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성채를 넘어 타인에게 다가간 우영우
화제의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 우영우(박은빈 분·오른쪽)는 로펌 태산의 대표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태수미(진경 분)에게 자기 내면의 성채를 넘어 진정으로 타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ENA 제공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끝났다. 이 드라마를 둘러싼 관심의 상당 부분은 이른바 장애인의 재현 문제에 있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게 아니냐는 논란이 벌어졌다.
얼핏 보기에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을 겪는 전형적인 인물로 보인다. 외부와의 소통에 애를 먹는다. 상대방 눈을 선뜻 맞추지 못한다. 남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다.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쿠션어’를 쓸 줄 모른다. 낯선 공간을 두려워한다. 건물 회전문에 진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런 우영우는 실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전형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영우는 예외적이다. 예외적으로 귀엽고, 예외적으로 머리가 좋고, 예외적으로 좋은 동료가 많다. 우영우를 혼전 임신한 생모는 화려한 인생을 좇아 우영우를 버렸지만, 다행히 우영우에게는 헌신적인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명문대를 수석 졸업하고, 입학이 어렵다고 소문난 서울대 로스쿨에 당당히 진학한다.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거대 로펌에 정규직으로 취직한다. 수십 년간 대학생들을 관찰해 온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현실에 없다.
우영우 버금가게 머리가 비상한 학생이야 그간 적지 않게 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학생들도 경험했다. 똑똑하면서도 내향적인 그들은 법률, 금융, 제조 등등 일반 회사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대학원에 가서 이른바 순수학문을 공부했다. 회사가 미워서 대학원에 간 것이 아니다. 회사가 받아주지 않아서 대학원에 간 것도 아니다. 그들은 회사를 사랑하기에 회사에 가지 않았다. 높은 사교성을 요구하는 조직 생활에 자기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그 똑똑한 머리로 모를 리가 있나. 자기 같은 인물이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가 당황할 것을 잘 안다. 그들은 회사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대학원을 택했다. 그들이야말로 툴툴거리는 회사원보다 회사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가운데·박은빈 분)가 로펌 동료 신입 변호사들과 함께 법정에 선 장면. ENA 제공
바로 여기에 순수학문을 탐구하는 대학원의 사회적 기능이 있다. 취직과 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학원에 가보라. 그곳에는 평범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괴팍한 사람, 내향적인 사람, 비사교적인 사람, 비현실적인 사람, 은은하게 돌아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사태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진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발전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 지금 당장 수익을 올려야겠는데, 회사 전략 회의석상에서 “수익이란 무엇인가?” “회사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해대면 사장이 돌아버리지 않겠나. 그런 사장을 배려해서(?) 그들은 회사에 가지 않고 대학원에 남았다. 회사는 그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한 대학원에 감사하고, 장학금을 기부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 회사에 갔으면 당신 회사가 어떻게 되었겠나.
그들보다 훨씬 더 타인과 소통에 서툰 우영우는 일반 대학원이 아니라 로펌에 갔다. 세속의 사교성과는 담을 쌓은 우영우가 그만 회사에 가고 만 것이다. 과연 이 드라마는 전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전형적 장애인에 대한 드라마도 아니고, 전형적 로펌에 대한 드라마도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장애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갑자기 인기를 얻을 리야. 여러모로 전형성을 벗어난 이 드라마가 어떻게 해서 대중적 호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남녀 간 사랑을 다루어서? 글쎄,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이 펼쳐지긴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드라마란 말인가. 이 드라마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인 자아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자폐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같지 않다는 이야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 자폐적 성향은 반사회적인 악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향성은 오히려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귀중한 통로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얼핏 자기 세계가 확고한 내향적이고 자폐적인 동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영우는 자기가 고양이처럼 반사회적 존재라고 자학한다. 나만의 세계에 갇힌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이렇게 애인에게 이별 통고를 한다. 그러나 내향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 고양이도 개 못지않게 집사를 사랑한다. 이 깨달음으로 인해 우영우는 마침내 내면의 회전문을 통과해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드디어 마지막 회. 우영우를 버린 생모는 부유한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마침내 법조계의 거물이 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우영우의 친부가 다른 동생은 무럭무럭 자라 국민 80%의 개인정보를 탈취하는 범죄자가 된다. 커리어에 눈이 먼 생모는 법무부 장관이 되기 위해 자식의 범죄를 덮으려 든다. 정작 자식은 잘못을 깨닫고 자수하려는데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우영우는 생모를 설득한다. 생모의 눈도 못 맞추며 어눌하게 이렇게 말한다. 동생은 좋은 엄마를 갖기를 소망한다고. 그 소망이 무너졌을 때 생기는 상처는 너무 오래간다고. 비록 자기에게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지만, 배다른 동생에게라도 좋은 엄마가 되어 달라고.
세상에 널리고 널린 이른바 보통 사람들은 우영우 같은 상황에 놓이면 대개 자기중심적 태도를 보인다. 버림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분이 풀릴 때까지 세상에 저주를 퍼붓는다. 진상을 왜곡하면서까지 분풀이를 해버린다. 왜 내 기분을 몰라주는 거야! 우영우는 다르다. 엄마에 대한 분노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 자기에게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지만, 동생에게라도 좋은 엄마가 되어달라고 말할 때, 우영우는 그 누구보다도 깊은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성채를 넘어간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다가간 사람이었다. 진정 사회적인 사람이었다. 생모는 조용히 우영우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청문회장에 나아가 탐내던 법무부 장관 자리를 포기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과시적인 사교 행위가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 갱신이야말로 타자의 교감을 불러온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