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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흉년이 닥치자 영조는 가장 강력한 금주령을 준비한다. 1756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주령이 내려진다. 왕이 먼저 모범을 보이겠다며 왕실의 종묘 제사에서마저 술을 사용하지 않자 사대부와 백성도 술에 대해 경계했다. 술을 마시다가 걸리면 사대부는 유배를 가야 했고 선비는 유생명부에서 지워지거나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중인과 서얼은 수군으로 배치되어 복무를 해야 했고 서민과 천민은 노비가 됐다.
더 나아가 연좌법까지 있어 옆집이 술을 마시다가 걸리면 같이 벌을 받아야 했다. 1762년에는 금주령을 어기면 사형시키기로 처벌내용을 강화한다. 같은 해, 영조는 술로 시작된 의심으로 세자(7월)를 죽게 했다.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로 인해 윤구연(9월)은 참수됐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금주령을 어기면 자신은 물론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되는 결과를 알게 되었고 술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금주령을 시행한다는 걸 알려도 백성이 술을 마시다 계속 걸린다는 것이다. 한문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영조는 금주령의 내용을 좀 더 많은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기존과 달리 한글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1762년에 작성된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 임금이 백성을 경계하게 하려면 직접 하는 소리 1762년)’은 영조의 이런 의도로 작성되었다. 어제경민음은 한문으로 작성하거나 한문을 번역해 작성된 기존의 다른 금주령 내용과는 달리 처음부터 한글로 쓰인 것으로 금주령에 대한 영조의 진심이 담겨있다.
내용을 잠시 보면 ‘백성이 금주령을 어겨 처벌받는 일이 자주 생기는 것은 금주령의 내용을 백성이 잘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고 이를 잘 알리지 못한 게 왕인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강조했다. 금주령을 한문본으로 내리거나 한문본을 ‘언문(諺文, 한글의 낮춤말)’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해석으로 백성이 금주령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죄를 짓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금주령을 활자로 된 언문으로 작성해서 금주령을 몰라 죄를 짓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를 담았다. 자신의 잘못을 탓하면서도 이제 모두 금주령을 알았을 테니 이제부터는 꼭 지키라는 통보였다. 또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금주령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성실히 지키라고 당부하는 내용을 담았다.
영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제경민음’에 금주령을 어겨 처형당하는 상황까지 자세히 묘사하는 글을 넣어 금주령에 대한 왕의 진심과 경고가 담긴 내용을 팔도(八道)의 백성이 읽도록 했다. 금주령을 모두가 알게 할 목적으로 시작된 영조의 한글사용 덕에 금주령을 어겼을 때 당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불이익의 내용은 백성에게 알려졌다. 가장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진 당시의 금주령은 중간에 이런 보완을 거치면서 1767년까지 10여 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