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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묵상글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마음의 문을 열어 천국의 문도 여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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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의 문을 열어 천국의 문도 여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십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것이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손수 세우신 교회이니 교회에 이런 권한을 주심은 당연하지요.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교회에 이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관건은 이런 권한이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 권한을 제대로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대로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것일까요? 여는 것일까요?
이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당연히 열라고 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우리 교회가 열기보다 닫는 짓을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크게 나무라신 것이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막는 것이고 어떻게 막습니까?
얼마 전 동성 간에 결혼하는 분들을 교회가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문제로
매우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님을 강하게 비난했지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교회가 합법화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성 결혼을 성사혼으로 교회가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과 교회의 축복을 청하는 이들을
교회가 물리치지 않고 축복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선언문은 이렇게 분명히 얘기하고 있지요.
“축복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오신다면 이들에게 어떻게 하실까요?
너희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쫓아내시고,
너희는 저주나 받으라고 하실까요?
당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하시자 비난하는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의사는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며,
당신은 이들을 위해 오셨다며 그들을 나무라셨고,
흩어진 양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려고 오셨다고 하셨지요.
베드로 사도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은 것 때문에
할례받은 이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후임 교황들은 교회 열쇠 지기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든 교회가 문을 열 때
그것은 단지 교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을 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는 사람이고 여는 교회입니까?
닫는 사람이고 닫는 교회입니까?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
나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고
이웃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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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새로 백인 교사 부임했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시험 본다고 하면 가방을 세워놓고 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시험 감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 평가만 중요했고, 공동 평가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아이의 말처럼, 어려울 때는 함께 상의해서 푸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요?
공동체보다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보다 공동체의 힘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개인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주의가 더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당신께 필요 없음에도 굳이 제자단을 형성하셨습니다. 그냥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될 것 같은데,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통해 큰 힘을 받았다는 분은 더 많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아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 제자단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단의 으뜸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제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고 또 부족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성장 발전시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 고백의 모범을 세우셨고, 바오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종종 공동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자기의 죄 많음 때문에 차마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또 다른 죄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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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패배보다는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이 더 많다(엘리너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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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바오로를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습니다.”(마태 16,17).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는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곧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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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세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사제 수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충만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모두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본받고 복음 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 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라고 말 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 제자로서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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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트렌드 코리아 2024의 내용 중에 ‘스핀오프(Spin-Off)'를 읽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스핀오프는 기존의 브랜드에 새로운 콘텐츠를 끼워 넣는 겁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쥐 한 마리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디즈니는 영화, 음악, 놀이공원, 장난감, 생활용품, 식당과 같이 디즈니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디즈니 월드에서 꿈을 꾸고, 디즈니 월드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고객의 가족은 물론, 고객의 자녀들까지 대를 이어 디즈니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기존의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품종을 심는 것이 아니라, 밭 주변에 콩도 심고, 깻잎도 심고, 호박도 심는 겁니다. 저도 용문 수련장에서 있을 때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구역장, 반장들이 피정이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오면 양평 읍과 연계해서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습니다. 수련장에 오신 분들은 피정도 하고, 시장도 보니 시간도 절약되고, 따로 장을 보러가지 않아도 되니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예전에는 ‘가요톱텐이나 가요무대’가 있었습니다.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조금 단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전문화 되고 있습니다. ‘팬텀싱어, 복면가왕, 나는 가수다, 전설의 무대, 히든싱어, 슈퍼스타 K'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영화의 줄거리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무대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극중에서 사랑받았던 조연 배우를 주연 배우로 삼아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영화는 ‘스타워즈, 어벤저스’ 시리즈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브랜드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도요타는 중저가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타에서 도요타라는 브랜드를 빼고 ‘렉서스’라는 차를 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렉서스가 도요타에서 만든 차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렉서스에 만족한 사람들은 나중에 도요타에서 출시한 다른 차에도 구매력을 느꼈습니다. 렉서스에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도 비슷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제네시스는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었지만 현대 자동차의 로고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네시스를 좋아하는 고객들은 나중에 현대 자동차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네시스가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스핀오프(Spin-Off)'의 원조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가 있습니다. 그 브랜드 위에 동방 가톨릭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가 생겼습니다. 성공회가 생겼습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회가 생겼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때로는 경쟁하기도 했고,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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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주님이십니다.
사실 이런 고백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변화라는 은총을 마주합니다.
입으로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내 중심에 내 모습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도 마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보시기에 하늘나라로 향하는 변화는 더욱 아닐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내주었습니다. 아낌없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사랑 때문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주고 또 주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더 못 줘서 미안합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면 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못 준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입니다. 이 두 성인의 삶은 그 중심을 주님께 봉헌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두 분도 인간적인 잘못과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동시에 사랑한다고 고백한 순간 주님은 두 성인의 마음속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가운데 깊은 곳에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분 성인을 닮아 우리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내어드림이 우리 삶의 모습에 변화의 은총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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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거니까….
내가 나를 채찍질하는 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런 말입니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언제나 웃으면서 해야 해.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겨워지거나 싫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말합니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지겨워진 마음과 싫어진 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혼도, 직장도,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지겨워지는 마음도 싫어지는 마음도 아주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선택했다고 해서 늘 좋을 수는 없습니다.
지겨워진 것을 인정하고 싫어진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정으로부터 방법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아 주세요. 그럴 수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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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의 두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위 화답송 시편도 좋고,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화답송 후렴도 참 경쾌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교회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니 기쁨이 저절로 샘솟는 느낌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갑니다. 감사의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사람으로,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겸손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91장도 두 사도의 교회를 위한 보완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참 아름다운 보완관계의 사도요,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읽은 주석 내용 역시 두분의 관계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일치와 연속성의 위대한 상징인 교황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중앙 조직에서 분리된 교회의 일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회는 베드로의 중심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는 또 다른 핵심 역할인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역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에서 일하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관심을 소외된 사회적 관심 분야로 밀어넣고, 교회의 경계를 더욱 확장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는’(semper reformanda) 교회입니다.”
두 사도의 보완으로 비로소 가톨릭 교회는 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늘 한결같이 빛나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특징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마디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성현들이 말하는 어른도 이런 분입니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다산>
바로 안주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다산의 피나는 내적고투를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어른은 말을 할 때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행할 때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오직 의만 따를 뿐이다.”
의로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활짝 열려 있는 유연한 겸손한 이가 참으로 어른이자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똑같은 성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의 역할이 있고 바오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바오로를 닮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나 고유의 성인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보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고유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사도는 우리가 배울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극찬과 더불어 무한한 축복을 받아낸 베드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고백이요, 역시 베드로를 꿰뚫어 알아본 주님의 감격에 벅찬 감동적 고백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신앙고백의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후 주님을 곡해함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이 주님의 극찬과 축복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늘 평생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추억이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 삶을 살게 함을 봅니다.
다음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역시 사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일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도의 삶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얼마나 힘찬 고무적인 고백인지요! 참으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로 영적승리로 삶을 마감한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방심할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혼자서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교회의 도움,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베드로가, 바오로가 장엄한 순교로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음도 교회가, 주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천사의 보호아래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한결같은 기도 덕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 중심부에,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는 이 구절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배경이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내 삶의 현장에서 천하무적 일당백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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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뭐라고 하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의 누구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의 당신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나에게 그러하십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당신에게 그러하듯이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의 누구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의 나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당신에게 그러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이 나에게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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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나라의 열쇠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기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
악마는 거룩한 교회를 거슬러 재앙과 유혹과 박해를 일으키려고 언제나 몸이 달아 있는 죽음의 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라틴인 에피파니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영혼은 육체와는 무관한 두 가지 능력, 곧 지성과 의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시간과 무관하게 움직입니다.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서, 진리를 똑똑히 볼 수만 있다면! 그러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콩이나 팔처럼 여겨서 버리기가 쉬울 것입니다. 맹세하건대, 그러한 사람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도 여전히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마치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 정녕 이렇께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194)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모든 신비주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신비주의는 마침내 범신론적 만유일체론 안에서 모든 구별과 차별의 실재관을 해체시켜 버린다. 수피즘도 초기엔 수피들의 참회 , 절제 , 자발적 가난, 초탈, 인내 , 신만을 신뢰하는 철저한 경건심 등을 강조하는 종파 내의 영적 부흥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12-13세기 이후부터는 범신론적 일원론의 경향을 농밀하게 나타낸다. 정통파의 교조주의나 합리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입장을 넘어서, 이슬람교의 근본 원리 곧 ‘알라를 두려움으로 경외하고 예배하는 종교'로서의 특징을 해체시키는 위험한 경지에까지 나아간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혼의 상승 패러다임이 수피즘에도 스며들게 된다.
인간이 보다 상위의 영적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신성 그 자체 속에 몰입 흡수됨으로써 신과 인간은 통일에 이른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본래 무하마드가 체험하고 설파한 초창기 이슬람교로부터의 이탈이다
총체적으로 수피즘의 의미를 이슬람교 유일신 신앙과의 관련에서 평가할 때, 수피즘은 <꾸라> 경전의 절대성이나, 군주론적 유일신관의 이미지들이 나타내는 '속성을 지닌 절대신' 을 넘어서서, 진정한 유일신 신앙의 진수를 지켜내려는 몸부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꾸란>보다도 더 위대한 알라” , "예언자 무하마드를 통해 계시된 알라를 넘어서 계신 알라” , 신학적 논리와 교리와 언어로써 다 포착할 수 없고 언표할 수 없는 궁극적 실재가 알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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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두 사도의 용기와 열정으로 선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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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2024-06-28 ㅣNo.173750
한 인간의 평가는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난다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인격적으로 완벽한 이는 아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새 인간이 되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기쁨을 전했다. 이렇게 극적인 전환점이 두 분에게 있었다. 한 분은 성질 급하게 막무가내 무대포로 앞뒤 가릴 것 없이 덤비고는 이내 회개하였고, 또 한 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억누른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선교사로 정열을 불사르며 각종 편지를 써 보냈다.
두 분의 예수님 사랑의 변신은 대단했다. 바로 주님께서 그것을 각색했으니까. 우리에게도 이 두 분의 모습은 없는지? 천사의 도움으로 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에게는 성령의 힘이 세속적인 것에 짓눌려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의 기둥이 되셨다.
지상에서의 예수님 교회의 반석이시고 하늘나라 열쇠를 지니신 베드로, 복음을 전파하고 받아들인 이들의 공동체를 설립해 이끌면서 교육한 바오로 사도, 두 분이 남긴 많은 지침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교회의 초석이다. 특히 옥에서 죽음을 직감한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 다 달려 믿음을 지켰습니다.”는 감동 그 자체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달한 바오로처럼, 누군가가 인생 마지막에 이런 후회 없는 고백을 할 수가?
사실 베드로는 벽지 갈릴래아의 순박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바리사이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 받은 박해자였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신 순간 목숨까지 걸며 그분 모른다고 박박 우긴 이다. 비록 닭 우는 소리에 대성통곡하며 슬피 울었지만. 바오로도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임에 찬동하였고, 교회를 아예 없애려 집집마다 들어가 남여불문 끌어다 옥에 넘긴 이었다.
그 베드로 사도가 한때 ‘예수님의 배반자’였고, 또한 바오로 사도가 한때 ‘하느님의 원수’였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어쩌면 큰 위로이다. 이처럼 한편으로 그들은 나약했고 폭력적이었다. 이것들은 두 분이 우리보다 그다지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가지게 하기에. 이처럼 부족하고 나약하신 두 분을 우리 예수님은 ‘교회의 큰 두 기둥’으로 세우셨다.
이러한 두 분의 면면에서, 아마도 우리 역시 언젠가는 생의 마지막 그 순간에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될게다. 그때 우리는 두 사도처럼 후회 없이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온 인류의 구원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 이루려 하셨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교회의 두 기둥으로 세우셨다. 오늘이 그분들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비록 그들보다 못할지라도, 우리는 두 성인의 전구를 통해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열매가 되길 오늘을 보내면서 다짐하자. 두 사도가 두려움 없이 선택한 그 사랑은 순교에 이를 때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이 따랐지만, 많은 이에게 전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큰 기둥인 두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며, 그들처럼 우리도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하겠다. 오늘 그들을 본받아 주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선교사명을 용기와 열정으로 기쁘게 하기로 다짐하면서 ‘참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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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8)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대축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만난 인연이 악연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 위해 서로 다른 인격이 서로의 다름에도 서로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관계와 상생의 관계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분명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분들이며 교회의 기초를 놓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참으로 다른 분들입니다. 소위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이나 학식 그리고 성격마저도 전혀 다르신 분들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주님께서는 놀랍게 조화시키시며 당신의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주춧돌과 대들보로 활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미사 감사송은 두 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이토록 다른 분들이시지만,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두 성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첫째는 두 분 다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회심을 통해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하였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갔던 분이잖아요. 비록 예수님으로부터 부활 후 용서받으셨지만, 그 자신 스스로는 평생 그 아둔한 기억(=흑역사)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더구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베드로나 바오로에게도 그 아둔하고 아픈 기억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 전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두 사람의 회심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생애를 통해 지속적인 은총의 사건이었다는 점을 우리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처음부터 완전한 제자란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예수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가 고백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2디4,17)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신 주님 안에 우리가 꿋꿋이 머물러 있다면.....
두 번째로 두 분 모두 ‘믿음의 사람이고 믿음으로 순교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이렇게 이 두 분의 믿음을 노래합니다. “이 사도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이처럼 이 사도들은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위해 한 생을 기꺼이 바치신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숱한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영예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오로는 세 번째 칼날에 목이 잘린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두 분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믿음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순교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4,12~13)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듯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2디4,6~8)
누가 참으로 진실하고 참된 신앙인입니까? 자신의 생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회심하고 변화되어,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이 전해 받은 신앙의 지혜를 말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하면서도 그로 인한 시련이나 환난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느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훌륭히 싸우고,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진정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들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닌 사람을 우리 시대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는 필요합니다. 아멘.
* 오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함께 기도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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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같은 날 기념하는 두 성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다름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양면이며 교회의 풍요로움입니다.
단순하고 우직한 베드로는 반석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석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안정감을 줍니다.
교회의 어떤 결정이 시대의 흐름이나 세상의 요구에 따라 쉽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칫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깊이 숙고하고 논의를 한 다음에 결정하여야 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견주어 교회는 너무나 느리게 움직여서 마치 변화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향하여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아갑니다.
그 반면 바오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 전파되는 시기에 바오로는 급진적 개혁을 이루어 냅니다.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오랜 전통인 율법과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에 더 집중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벗어나 보편 종교가 됩니다.
이 두 성인의 모습은 우리 교회가 복음에 중심을 두면서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야 함을 알려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그 중심에 두면서도 세상일에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더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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