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
타일의 의지 같았다
옷자락을 뒤에서 잡는 일은 사람의 일 같아서 눈을 깜박거렸다 당겨주는 시선이 없어 타일은
사슴의 목덜미를 오래도록 물고만 있었다 죽음을 4초에 한 번씩 털어냈고 사슴은 서서히 타일의 시간과 겹치기 시작했다
약을 먹어도 나무는 진초록이 되지 않았고 일몰은 늦춰지지 않았다 틈은 좁혀질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관이 인지하지 못하도록 실금을 냈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흘렀다 누수는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고
타일 밑에서의 일이었다
층계에는 금이 간 타일이 쌓여 있다 마치 지연에 관한 초록抄錄 같았다
사물들은 각자의 성향을 연기시키고 있었고 그건 타일의 속성과는 다른 의미였다 나는 좀 더 늙어가고 있었다
새는 걸 막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의지와는 다르게
소리가 사라진 숲
숲이라는 집합체 속엔 나방과 은폐와 트럼펫이 있었다 숲으로 한 번 빨려 들어오는 소리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숲은 트럼펫 같은 구조였고 형체가 있는 소리는 은폐하기에 좋았다
숲을 지키는 간수의 귀는 멀었고 간수는 가까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묵묵히 지켜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 미로에 갇힌 소리들을 어루만지며 어떻게 정리할까 궁리했다
숲 입구에는 노간주나무가 간수처럼 있었다 바늘 같은 잎사귀로 소리 한 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간수는 트럼펫 연주를 즐겨했고 청중은 나방과 노간주나무였다 여러 소리가 혼합된 음악에는 간수의 독백도 들어있었는데 그날의 독백은 숲에 여기저기 버려진 소리 중에 하나였다
귀를 기울이면 그가 소리를 보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소리를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단정했다
숲은 텅 빈 채로도 소란하고 울창했다
신인상
가는 길과 되돌아오는 길은 다르다
홍옥은 여름 사과가 아니라서 담장 너머는 보이는 길이 된다
계속 어둡거나 계속 아프거나
그 세계로 넘어가 본 사람이 없었다
사과나무에는 작년에 서리하다 놓고 간 팔이 걸려 있고
여전히 팔은 자랄 생각을 않는다
늦도록 불빛을 잡아놓은 흔적은 농막 곳곳에 역력했다
1년에 두어 번 출하를 했고 갈망이 강한 사과에만
자신의 이름을 찍어놓는다는데
깜깜한 봉지를 벗었을 때 불빛의 흔적은 없었다
기대하던 이름이 없어 여자는 벌떡 일어나기로 했다
손에는 구멍 뚫린 봉지가 들려있었고
사과 이야기로 시작해 다시 사과 이야기로 넘어가도 사과는 올 기미가 없었다
아오리는 아픔의 종류가 아니라서
사과는 팔에서 열리고 떨어진 사과가 풍등처럼 날아가고
친구의 신인상 트로피를 보며
아직 떨어지지 않은 아오리를 짐작한다
홍옥이 열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계속 상냥하면 되니까요
계속되는 몸살이었다 틈을 빛으로 메우기 시작했고
사과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정황
키가 큰 의자와 작은 해바라기와 해바라기 아래 앉아 있는 그와
의자를 머리 위로 들고 누워있는
해바라기를 세운다고 공간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해바라기는 덩굴성 식물이 아니지만 전화를 걸면 공간은 재생된다
크기가 전혀 다른 의자 사이로 해바라기가 걸어 들어가고
세워지는 것과 파고드는 것 사이에서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벌어진 사이는 말들로 메워지고
어떤 정황은 당황한다
햄스터는 연신 허공을 밟아대고
그는 누군가에게 파고들고 싶어 했다
그와 의자 사이에는 닫혔다 열리는 공간이 있었고
전화벨은 해바라기 사이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그를 공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방향성
개가 사람처럼 침을 뱉는 걸 보았어요 사람을 개가 끌고 가요 흔치 않은 장면이지만 서쪽을 향해 이삿짐 트럭도 사람을 끌고 가요 손 없는 날에는 고양이를 보내고 싶어요 이사하기 좋은 날이므로 어둠을 물 줄 아는 불도그는 어떤가요? 고양이 털과 고양이의 간격은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볼펜은 돌리기에 좋고 모르는 정답을 한쪽으로 유도하죠 저는 여전히 오른쪽 신발을 던져 나아갈 길을 정하고요 아버지는 외출복을 차려 입고 신문을 뒤적입니다 오늘의 운세에 따라 당신의 목적지로 끌려가겠지요 외출한 적 없는 아버지를 위해 손바닥 위에 침을 올리고 오른손을 내리쳤을 때 침은 개 방향으로 튀었고 저는 침을 뱉는 개가 되었어요 요즘 신축 아파트엔 다크 그레이톤 가구가 유행이라는데 유행은 막막하므로 그냥 어둠을 물래요 그런 어둠도 침을 뱉어 방향을 잡겠지요 일방으로 어둠을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요 도심가 으슥한 곳에 버려진 신발은 방향 잃은 고양이인가요 손 있는 날에는 내가 나를 끌고 가는 꿈을 자꾸 꿉니다.
• 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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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에서 출생. 웹진 『시인광장』 제9회 신인상을 톰해 등단.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재학 중. 사)한국문인협회 시흥지부 회원, 시향문학회 회원.
첫댓글 정수경샘, 축하드려요.
거듭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