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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8일(토)
* 시작 기도
(눅 22:60b-62)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님...
주님 앞에서 극악한 죄를 지은 제자가 둘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갸룟 유다입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는 닭울음소리가 날 때 주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 때 자신이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하여 밖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자기의 죄를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이들을 추켜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을 마치 아이돌과 같이 대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이들을 오히려 진짜 아이돌(idol) 곧 우상이라 칭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종 역시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을 져야지, 하는 세상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경우도 살 수 없음으로 고백합니다.
하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으로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9:17-27
제목 : 보라, 네 어머니라.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이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나의 묵상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빌라도는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파라디도미(넘김, 내어줌)하였다.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the fact)이다.
하지만 이는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자이며 또한 그런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준 것이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며
이것이 바로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은 진리(in the truth)이며 복음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까지 하나님의 크신 손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나아가 어느 것 하나 실수나 소홀함 없이 창세전 약속인 영생을 주기 위하여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님이시다.
역사적 사실은 제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머리를 갖고 이해한다고 해도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고 인정하여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토설하고 자백하는 자에게 주님의 피의 능력이 그를 보듬어 주신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능력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자들의 죄를 능히 씻을 수 있고 또한 용서할 수 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시 32:3-6)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와 같이 나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하면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진입하는 관문이 된다.
이 관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어 비록 육신은 이 땅에 있을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토록 모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리고 해골이라 불리는 골고다로 걸어가셔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강도 두 사람은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는 다름 아닌 바로 ‘나’이다.
내가 달려 죽었어야 할 십자가, 강도와 살인을 저질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이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없다.
오직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자기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 사이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두 강도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태도란 그저 인간적인 태도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이다.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비웃듯이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강도는 그 강도를 꾸짖으면서 ‘우리가 받는 형벌은 우리가 행한 것에 마땅한 것이지만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간구하자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진다.
(눅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주를 비웃는 강도와 같은 자이므로 죽기에만 합당한 자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나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내가 당한 고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이제 나도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자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한편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패를 써서 붙였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다.
그런 내용의 패를 3가지 언어 곧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이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 걸렸는지 빌라도에게 그 문구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빌라도는 그 요구를 묵살하고 말았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예수님의 겉옷을 찢어 4사람이 나누어 가졌고 그의 속옷도 나누려고 하였으나 박음질 한 옷이 아니라 통으로 짠 옷이라서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져갔다.
이는 아래의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다.”고 하시므로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관계를 정리하시면서 이제 영원의 가족관계를 다시 세워주신다.
육신의 어머니를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 ‘보라 이제는 네 어머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육신의 가족을 넘어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이 되는데 오직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세워주시고 그 생명의 가족으로서 공동체를 세워 실천한 이가 바로 주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요한 일이삼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며 요한 일서에 나오는 요한의 공동체이다.
이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참된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공급받아 먹으므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곧 영생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주님 앞에서 죄스럽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는 나에게 있어서 그저 지식과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그 말에 볼모가 되어 붙잡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는 종교생활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니 열심을 내면 낼수록 나의 의만 드러나고 예수는 나의 의에 묻혀 드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나를 어떻게 살릴 생각을 하셨는지, 어찌 이토록 오래 참으셨는지...
나 같으면 내다 버려도 벌써 수백 번은 그리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이 속물과 같은 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선함과 사랑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감히 그 사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런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주님의 심판을 통하여 주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그 공의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주어졌음을 믿으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그 나라를 살아간다.
날 위하여 십자가 위로 오르신 주님의 그 찢긴 몸과 상처 난 손과 발 옆구리 그리고 머리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이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오늘이기를 기대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그 사랑을 내가 어찌 끊을 수 있으리요?
감히 그 사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자입니다.
하오나 사망의 권세를 끊으시고 날 주님의 핏값으로 사셨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나 비록 여전히 육신인 죄의 몸, 죽을 몸을 입고 있어 지금도 죄를 먹고 마십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날 기회를 얻을 때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받아주옵소서.
내 심령이 때로는 뼈가 마르고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될지라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과 성령의 끈만은 놓지 않게 하옵소서.
그것 역시 주님께서 붙잡고 계심을 믿사오니 주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은 무궁하시나이다.
내 영혼을 주님께 드리오니 세상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소유 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왕과 제사장으로,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주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육신의 질고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또한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영생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참 복음을 깨닫고 날마다 말씀에 연합되어 영생을 사는 영적 지도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