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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4. 금요일.
서울 강동구 길동에 있는 '한국 국보문학' 사무실에서는 2018년 송년의 밤 행사가 있었다.
국보문학은 매월 월간지를 발간하며 년 2회 동인문집을 발행했으나 2019년 내년부터는 동인문집은 분기별로 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용이 다소 딱딱한 월간지보다는 '세상사는 이야기'가 많은 동인문집인 '내 마음의 숲'이 훨씬 정감이 간다. 년 2회 발간, 지령 제26호를 이어가고 있다.
구체적인 경과보고는 카페 운영진에서 보고할 것이며, 나는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한 문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쓴다.
인상 깊었던 분은 허만길 문학교수.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라는 시를 인쇄한 종이를 회원한테 나눠주었으며 직접 낭송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 운동 시초의 시'라는 부제가 달렸으며,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 보존 운동을 펼치게 된 시초가 되었다는 詩.
특히나 이 시는 '항일민족 주제 공원'으로 알려진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의 '시와 숲길 공원'에 2010년 4월에 詩碑를 세워 영구보존 중이다.
이곳은 서해안 보령호(保寧湖) 남단 지역에 있다.
'한국 국보문학' 초기의 수필 지도교수였던 '강범우 교수.
강 교수는 이북 함경남도 이원 출신, 월남한 뒤 동국대학교에서 수필 문학을 가르켰으며, '인간수필학' 수필쓰기 책을 지었으며, 만년에 은거하던 곳이 바로 위 시비가 있는 지역.
나는 '강범우 교수님을 아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잘 아신단다.
허 교수는 위 시비 뿐만 아니라 '개화예술공원 안에도 시비가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開花里)에 있는 공원이다.
모란 조형미술관, 화인음악당, 허브랜드, 조각공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조각공원에는 많은 조각상, 시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보령지방은 전국 최고의 석질(石質)인 오석(烏石) 생산지.
새까맣게 검은 오석은 돌의 결이 아주 고아서 최고의 빗돌(碑石)로 활용한다. 개화리 인근에는 성주사지가 있고, 성주산 자연휴양림 입구에도 많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보령지방은 묵향(墨香)의 고장.
전국 최고의 벼룻돌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오석과 청석(靑石)이 나오기에 예전에는 탄광지대였다는 뜻.
성주산 자연휴양림 부근에는 신라시대 최고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국보 제8호.
아쉽게도 성주사지(聖住寺址)는 임진왜란(1592 ~97년) 당시에 불탔기에 절 터만 남았다.
내 시골 집(무창포나들목 인근)에서 20분 쯤 달리면 주산면 삼곡리의 '시와 숲길 공원'과 25분 달리면 성주면 성주리 '개화예술공원'에 갈 수 있기에 '날씨가 풀리는 내년 봄에 이들 지역의 시비를 둘러보겠습다'라고 말씀드렸다.
허만길 교수는 시인, 소설가, 복합문학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항일민족 주제 공원'으로 알려진 '시와 숲길 공원'에 시비로써 오래 기억될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 시를 조금만 퍼온다.
'...
먼 이국의 땅 상하이 마당로(馬當路) 306롱(弄)
...
조그만 가게 옆 골목
한 허름한 집
집지기 백발 노파가 쓸쓸한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자리.
...'
위 시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젊은날 정치학을 공부했고, 서울 용산구 삼각지 국방부에서 30년 넘게 근무했기에 내 마음 속에는 근현대사, 일제 점령기, 최근의 정치사가 눈에 펼쳐지며 특히나 국방부 안보정책 업무를 담당했던 터라 인식을 달리한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이국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선열들의 혼을 담은 詩이기에 천추만년에 길이 남을 게다.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아국 정부가 해방 이후에 어떤 대접을 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사견을 피력하고 싶다.
예컨대 1919년 3월 만세운동도 그렇다.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유관순 누나의 시신은 없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해방촌 지역개발 과정에서 시신을 흔적없이 잃어버렸다.
유관순 누나는 1919년 3월 1일에 만세 부른 것이 아니고 4월 1일에 만세 불렀다가 일경에 체포된 뒤 고문 치사당한 서대문형무소 자리도 그렇다.
숱한 독립군, 애국열사를 구금, 교살했던 교도소(감옥소)인데도 해방 이후인 1987년 형무소를 경기도로 이전하였고, 이곳을 개발하면서 당시의 건물을 거의 파괴하다시피 했고, 일제 잔재 흔적을 조금만 남겼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 흔적일까.
충남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에 1987. 8. 15.에 개관한 '독립기념관'.
흑성산 아래에 위치한다.
독립기념관은 독립투사, 일제에 항거하다가 생명을 잃고, 숱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의 염원과 혼이 담긴 곳이다.
나는 직장 다닐 때 흑성산에서 선열들이 불렀던 '독립 운동가'를 배워 울먹이면서 노래 불렀고, 독립기념관을 방문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어...
추가 :
위 詩碑가 있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은 1919년 3·1 만세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지역.
1919년 3월 16일 주산면 주렴산에서 18인 의사가 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했다.
1919. 4. 1. 천안 아우내장터(병천 5일장) 독립만세 운동일보다 보령지역이 더 빠르다.
학생운동을 제외하면 충남에서 제일 먼저 만세를 불렀다고 하나 더 확인해야 할 터.
성광웅 시인과도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서 근무하셨어요?'라는 내 물음에
'해병대에서요'라는 대답.
해병대에서 근무한 성 대령과 국방부에서 근무한 나.
나라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맛있는 저녁밥 이야기이다.
길동 지하전철역 도로변 뒷골목에 자리잡은 음식점.
연말이라서 그럴까 자리가 무척이나 비좁았다. 원래의 건물이 아니라 도로변 빈 공터에 천막 비슷하게 가설하여 가게 터를 넓혀서 지은 음식점이라서 장소가 무척이나 비좁았다.
30여 명의 회원들은 사각 테이블에 꼭 끼다시피 밀집해서 의자에 겨우 앉았다.
양식장에서 수송한 커다란 생굴(石花)이 나왔고, 돼지족발 요리도 푸짐하게 나왔다. 아쉽게도 양념반찬은 왜그리 매운지... 불타는 입속을 달래려고 미역국물을 잔뜩 먹었더니만 뱃속만 더부룩했다.
내 옆에는 오늘 처음으로 참가한 '황학 임문석' 시인이 배석했다.
인쇄, 명함, 도장 등 개인사업을 운영한다는데 구수한 입담이 무척이나 셌다.
1968. 1. 21.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다는 북한 남파 무장공비인 김신조 사건(31명 남파, 28명 사살, 2명 도주, 1명 생포)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김신조 사건으로 군대 사병 복무기간이 36개월로 연장되었으며, 사살된 시신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적군묘지에 묻혔다.
임 시인은 월남전 한국군 파견에 관한 과거사도 들려주었다.
나는 식탁 위에 잔뜩 올려진 음식물을 보고는 배를 굶주렸던 1960년대 ~70년대 초 당시의 농촌 실정을 떠올리면서 벼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당시의 벼 수확량은 한 마지기당(200평) 쌀 두 가마 반이 살짝 넘었다.
임 문학인은 1970년대 초에는 정부가 '통일벼'를 권장해서 쌀 수확량이 무척이나 증가했는데도 밥이 펄펄하고 밥맛이 없어서 이내 중단했다고 덧붙였다.
'통일벼'가 한국 기후와 토질에 적응하지 못하자 추가로 수입한 외국볍씨인 '노풍'에 대해서는 임 시인은 알지 못했다.
1970년대에 비하여 40년 뒤인 2018년인 현재에는 식량과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변했다. 해외 식품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세상이다.
1982년 봄 대전 사는 아버지는 폐암에 걸려서 서울대학교병원 특실에서 치료받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별미인 간식거리를 사서 드리려고 동대문 시장에서 해외수입품인 바나나 1 ~2 개씩 구입했다.
하도 비싸서 많이 구입할 엄두나 나지 않았던 바나나였는데 2018년인 지금에는 엄청나게 싸다는 사례를 들었다.
1960년대 70년대보다는 2010년대인 지금이 잘 살고, 배 부르게, 맛있게 먹는 세상이라는 사실은 공감했다.
글쓰기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글 다 쓴 뒤에 제일 끝에 적는 '연월일의 마침표'에 관해서 의견을 같이 했다.
아래는 국어 어문규정 부록 문장 부호 1. 마침표에서 퍼왔다.
1. 온점(.), 고릿점(。)
(2) 아라비아 숫자만으로 연월일을 표시할 적에 쓴다.
1919. 3. 1. (1919년 3월 1일)
온통 빨간색 옷을 입은 김남혜 시인이 '나를 아세요?'라고 나한테 물었다.
'그러문요. 정열적인 색깔의 옷을 입으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늘 환하게 잘도 웃어서 모두가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끔 하는 시인이다.
오순옥 시인한테 '밤 가지고 오셨어요?라고 내가 짓굳게 물었다.
오 시인의 친정에서는 공주밤을 재배했으나 아쉽게도 지난해 부친을 여위었고, 홀로 남은 어머니가 밤나무를 가꿀 수 없어서 남한테 임대해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새까맣게 잊었다.
아버지를 잃은 오 시인의 상심이 살짝 엿보였고, 나는 엉뚱한 질문을 했기에 속으로 미안해 했다.
아버지에 대한 오순옥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의 숲' 제26호에 게재되었으며,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에서 조금만 인용한다.
'...
당신이 있던 자리가
얼마나 따뜻한 자리었음을
당신이 떠나고서야 알았습니다.
...
당신은 나의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녁 회식이 끝난 뒤 임원진에서는 '생화이에요'라면서 귀가하는 회원한테 작은 화분 하나씩 선물했다.
추운 겨울철인데도 빨간 잎사귀를 가진 포인세티아.
식물을 좋아하는 나는 생화이라기에 몇 차례나 화분 속의 식물 잎사귀를 들여다보고, 살짝 건드렸다.
내일 큰 화분에 옮겨 심어서 추운 겨울철이라도 잘 키우고 싶다.
귀가하는 지하전철 안에서 김상문 시인과 함께 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 시인은 김포 집까지 가려면 두 시간이나 걸린다니 문학에 대한 열성이 대단하다.
시, 시어의 맞춤법, 토착어(방언) 등에 관한 우리나라 표준국어사전이 아직도 정착이 덜 되었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했다.
표준국어대백과사전을 발간하는 국어연구기관, 국문학에 관한 각 대학교에서도 어문학 규범 해석에 상당한 이견과 차이가 있는 현실과 문제점에 대해서 의견을 잠깐 나눴다.
더 나아가 '남북한간 통일국어대백과사전'을 공동집필 편찬해야 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2018. 12. 15. 01 : 10.
저녁밥을 먹은 지 6시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설사를 네 차례나 했다.
저녁밥이 왜그리 맵던지..
오징어 볶음 퍼다가 먹고는 매워서 미칠 뻔했다. 매우니까 들깨가루 범벅인 미역국을 거듭 먹었다.
비빕국수가 두 그릇이 나왔는데 내가 하나를 비볐다.
한 사람에 하나씩인 줄로만 알았다.
2인당 하나인 비빕국수를 반씩 나눠서 먹어야 하는데도 앞 좌석의 회원이 안 먹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국수를 비빈 내가 잘못이지, 음식물을 남기지 않으려는 성미때문에 혼자서 다 먹었다.
비빕국수가 엄청나게 매워서 혼이 났다.
요리를 제대로 못하는 자들이 만든 음식물은 대체로 맵고, 짜고, 향료 듬뿍 뿌리고, 냄새 비리어서 내 입맛에는 아니올씨다.
음식에 욕심낸 탓일까? 뻘냄새(갯흙 썩은 냄새) 나는 생굴에 문제 있었을까? 돼지발가락/족발, 껍데기, 살코기 등에 문제가 있었을까? 배탈/설사 원인이 무엇일까?
본질은 내가 허약하고 소화능력이 적어졌다는 뜻.
소식하는 내가 이날 과식했다. 맵고 짜니까 무엇인가를 더 먹게 되었다.
귀가한 뒤 배가 부글거리더니만 기여코 배탈이 났다.
자정을 살짝 넘긴 시각에 무려 네 차례나 설사했다.
음식을 덜 맵게, 덜 짜게 하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는 것일까?
요즘 음식점의 음식물에는 나는 거부반응이다.
생굴(石花)에 관한 개인적인 견해이다.
서해안 보령지방의 무창포 갯바다에서 나오는 토종굴은 크기가 아주 자잘하기에 맛이 훨씬 난다.
인위적으로 양식재배한 큰 굴은 별로이다.
크다고 해서, 많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자기분수에 적합한 것이 가장 낫다는 이치를 또 깨우친다.
설사 4회를 하고 나니 그제서야 뱃속이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
01 : 41인 지금까지도 뱃속은 부글거리고, 입으로는 가볍게 트림한다.
2018. 12. 15. 토요일.
이런 것도 글감이 되기에 다다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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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어제 송년회 이야기를 자세히 주셨네요
극히 일부분이지요.
허만길 교수의 상해 임시정부 위치에 관한 시가 저한테는 큰 울림을 주네요.
이런 이유로 위 글도 독립 관련 내용이 위주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