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의료는 의ㆍ식ㆍ주와 이동권(교통)에 이어 국민의 5대 기본권에 포함되고 있는 추세이며, 우리 정부의 의료에 대한 기본 정책이 의료의 양적 공급에 치중하여왔기 때문에 의사가 없는 무의촌은 면단위 기준으로 없어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의료의 질적인 수준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 나라 대부분 병원의 진료 수준은 의료장비나 의사의 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선진국 수준에 뒤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환자 관계(doctor-patient relationship)와 같은 인간관계는 선진국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기계적이며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만 병원의 경영이 가능한 불합리한 의료보험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만 핑계를 돌리기에는 의사나 환자 모두에게 조금씩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최선의 진료 서비스를 유도해 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음식점에 가면 -그 곳이 정통 서양식 레스토랑일 경우에는 더 하지만- 그 곳에서 지켜야 될 기본적인 에티켓이 있듯이 병원에서도 작은 것이지만 미리 알아두면 의사와 환자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어, 의사로부터 최상의 진료 서비스를 유도해낼 수 있는 매너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10가지를 골라 예를 들어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의사의 문진(問珍)에 대해 대답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환자가 되어 병원에 가게 되면 의사로 받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이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혹은 "어디가 아프신가요?" 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환자는 '독감 때문에' 혹은 '팔에 습진이 생겨서' 등과 같은 구체적 질환명을 스스럼없이 말하는데, 의사 입장에서 이런 대답을 하는 환자를 만나면 일단 맥이 풀리기 마련입니다. 의사가 원하는 대답은 "열이 나고 목이 따가 와서 왔습니다" 라든지, "팔에 물집이 생기고 가려워서"와 같이 환자가 느끼는 구체적인 불편함에 대한 서술적인 답변입니다.
의사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사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찰은 크게 2가지 단계인 문진(history taking)과 이학적 검사(physical examination)로 나뉘는데, 이학적 검사는 다시 시진(inspection), 촉진(palpation), 타진(percussion), 청진(auscultation) 4가지 단계로 구분됩니다.
환자에 대한 의사의 첫인상은 이 중에 첫번째 단계인 문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의 질문에 대해 적절하게 대답하는 환자를 만나면 의사는 반가운 마음으로 꼼꼼한 진료나 상세한 설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환자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이나 치료를 해야 하겠지만 의사도 사람인지라,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환자에게 설명을 더 잘하게 됩니다.
문진은 환자가 왜 병원에 왔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어긋나게 되면 좋은 의사-환자의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독감', '습진'과 같은 병명을 이미 환자가 단정내리고 왔다면 굳이 의사를 찾아 진단을 받을 필요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의사의 첫번째 임무가 '진단'이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이 내린 진단에 맞게 치료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환자 자신이 내린 진단(?) 자체가 옳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기침을 할 경우 흔히 감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침의 원인은 매우 많아서 감기, 독감(인프루엔자 감염), 폐렴, 기관지염, 폐결핵, 기관지 확장증, 폐암에 이르기까기 다양합니다. 의사의 임무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그 원인을 찾아서 치료와 예방을 하는 것인데 미리 환자가 스스로 진단을 내려버리면 의사가 해야 할 일을 빼앗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환자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문진을 할 때, 두 번째 질문이 "그런 증세를 느낀 지 얼마나 되었죠?" 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황당함을 느낄 경우가 많습니다. 당황스러운 대답을 예로 들면 "오래 됐어요" "꽤 된 것 같은데요" "이사하고 나서부터 생겼어요" 등인데, 이쯤 되면 환자와 3분정도 대화하는 것조차 매우 긴 시간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질문자의 의도에 맞게 하는 것이 대화의 기본인데 그 기본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주입식 학교 교육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의 질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을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답을 듣게되면 의사는 '더 이상의 대화가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어봅니다. "몇 달 되었어요 아니면 몇 주 되었어요?" "이사는 언제 하셨지요?" 라고. 이 때쯤 눈치 빠른 환자는 3~4개월 혹은 2~3주쯤 되었다고 하지만, “일이년 정도 되었나?”라는 대답을 들으면 의사는 맥이 풀리고 맙니다. 1~2년은 상당한 오차가 있는 시간임에도 대답하는 사람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로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이런 환자와 문진을 더 진행하게 되면 말다툼이 생기기 십상이므로 의사를 문진 단계를 슬쩍 건너뛰게 되지요. 물론 이것은 의사로서는 직무태만이요, 환자는 오진의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지므로 당연히 손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병원에서 생기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숫자 감각에 무딘 탓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물어보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충분치 못하고 병원을 이용하는 데 있어 요령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혹시 다른 병을 앓거나 복용중인 약은 없어요?" 인데 거의 모든 환자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주 간단한 대답을 합니다. "없어요!"라고.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의사는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다시 '당뇨병', '결핵', '심장병', '간염' 등등 구체적인 병명을 말하면 언제 무슨 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1백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해야만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한 열악한 의료보험제도 때문에 더 이상 차근차근 물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약물복용 여부에 대해 물어보아도 "약 먹는 것 없어요"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세히 물어보면 '드링크제'나 '감기약', '건강보조식품' 등을 복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의 질문에 대해 조건반사적으로 '없다' '아니다' '모른다' 등의 부정적인 답변을 하는 환자를 보면, 옛날부터 설화(舌禍)나 필화(筆禍)를 많이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일단 '모른다' '없다'라는 말을 거의 본능적으로 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의사들이 하게 되는 일상적인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세련된 대답을 하면 그만큼 의사로부터 좋은 설명이나 진료 서비스를 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의사 : "어디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환자 : "전신에 붉은 발진이 생겨서 왔습니다."
의사 : "그런 지가 얼마나 되었죠?"
환자 :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의사 : "혹시 앓고 계신 병이나 다른 약을 복용한 적은 없어요?"
환자 : "특별한 병을 앓은 적은 없고 일주일 전쯤 몹시 피곤해서 피로회복제를 약국에서 사먹은 적이 있습니다."
피부과 외래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약발진(drug eruption)환자와 주고받을 수 있는 가상적인 대화 내용을 적어 본 것입니다. 이 정도의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면 의사 입장에서는 최고 수준의 환자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의 진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의사의 좋은 진료를 이끌어내는 방법 중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의사의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불편하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라는 질문에 "꽤 된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하지 마시고.
첫댓글 오홍......
꽤 된 것같은데요..ㅎㅎ 정말 저렇게 말하는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