 젊음 정치인’이 된 이인제는 17 번 공개석 상에서 약속한 바를 어기고 뛰쳐나갔다. 현철 씨는 아직 감옥에 있는 동안, 이렇게 동창 문화의 여파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친척 혹은 동창이라는 울타리를 나가면 어겨진 약속과 어처구니 없는 배신으로 강토가 점철되어 있고, 그래서 더욱 모두는 더욱 자신들의 울타리인 친척, 동창 등으로 묶어진 울타리에 집착하게 된다.
나는 특정 정치인을 싸고돌거나 심지어 그를 위하여 일하면 안되는 글쟁이이다. 그러나 이 때 예외를 택하고 미국 이 곳 지역의 이회창 후원회 회장 직을 맡았다.
그 당시 나는 이회창 씨와는 미리 시간 약속을 안 해도 김포에 내리면 총재실을 그냥 들어갈 수 있는 처지였다. 고흥길 의원 등이 그렇게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이 곳 미국에서는 동창 문제에 걸렸다.
대선 직전, 후원회를 열었는 데, 언론인들을 포함하여 성황을 이루었지만 경기고 출신들은 대 여섯 밖에 안 왔다.
이 지역에서, 안 되도 수 십 명, 아마 백명도 될 그들 대부분이 안 온 이유는 간단했다. 회장이 경기고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야, 너희들 정말 못났다!’ 내가 아는 한 경기고 출신에게 나중에 나는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것이 한국인 정서였다. 경기 출신이 회장이면 서로 독려하여 백 명도 왔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회창 씨와 갈라섰다. 인간 관계로는 아직 친구로 여길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갈라섰다.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JP 사안이었다.
나는 나라를 생각하여 JP의 썩고 안일함을 수용하여 JP를 껴앉으라고 주장하였다.
JP에게도 동시에 보수를 지키라고 이야기 하였다.
JP는 나의 생각을 아주 좋아했다. 내 글이 도착하면 읽고 그 중 제안한 것들은 그 날로 정책 사안으로 총리실 혹은 당에 내려보냈다.
그러나 이회창 씨는 결국 아집의 화신이 되었다. 나의 강권에 못 이기어 한 번 요란한 골프 회동을 했지만, 며 칠도 못가서 다시 적대 관계로 돌아 갔다. 나는 거품을 물고 그를 비난하며, 그런 좁은 속통으로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결정적인 사안은 박근혜 의원의 정당 개혁 요구의 거부이었다.
그의 실패의 한 원인은 결국 그가 경기고 출신들에게 둘러싸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주류는 기고만장이었다.
두 번 째 낙선한 후에는 그는 나에게 전화조차 안 했다. 아마 못했을 것이다.
그도 눈물을 흘렸겠지만, 나도 눈물을 흘렸다. 그를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다.
수 년 동안 내가 느낀 것은 한국은 좋건 싫건, 동창이, 흡사 중세기 유럽의 봉건성들처럼, 제각기 일종의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다는 감이었다: ‘당신은 내 친척도 아니고 동창도 아닌 데 왜 편의를 보아줄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60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동창들을 위해 나누어 줄 권력 혹은 영향력도 별반 가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창은 그러한 공조할 꺼리가 없어진 후에도 한국인에게는 공기와 세끼 다음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동창회에 관련이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면, 제일 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결국 동기동창들임이 자각될 것이다.
봉건 시대의 특징은, 그 봉건성을 한 발짝만 나가도 화살이 날라오는 형편이고, 다른 봉건성 사이에서는 어떤 협의와 약속도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전쟁으로 돌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로 모두가 봉건성 안에 들어와, 성의 문에 빗장을 튼튼히 잠근다.
손톱 밑의 살은 연하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벌하고 튼튼한 봉건성 안은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하다. 무한연대 공동체이다.
그 것이, 좋건 싫건, 역사적 의미가 어떻건, 한국 내에서의 동창이다.
이방인으로 표류하던 내가 40년 만에 동창들과 접속을 하였다.
창신동 돌산 밑에 있던 세진이의 집에 나는 몇 번 놀러간 적이 있었다. 나보다 조숙한 세진이는 당시 나에게 인생 선생님이기도 했다.
열 댓 명이 모여 세진이의 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돌아온 버린 자식’ 포섭 차 ‘여학생’ 셋까지 참석한 자리였다.
호기에 살고 호기에 죽는 윤태가 저녁 식사값을 내었다.
그 후 ‘만년 소년’ 종수의 연락에 40회 동창 모임에까지 참석하였다.
우리는 이제 새살림을 차려야 하는 나이이다.
20대에는 자식 나아 키울 목적으로 우리는 새살림을 차렸었다.
그 자식들이 떠난 후 그 둥지는 덩그라니 비었고, 우리는 흡사 아무 계획 없이 여름방학을 맞은 중학생처럼, 마루 끝에서 작열하는 햇볕 아래 텅빈 봉당을 내려다보는 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살림을 차려야 되는 입장이다.
동창은 그러므로 다른 의미의 중요성을 띠우게 된다.
동창회를 맡고 있는, 또 앞으로 맡을 동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래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좋은 정치가들을 가진 나라에서에서는 새 공원들이 많이 생기고, 안 좋은 정치가들을 가진 나라에서는 별장들이 많이 들어선다.’
동창의 자격은 오직 한 가지이다. 1962년 졸업 식 때 같이 줄을 맞추어 서있었으면 동창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다른 조건이 없다.
그러므로, 동창회가 있고 동창 싸이트가 있다면,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 420명의 동기들을 위한 ‘공통분모적’ 봉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큰 돈을 벌어 만날 때마다 한 턱을 쓰는 동기에서부터, 벌어놓은 돈도 없이 지병에 고생하는 동기에 이르기 까지.
‘공원’이 모두를 위한 장소라면, 이 ‘공통분모적 봉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동기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봉사하게 될 동기들에게, 외람되나마 이 부탁을 드린다.
첫댓글국가의 현실과 국민들을 위한, 또한 우리 동창들을 위한 쓴소리(?)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우리들의 성장환경탓이나, 작은나라 국민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원래 우리들 인간들은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서,공통분모의 사람끼리 <공원을 만들어>마음 편하게 모이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네.
첫댓글 국가의 현실과 국민들을 위한, 또한 우리 동창들을 위한 쓴소리(?)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우리들의 성장환경탓이나, 작은나라 국민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원래 우리들 인간들은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서,공통분모의 사람끼리 <공원을 만들어>마음 편하게 모이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네.
쓴소리를 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현실이 그렇고, 우리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우리 나름대로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결론을 향한 글이었네. 물론 내 나름대로 고민하던 사안을 동창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 이제 지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