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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0일(월)
* 시작 기도
주님...
고요한 이 아침에 말씀을 얻어먹고자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이 종의 영적 걸음을 붙잡아 주시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 손잡고 십자가를 푯대 삼아 생명의 동행과 연합이 있게 하소서.
땅에 있는 번영과 화려함이 목적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을 통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도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아는 통찰력을 주시고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 단회성에 매몰되지 않도록 나를 붙드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시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9:38-42
제목 : 예수의 시체를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38 아래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이는 성경 시편 69: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사람들이 거기에 있던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므로 예수님이 이를 받으셨다.
그러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셨다.
이는 아버지의 뜻인 영생 주시는 일을 다 마치셨다는 뜻이다.
나아가 당신의 죽으심으로, 이 땅에 있으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이들에게 영생을 주는 모든 복음의 근거를 이루셨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일이나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온 사건을 요한이 직접 보고 증언한 일이 진리였음은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응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이를 숨겼지만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빌라도에게 가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아직 한 번도 장사하지 않은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하였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리마대는 부자로 표현된다.
(마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그런데 이 일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는 장면이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향품을 100리트라 정도 가져와서 유대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을 세마포에 함께 싸서 장례를 하였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산헤드린 공회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부화뇌동하며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공회원 등 할 것 없이 모두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이미 땅에서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요 세상의 정상에 오른 백성의 정복자였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담대하게 예수님의 장사됨에 연합하였다.
이들은 물론 처음에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두려워 드러내 놓지 못하거나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연연하지 않고 성경은 심지어 ‘당돌하게’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들의 믿음을 증거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보다 앞서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던 마리아의 섬김을 칭찬했었는데 그 칭찬에 이들도 포함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 그것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심을 의미한다.
창세전 언약은 곧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자는 약속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바로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벧전 1: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창세전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기로 작정하셨으며 하나님의 때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초림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아담은 아들이 오시기 전에 범죄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 사망을 열매로 맺게 되었다.
하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 죄의 결과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곧 창세전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면서 그에게 한 가지 일을 추가시킨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는 아담에게 주셨던 복음 곧 창 3:21절에 가죽옷으로 예표되는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과 현현의 복음을 의미한다.
이 복음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경대로 장사되신 것이다.
십자가와 관련된 죽음과 장사됨은 복음의 핵심으로서 이는 결코 예수님 혼자만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 나도 그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에 연합해야 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됨에 연합되지 않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지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눅 9:23절).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으니 이제 나는 그것을 믿는 자로서 그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을 오해했던 자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는 것을 부끄럽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피상적인 복음에 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실상이 이러한데 복음을 안다고 하던 나에게 이 복음의 효력이 나타날 리가 있겠는가?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나의 옛 사람이나 자기주장의지는 펄펄 살아서 날 뛰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무덤으로 주신 심판의 자리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만 치부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생 부르짖는 기도만 하였으니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좋은 청년이요 집사였으며 목사였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예레미야 33:3절의 말씀을 무슨 주문처럼 외우면서 성도들에게도 부르짖는 기도를 할 것을 강권하였다.
금요일 심야기도회에 기도회를 인도하는데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고 미지근하면 인도하는 내가 견디지 못하여 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 기도회의 불씨를 붙이려고 얼마나 많이 부르짖었던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래 기도로 해결해야지’ 하는 마음이 앞서서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을 하며 기도하기도 했고, 예배당 강단에 이불을 들고 올라가 철야하며 기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는 결코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지만, 진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이미 우리 주님께서 ‘주의 기도, 일명 주기도문’으로 알려 주셨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어떠한 것도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거의 날마다 이 기도를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가리켜 땅의 양식, 육신의 양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도를 하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가난하지 않고 부자로 산다는 말도 조미료처럼 섞어가면서 기도할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코 땅의 양식, 육신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고 하실 때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신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이 즉 아들을 믿는 것이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영생이다.
이 영생은 신천지 교주 이만희가 주장하는 영생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영생을 영원히 죽지 않는 육신 곧 영생불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기들 안에 들어온 144,000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한다.
이 신천지인들은 이만희가 죽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자기들도 그 영생에 동참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거기에 올인한다.
무엇보다 그 영생을 얻지 못할까봐 신천지집단에서 건져내려는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과 손길도 외면하는 상황이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완전히 세뇌를 당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만희의 나이 90이 훨씬 넘었다.
그가 아무리 건강해도 몇 년 후면 그 진상이 드러날 텐데 그 때는 또 어떤 거짓말로 이를 모면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육신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이 육신은 반드시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을 때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에 있다.
그런 영생을 누리는 자가 죽어서도 완전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나아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신까지도 부활하여 거룩한 몸을 입어 완전한 영생을 누리고 있는 우리 영혼과 합하여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세상의 정상에 섰던 니고데모 그리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마리아의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된 그 모습이 너무 부럽기도 하고 또한 귀하고 아름답다.
사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심플 라이프(simple life, 아주 단순한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실 때 두 벌 옷이나 전대(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신고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셨다.
물론 당시의 상황과 지금은 다르기에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잘 보여준다.
세상의 것 곧 썩어질 것들에 치심하지 말 것과 오직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로 살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면서 주시는 물질은 또한 누리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의 목숨을 걸지 말고 날마다 십자가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서 우리 주님의 생명과 연합한 자들에게 이 복음의 효력이 나타나 날마다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음을 확증하여 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생명이 나를 강권하여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로 초청하심에 감사하다.
아버지 품에 있는 아들의 얼굴에 비추인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오늘 나의 심령 가운데도 비추인다.
동이 터오는 이 새벽 주님의 생명과 연합하여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길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세상의 정상에 서기 위하여 썩어 없어질 인생을 쌓는 삶을 살아왔나이다.
세상의 정상에 서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복음을 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지식과 관념에 그친 모래성과 같은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다하기 전에 이 복음을 알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이제 모래 위에 지은 집을 허무시는 주님의 행동하심을 나의 무덤으로 받아들이나이다.
더 이상 주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무너뜨린 모래 위의 집을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나를 날마다 깨워주소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임을 알고 받아들여 그 자리가 나에게 주신 주님의 무덤에 연합하는 자리로 거하게 하소서.
그곳에서만 새 생명이 나올 수 있사오니 내가 머무르는 광야의 무덤이 바로 새 생명으로 소생케 되는 생명의 산실임을 믿나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아들의 생명을 누리는 영생의 삶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오직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만 따르는 simple life의 은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