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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잃으면 많은 걸 잃지만, 짐승의 본성을 잃으면 모든 걸 잃게 돼.”1)
SF 작가 류츠신 필생의 역작 《삼체》에 담긴 주제 의식을 응축한 대사다. 《삼체》는 아득한 성간 거리에 따른 물리적 제한과 상이한 종(species) 사이의 심대한 생물학적 이질성이 맞물릴 때 일어나는 사회적 역학에 주목한다. 광막한 우주를 가로지르기에는 광속조차 너무 더디다. 상호 이해를 위한 최소한의 시공간도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다. 여기에 개체 보존이라는 생존의 공리가 더해지면 다른 가능성이 모두 소거되고, 선택지는 오롯이 두 가지만 남는다. 우주의 암흑 속에 철저히 은신하거나, 노출됐다면 사력을 다해 섬멸전에 돌입하거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자가 선의를 가졌는지 악의를 가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따라서 최악을 피하는 선택을 한다. 악의를 가진 존재로 가정하고 진멸하는 것이다. 상대도 똑같은 판단을 한다. 은폐에도, 선제공격에도 실패한 문명은 별의 먼지로 돌아가는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삼체》의 문명들은 이 게임의 룰대로 모략과 활극의 우주 서사시를 장렬하고도 숭고하게 써 내려가며 스러진다. ‘암흑의 숲’에 숨어 짐승의 본능에 더 충실한 쪽에 승리의 여신 니케는 미소를 짓는다.
상실된 낙원의 후일담: 동산에서 암흑의 숲으로
‘숨거나 죽이거나’로 압축되는 《삼체》 세계관은 한때 하나님 나라였던 우주를 극화한 잔혹 우화로 읽어봐도 흥미롭다. ‘한때’의 하나님 나라라니, 조금 어색하다. 과거형이 된 하나님 나라는 사라진 것처럼 숨겨졌다(마 13:44). 하나님 나라만 숨은 게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숨었고(창 3:8), 하나님도 인간에게서 숨었다(사 59:2).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서로 숨었다(창 3:7). 동물마저 인간에게서 숨었다(9:2). 모습을 드러내면, 드러난 자가 죽거나 목도한 자가 죽는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으며(출 33:20), 인간 앞에 나타난 동물은 잡아먹힌다(창 9:3). 공동체에서 진실하고 연약한 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높은 확률로 이용당하거나 뒷담화 소재로 소비된다.
프로이트의 통찰에 따르면 문명은 원초적 본능의 억압에 기반한다. 그래서 억압 때문에 내재된 “문명 속의 불만”이 세계를 관류하는 기본 정조가 된다. 억압의 결과는 존재를 부재로 가장하는 은폐이다. 억압과 은폐 없이는 바로 설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다중의 페르소나 없이 자아의 날것을 보이는 순전한 존재는, 문명 속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 결국 만물이 서로 숨바꼭질하는 세상에 남은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고약한 생존의 당위뿐이다.
물질세계 전체를 포괄했던 하나님 나라(2026년 4월·425호 참고)를 상실한 후일담은 이토록 악랄하다. 만물이 비정한 생존 원리에 굴복하고(롬 8:20) 신음하게 되었다는 면에서 상실조차 하나님 나라가 지닌 ‘전체성’의 경로를 따랐다. 희망적인 것은 ‘전체성’의 특징이 회복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펼치는 구원의 능력은 인간의 영혼을 넘어 육체로, 나아가 피조물 전체에 이른다(행 3:21).
하나님 나라의 점진성이 그리는 창조와 상실의 궤적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더 세밀히 톺아보면 전체성 이면에 점진성이 있다. 점진성은 시간의 지평에서 구현되는 전체성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점진적 형성 내지 상실의 궤적을 그린다. 전체성과 점진성을 모두 고려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가져오는 구원을 온전한 두께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태초의 대폭발 이후 수억 년이 지나서야 암흑물질이 만든 중력의 골짜기를 따라 최초의 별이 타올랐다.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호모사피엔스는 우주가 탄생하고도 138억 년이 흐른 뒤 비로소 등장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억겁의 세월과 치밀한 섭리 속에서 적층되고 진화하며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왔다.
상상해보라.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 전 쿼크의 요동만으로도 영광과 찬양이 가득했던 우주를. 인간이 없던 우주 역시 보시기에 좋았다(창 1:1-25). 영겁 같은 시간 동안 아주 조금씩 우주와 생명을 진화시키며 피워내는 것이야말로 신적인 행위이다. 전능한 신이 순식간에 피조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2) 지나칠 만큼 비효율적으로 비치는 우주와 생명의 형성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 비효율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신의 창조 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이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고백3)처럼, 십자가라는 미련한 방식을 통해 신성이 계시되는 역설이 장구한 창조의 도정 속에도 녹아있다.
다음은 상실의 시대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인간 출현 이후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는 피조세계이다(1:27-28). 하나님-인간-피조세계의 연결 고리 중 어느 하나라도 ‘완전히’ 파괴되면 하나님 나라는 물질세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현현하지 않는다(요 3:3, 5). 한편 피조세계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수준을 넘어 극단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면,4) 인간은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이 부재하기 때문에 인간을 통한 신적 다스림이라는 하나님 나라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있음)와 실존(하나님 앞에 바로 섬)은 땅 위의 하나님 나라가 존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 지독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나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디자인된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질서,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 요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스위치를 끄듯이 타락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소멸하지 않았다. 전락과 상실은 점진적이었다. 그 정도는 하나님-인간-피조세계의 관계적 농밀도에 따른다. 타락 이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 사이의 충만함은 파괴되었다. 비록 농밀함이 옅어졌더라도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고 인간이 자연을 다스린다면 여전히 하나님 나라는 땅 위에 서있다. 인간은 에덴으로부터 추방됐으나 하나님을 예배했다(창 4:3). 하나님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를 선취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욕망과 수치 속에서 나신(裸身)을 숨기는 인간의 현 상태를 수용하고 용서하며 가죽옷을 입혔다(3:21). 땅도 마찬가지다. 수고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내던 땅은 이제 소출을 순순히 내주지 않고 저항한다. 그럼에도 아담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매개로 땅을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는 충만함이 상실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창조 당시의 원초적 충만과 타락한 현존 사이에 있는 간극이 곧 상실의 분량이다. 죄의 중력에 이끌리는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해상도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며 상실을 심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담의 불순종, 가인의 형제 살해, 라멕의 잔혹한 복수, 대홍수 전 온 땅의 부패, 바벨탑의 범세계적 반역이라는 지점을 이어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님 나라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저하된 해상도로 역사의 노이즈 아래에 숨어버린다. 온전한 상실로 귀결된 셈이다. 다만 이후 아브라함, 사사, 이스라엘의 성군과 선지자 등 중간중간 융기한 믿음의 인물들에 주목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상실과 회복의 진퇴 속에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묘사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회복의 가속도를 극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발생한다. 예수의 성육신이다.
신약에만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예수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아닌 회복이다. 창조 때부터 시작되고 상실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칫 예수의 명시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에 매몰되어 하나님 나라가 신약시대에 시작된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구원 또한 예수의 성육신 이후부터 이뤄졌다는 해석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는 구절을 들어 예수가 성육신하기 전에는 구원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초월성으로 인해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그리스도에 근거해 구원을 받고,5)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그리스도에 근거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효력에는 차이가 없다. 구약과 신약이 구속사에서 담당하는 역할의 경중이나 계시의 밀도 등이 다를 수는 있으나 성도들이 누린 구원의 본질은 같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도 몸소 하나님 나라(아우토 바실레이아, 눅 17:21)인 그리스도에 근거하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이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같다. ‘오실’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 나라이기에 구약의 하나님 나라도 화해와 용서 가운데 성도들에게 강력히 임재하고 규정력을 발휘했다.
물질의 회복,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 역시 예수를 통해 본격화되면서 속도가 붙었을 뿐 점진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필연적으로 만물의 회복을 일으킨다. 하나님 나라, 곧 창조질서가 임하면 창조질서에 반하는 상태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회복의 사례들인 축귀, 신유, 소생(죽은 자가 살아남)과 수반하여 제시되는(마 10:7-8, 12:28; 눅 10:9, 11:20) 이유이다.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 필연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구원의 양상은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양상과 동기화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만물을 포괄한다면 구원도 만물을 포괄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구원의 개념이 영적인 의미로만 한정되지 않았던 점과 일맥상통한다. 당시에는 악에서 해방되는 모든 것이 구원이었다.6) 질병이 치유될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쓰는 본문(마 9:21-22; 막 6:56; 행 4:9-10; 약 5:15 등)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성경 속 구원의 대상을 영혼(하나님과의 관계성)과 물질(인간의 몸을 포함한 물질세계)로 나눠보면, 구원이 전 영역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기보다 순차적 또는 부분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구원의 선후 관계도 통념에 반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영혼 다음 물질의 순서로 회복이 확장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장면들에서는 외려 생물학적 물질(인간의 몸)이 먼저 회복되는 사태도 비중 있게 보도된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물질의 회복을 연결해 제시하는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예수의 축귀7)가 곧 하나님 나라의 증시라는 본문(마 12:28; 눅 11:20)과, 제자들이 예수의 권능을 대리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8)을 선포하는 본문(10:9)이다.
위 본문들은 몸의 회복이 영혼의 회복을 반드시 수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례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한다(11:20). 뒤이어 축귀 후 주인이 없는 텅 빈 마음,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은 상태라면 다시 악한 귀신이 깃들게 된다고 경고한다(11:22-26). 축귀를 통한 몸의 회복이 영혼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위험을 경고한 것인데, 바꿔 말하면 예수는 몸의 회복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었다고 증거한 셈이다. 후속적으로 구령사업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치유 역시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구원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적 차원뿐 아니라, 영혼과 물질의 범위적 차원에서도 점진성을 띤다. 모든 범위에 동시에 임하기보다, 특정 영역에 먼저 임한 뒤 점진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취한다. 이때 어떤 영역에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우선적으로 임할지는 신학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 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 이적이 아닌 일상의 의술로 병을 고치는 경우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의식적 순종이 치료 주체의 동기라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다. 전술했듯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게 하나님 나라이다. 인간의 육체 또한 물질로 이루어진 피조세계의 일부이다. 따라서 자발적 순종으로 타자의 물질, 타자의 몸을 치유함으로써 죽음의 증상을 개선 또는 제거하는 것은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인간-피조세계의 연결 고리를 다시 잇고 강화하는 작업은 하나님 나라의 강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제도도 종말론적 회복 대상인가
이쯤에서 직관적인 사고의 확장을 시도해 봄직하다.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것처럼 사회의 병든 곳을 고치는 작업도 하나님 나라의 구원 사역일 가능성에 대한 착상 말이다. 신자의 사회변혁, 사회참여가 복음전도를 위한 수단과 연료인 양 편의적으로 채택되고 소모되는 전통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사회변혁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일 수는 없겠느냐는 문제의식이다. 몸의 치유와 사회제도의 치유 사이의 유비 관계를 하나님 나라 안에서 정초할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몸과 사회제도 사이의 차이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는 구원을 ‘창조질서로의 회복’이라 정의할 때 한 가지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창조 당시 인간의 신체와 자연 만물은 존재했지만, 현대 문명의 제도나 문화적 산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회복 대상인 ‘만물’에 현대 문명의 제도와 문화가 포함된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가능한 설명 중 하나는 창조질서가 문명 진보를 지향하며 추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거 구절은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창 1:28)이다. 인간의 수가 많아지면 복잡한 사회를 조직하는 문화와 제도가 필요하다는 시각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인구수와 고도 문명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수가 많아지더라도 소규모 가족 단위로 구성된 탈중앙화된 공동체라면, 그리고 타락 이전처럼 질병과 기근이 없는 상황이라면, 굳이 고도로 발달한 인구 집약적 도시, 국가, 문명을 건설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수많은 작은 가족공동체가 산재한 형태의 느슨한 인류 네트워크를 구상해볼 수 있겠다. 가족 단위의 삶에도 문화가 있고 합의된 규칙으로서 제도가 있겠지만, 우리가 경험해온 대규모 군집 사회를 규율하는 제도,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문명의 본질이 적대적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생존과 생식을 달성하는 데 있다면, 인간과 자연이 화목했던 태초의 창조질서에는 문명을 발달시킬 유인이 적다. 물론 유희적·탐구적 차원에서 사회와 과학을 발전시켜 고도 문명을 수립하는 방향이 설정될 수도 있다. 다만 문화 명령(1:28)만으로는 역사 발전의 방향을 논리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까지가 창세기라는 한정된 텍스트만을 기반으로 추론했을 때 이르는 결론이다. 성경의 최종장인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비전은 창조질서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9) 종말론적 환상 속에서 만국과 땅의 왕들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계 21:10, 24, 26).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자들의 영광은 타락의 요소가 제거된 멸균적 순수 상태이다(21:27). 왕정 국가는 소규모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 사회 형태가 아니다. 조야한 수렵 공동체에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발전해나가는 고대사의 일반적 경향을 참고할 때 만국과 왕들의 영광은 문명의 고도 발달 상태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문명의 총화가 결집하는 장소가 도시(성)이다. 창세기가 견지하는 도시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획기적으로 전복하는 장면이다. 창세기는 성읍과 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한 자율 권세의 대명사로 기술한다. 가인의 에녹성(창 4:17)과 바벨의 도시(11:4)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원을 따지자면, 도시 문명은 형제 살인자 가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진보하는 도시의 창세기적 절정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적 반역 모의체인 바벨탑이다. 반면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족장들의 언약 공동체는 성을 쌓지 않고 반(半)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창세기 저자에게 성과 도시는 거룩에 반대되는 짐승의 표식이었다.
하지만 종말의 때에 창세기의 도시가 새 예루살렘으로 재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장소로 변모한다. 성경이 쓰일 당시 기준으로 인간 문명의 절정인 왕정 국가들이 도시로 모여든다는 말은, 창조질서가 지향하는 바가 소박한 동산에서의 목가적 삶이 아닌, 고도화된 인간 문명의 우주적 확장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고도 문명을 지탱하는 제도와 문화, 기술 역시 종말의 때에 온전케 되어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다.
회복된 노동에서부터 해상도를 높이는 하나님 나라
이제 분명해졌다. 문명을 일군 인간의 고통 가득한 노동을 규율하는 제도·문화 역시, 종말의 때에 창조의 선한 본질을 되찾고 회복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새롭게 하는 만물에는 만국의 영광, 인류의 문명, 그리고 노동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노동 현장을 변혁하는 노동 회복 사역은 단순히 복음전도의 발사대가 아니다. 그 자체로 종말론적 의미를 풍성히 담지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시대에 펼치는 구원이다. 노동이 회복된 자리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성령을 힘입어 노동을 회복한다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해있는 것이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땅을 경작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했던 아담의 자기 파괴적 노동은 변주된 형태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땀 흘려 수고한 만큼의 임금을 뱉어내지 않는 일터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암흑의 숲이다. 휴가와 휴직, 퇴근을 죄악시하는 노동 문화는 죽기 직전까지 땀 흘려 수고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창세기의 저주를 성실과 헌신이라는 허위의식으로 분장시킨 그로테스크한 사도마조히즘적 굴레다. 따라서 이 어둡고 가증한 것들을 걷어내고 불사르는 변혁은 하나님 나라의 강림을 동반하는 축귀이자 신유이다. 동시에 장차 내려올 새 예루살렘 성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쌓아 올리는 벽돌 하나하나가 그 나라의 현존이다. 노동의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현장이야말로 종말의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침노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해상도가 극적으로 높아지는 장소이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했다(롬 5:20). 죄 된 고통이 짓누르는 일터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길, 그래서 어둠을 압도하는 은혜가 넘쳐나길 바란다.
■ 주
1) 류츠신, 허유영 옮김, 《삼체 3부: 사신의 영생》(자음과모음, 2022), 4장. 아시아 최초 휴고상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2015년)이다.
2) 창조 기사는 고대의 미숙한 과학관에 눈높이를 맞춘 적응적 계시로 보는 게 적절하다. 《아담의 역사성 논쟁》(데니스 O. 라무뤼 외, 김광남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5) ‘역사적 아담은 없다’ 참고.
3) 테르툴리아누스, 이형우 옮김, 《그리스도의 육신론》(분도출판사, 2006), 111쪽.
4) 예컨대 기후가 생명체의 생존 임계치를 넘어 폭주한다면 말이다.
5) 장 칼뱅, 원광연 옮김, 《기독교 강요-상》(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5) 제2권 10장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 참조.
6) 데이비드 J. 보쉬, 김만태 옮김, 《변화하는 선교》(CLC, 2017), 72쪽 참고.
7) 축귀를 몸의 회복으로 정의한 이유는, 귀신 들림은 영적인 원인으로 발생하지만(따라서 일반 질병과는 구분된다), 그 결과는 신체 기능의 불능, 저하이기 때문이다(실명, 무언증, 발작 등).
8)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왔음’이 ‘미래의 도래’가 아닌 ‘이미 도래했음’을 뜻한다고 논증한 내용은 비슬리 머리의 《예수와 하나님 나라》(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9), 125-131쪽 참고.
9) J. 리처드 미들턴, 이용중 옮김, 《새 하늘과 새 땅》(새물결플러스, 2015) 제3부 8장 ‘만물의 구속’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