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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8,34―9.1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 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8,34-9.1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제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컴퓨터 본체의 가격은 25만 원으로,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할 때이니 엄청나게 비싼 기계였습니다. 형과 저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께서 큰돈을 들여서 사주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비싼 기계이니 평생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Apple II’라는 당시의 컴퓨터는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간 형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컴퓨터를 샀습니다. IBM 데스크톱 컴퓨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저장 장치인 플로피 디스켓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군대 제대 후, 노트북을 구입했습니다. 메모리 1M, 하드디스크 용량 40M, 이 큰 용량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노트북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를 분명하게 체감합니다.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예전에는 최신 기기에 밝다는 소리도 듣던 저였지만 요즘에는 컴맹, 기계치 등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달리 우리의 빠른 변화를 재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늘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변화의 길로 들어서길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는 어떻게든 맞춰 살려고 하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변화는 늘 뒤로 미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발전만큼 빠르게 변할 수는 없지만,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신앙인으로의 변화를 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지금부터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예고하신 뒤에,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끝내는 진정한 목숨을 얻어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지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 뜻이라면 고통의 십자가라도 기쁘게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금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친절한 인사, 도움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헨리 나우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버리셨다.”(창세 11,8)
그동안 쌓아올린
인생의 높은 탑으로 인하여
우리가 오만해진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허물어버리신다네.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게 될 이는
욕망의 공든 탑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오해나 박해를 감당할 모험이나 투신 없이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투신하지 않고 걷는 길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입니다.
마음에 없이 걷는 길은 지루하고,
쉽게 싫증이 나고,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하지만 투신해서 걷는 길은 지루할 겨를이 없고,
싫증이 날 이유가 없고,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길을 사랑하기 때문에 걷는 겁니다.
사즉생의 마음으로 투신해서...
그래서 늘 기쁨이 가득 찬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투신해서 살지 못하는 우리는
그들을 시기질투하고 나무랄 시간에
투신해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비겁함을
먼저 성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21.금."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
나무도
여행도
버려야
가볍게
떠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길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려야
맛보게 되는
평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진정한
이정표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십자가는
부활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할
우리 삶의
실존입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만
완성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밀알 하나의
여정입니다.
죽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죽으십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이
사시는
사랑의 힘찬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를 믿고
참된
변화를 따르는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