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정리
- 강 문 석 -
“이미 세균이 뇌에까지 침투해서 어렵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니 그냥 조용히 정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10여 장의 뇌 사진을 판독하고 난 신경과 과장의 주문은 단호했다. 순간 요 근래에 멀쩡하게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갔다가 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던 서너 명의 지인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러난 의료사고 원인에 치를 떨며 오열하던 유족들의 모습도 잠시 스쳤다.
‘신변을 정리하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의사의 주문에 당사자인 나보다 열 배 백배 더 놀란 사람은 아내였던 모양이다. 눈앞이 캄캄해진 급박한 상황이라 아내가 성당 마당을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는 얘기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교우들로부터 들었다. 생자필멸을 모르지 않지만 정작 그러한 상황을 맞닥뜨리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병원이 알려준 그 일주일에 무엇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는지 엄두가 나지 않아 막막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누구나 피하지 못할 죽음이 아니던가. 그러니 좀 빨리 떠나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바꾸자 세상이 달라져 보이면서 오히려 대범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나 마지막은 그렇게 떠났겠지만 죽음 앞에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평소 부부끼리도 자주 만나 식사를 했던 병원장을 믿고 그 병원을 찾은 것이지만 검사결과가 나온 뒤로는 그가 제일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당의 원로그룹을 자처하면서 형제처럼 지내던 친목단체의 총무는 그 순간에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던지 그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묵살했다는 것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병원을 찾은 날은 우리나라가 한일월드컵에서 4위에 오르던 날이었다. 그때 세상에 나온 붉은악마는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특유의 유니폼과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담은 세련된 응원 동작으로 지구촌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한 축제분위기 속에서 난 너무나도 갑작스런 사망선고를 접했던 것이다. 간밤에 출제하다 만 중간시험문제가 마음에 걸려서 두 시간의 외출을 요청해 봤지만 병원 측에선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사흘이 지난 후 스스로 보기에도 흉측하게 변한 몰골로 병원 문을 나서야 했다. 병원의 진찰결과를 통해 나는 스스로 병을 만들어 키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장을 떠나온 지 4년, 하루에도 몇 시간씩이나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있기 일쑤였고 때론 밤을 하얗게 새우는 날까지 있었다.
B대학을 찾아 한 학기 동안 소설 창작을 배우면서 파란만장한 나의 삶을 장편으로 묶겠다는 야심찬 욕심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몸의 면역력을 소진하는 생활습관에 젖어 병을 만들고 키워왔던 것이다.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날 저녁 무렵, 갑자기 오른쪽 눈썹 중앙에 여드름처럼 작은 종기가 생겼다. 그냥두면 곧 사그라질는지도 모르는 것을 까칠한 성격 탓에 그러질 못하고 손을 댔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짜낸 자리에 고약을 녹여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열에 녹은 고약이 뜨거워서 오는 통증으로 여기고 참았는데 삽시간에 그 부위가 부어올랐다. 오른쪽 눈썹에서부터 시작하여 머리 정수리까지 직사각형으로 1센티미터 정도의 두께로 물집이 생긴 것이다. 그 옆에 붙은 귀까지 부풀어 처음엔 이비인후과로 들어섰지만 곧 신경외과로 넘겨졌고 엑스레이 촬영을 마치고 그 결과가 나오는 데는 10분도 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다면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나를 아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자니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에선 뜨거운 액체가 배어나왔다. 평소 좀 더 자상하게 다가가지 못한 나의 가족들에게 남는 회한이 가장 컸다. 어찌된 일인지 연을 맺었던 이들에게 그리움도 다시 솟아났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강하게 고쳐먹어야 했다. 이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해보겠다는 아내의 강경한 의지가 서울까지 전해져 국내 최고수준의 의료진을 갖춘 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병원까지 거느린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 동서가 CEO를 맡고 있었기에 병원에서 VIP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신변정리' 같은 말은 사라지고 곧바로 감염내과로 보내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대상포진이란 병명도 알게 되었다. 대상포진의 통증은 여성들의 출산 고통에 버금간다고도 했다. 마치 특급호텔처럼 한강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18층 입원실에서의 일주간은 고통 속에서 누린 또 다른 행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아산병원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오래 입원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한 병원 사정을 그쪽에선 환자를 배려하는 것처럼 둘러서 말했다. “급한 불은 껐으니 굳이 비싼 특실에 더 오래 입원하고 있을 필요가 없겠다. 그 대신 부산대학병원에도 우리 병원 수준의 의사가 있으니 그쪽에 치료를 계속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겠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 배려해주겠다는데 누구라 마다하겠는가. 저승 가는 날까지 평생을 달고 살아야한다는 대상포진의 신경통이다.
난 그렇게 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 신경통을 달고 오게 되었지만 뾰족한 치료방법은 없었다. 그 심한 통증을 달래는 부산의 치료법은 신경다발이 지나는 통로인 목에다가 주기적으로 마취제를 주사하는 것이었다. 인체에 해로운 마취제 치료에 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차라리 그 통증을 이겨내는 자가 치료로 통증이 올 때마다 어금니를 물기로 했다. 악몽의 6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해 겨울, 우리 부부는 홋카이도여행길에 나섰다.
그 여행에서 지난여름 나에게 신병정리를 요구했던 신경외과 과장이 옮겨간 대학의 한방병원장 부부를 만났다. 병원장은 내가 그 안철 신경과장을 잘 아는가 싶어서 그를 초빙한 것은 자기들 병원으로선 실로 큰 수확이라면서 그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13년을 지내면서 두 부부는 가끔씩 만나고 있는데 지난 봄 우리가 사는 변방의 작은 신도시로 그들 부부를 초대했을 때 일이다.
만나자마자 그 부인이 입에 웃음을 물고 “우리는 이제 완전히 망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은퇴 후 준비해둔 돈으로만 한의원을 차렸으면 좋았을 것을 남들보다 더 좋은 병원을 짓기 위해 그 노후자금을 증권에 ’몰빵‘했다가 깡통을 찼단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닌데도 그들 부부는 오히려 병원을 접어서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일주일 안에 신변정리를 하라’고 주문했던 그 신경과 과장은 지극히 정상적인 수준의 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했다고 떠들어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환자들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집단을 더 신뢰하지 못하는 걸 보면 금세 알 수가 있다. 현직 의사들에게 '만약 당신 몸에 암이 달라붙으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들 대부분에게서는 '현대의학에 의한 수술은 절대로 하지 않고, 자연요법에 의존하다가 가겠다'는 답이 나왔단다. 우리 인체의 무한한 면역력에 비하면 현대의학은 생명을 구하는 데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의사들은 한결같이 무지막지 하군요 저의 부친 심근경색시술때도 시술중 돌아가실수도 있다면서보호자 서명하라고 할때 너무황당해서 서명을 못하겠다고 버틴적이있었습니다만... 이 의사도 남의 일이라고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네요
생명의 기적을 모르는 의사인지라 배운 이론이다라고 생각했겠죠. 의사들은 남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