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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취죽황화翠竹黃花와 무정풍광無情風光
무정도 불성이 있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최초 근거는 아마도 도생법사道生法師(355~434)가 아닌가 한다. 송조宋朝 목암선경睦庵善卿스님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취죽황화翠竹黃花 편에 있다. 권미卷尾 발문에 의하면 대관大觀 2년(1108)에 출간된 듯하다. 그 중간 7백여 년 동안 단편적으로 전승되었을 뿐이고, 증거로 삼을 만한 문서는 없었던 듯하다.
1) 도생법사의 무정불성과 취죽황화翠竹黃花
조정사원: “도생법사가 말씀하시기를, ‘무정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고, 다시 주장하시기를, ‘푸릇푸릇한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니, 세상에서 믿어주는 극소수가 이르기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증명할 수도 없구나.’라고 했다. 법사가 이에 10년 동안 단정히 앉아 경이 와서 증명해주기를 기다렸다. 뒤에 담무참曇無讖삼장이 열반후분경涅槃後分經을 지니고 왔는데, 과연 이 설說이 있었다. 법사가 열람해 마치고 불자拂子가 바닥에 떨어지자, 안석案席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道生法師說 (無情亦有佛性 尸云 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 世少信者 謂無佛語所證 法師乃端坐十年 待經而證 後三藏帶涅槃後分經至 果有斯說 法師覽畢 麈尾墜地 隱几入滅)
나의 견해: 조정사원 취죽황화의 초두에 “무정도 또한 불성이 있다.”(無情亦有佛性)라는 구절은 “천제도 또한 불성이 있다.”(闡提亦有佛性)라고 수정해야 옳을 듯하다. 시尸자에는 주장하다는 뜻이 있다. 도생법사의 저술이 있다고 하지만 단행본으로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취죽황화의 직접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
불자와 관련하여 이설이 있다. “법사가 원가11년(434) 11월 경자일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라 설법을 마치고, 중인이 보는 앞에서 불자拂子가 어지럽게 바닥에 떨어지자, 법상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元嘉十一年十一月庚子 于廬山升座說法將畢 衆見麈尾紛然墜地 隱几而化) 이상 해설은 동림십팔고현전東林十八高賢傳에 의거한 것이다.
열반경은 소승부와 대승부를 합하여 15종이 있는데, 도생법사는 먼저 6권 본을 보았다. “경에 이르기를, ‘일천제를 제외하고 모두 불성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법사가 이르기를, ‘무릇 품질稟質의 이의二儀는 모두 열반의 정인이 있다. 천제도 중생의 부류인데, 어찌 홀로 불성이 없을 수 있는가? 어쩌면 경의 전래傳來가 미진할 따름이다.’라고 했다.”(經云 除一闡提 皆有佛性 師云 夫稟質二儀 皆有涅槃正因 闡提含生之類 何得獨無佛性 盖是經來未盡耳) 이에 대중의 공분을 사고 쫓겨났으며, 10년을 기다린 이후에 40권 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행품聖行品에 이르기를, ‘일천제인一闡提人이 설령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니, 이때에 스님들이 모두 탄복했다.“(聖行品云 一闡提人 雖復斷善 猶有佛性 於是諸師皆爲媿服)
2) 문수보현의 대인경계
이 무정불성론이 혜충국사(675~775)와 하택신회荷澤神會스님(684∼758)에 이르러 다시 화려하게 무대에 등장한다. 도생법사(355~434) 이후 3백여 년 동안 치열한 찬반논쟁이 있었던 듯하다. 이를 반박한 대표주자 중에 하나가 신회스님과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이고, 긍정하는 이의 선봉장이 또한 혜충국사이다. 차례로 들어보겠다.
선객이 또 물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울울창창鬱鬱蒼蒼한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하지 않고 삿된 말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확신하며 불가사의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又問 古德曰 靑靑翠竹 盡是眞如 鬱鬱黃花 無非般若 有人不許 是邪說 亦有人信 言不可思議 不知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나 소인이 믿고 받을 수 있는 경계는 아니다. 이 모두는 대승요의경大乘了義經의 뜻과 부합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여 두루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지만, 항상 여기 보리좌菩提座에 안좌安坐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 취죽은 이미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또 마하반야경에 말씀하시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심원한 말씀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염두에 두기가 어렵도다.”(師曰 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 非諸凡小而能信受 皆與大乘了義經意合 故華嚴經云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翠竹旣不出於法界 豈非法身乎 又摩訶般若經曰 色無邊故 般若無邊 黃花旣不越於色 豈非般若乎 此深遠之言 不省者難爲措意)
나의 견해: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佛身充滿於法界) “마땅히 알라. 조그만큼 허공에도 불신이 없는 곳이 없느니라.”(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취죽은 법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법신이 분명하고, 또한 취죽은 허공 안에 있으니 불신이 명백하다.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반야가 분명하다. 반야는 여래지혜如來智慧이고, 여래지혜는 여래심如來心이며, 불심은 법성이고, 법성은 국화이다. “마음 밖에 경계가 없고, 경계 밖에 마음이 없으며, 이 마음은 경계의 마음이고, 경계도 마음의 경계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융합하면, 어찌 반야가 아니랴. 이 때문에 이르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다.’라고 하며, 이 때문에 알지니, 색을 여의면 마음이 없고, 마음을 여의면 색이 없다.”(以無心外境 亦無境外心 以心是境心 境是心境故 如是融鎔 豈非般若乎 所以云色無邊故 般若無邊 故知離色無心 離心無色) 종경록 84권에서 인용했다. 이를 의거하면, 색이 마음이고, 또한 국화가 반야이다.
3) 삼승 권설로 일승 실설을 힐난하다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선종을 말할 때 달마대사를 초조로 삼고,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 6조 혜능대사로 끝마친다. 그런데 이 초조부터 6조라는 명칭이 신회선사 제7조를 시원始原한다. 초조를 먼저 세우고, 차례로 제2조 제3조를 세운 것이 아니며, 최초로 제7조를 세운 다음에 거슬러 제6조부터 초조를 세운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신회스님의 법손인 종밀스님의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에 의하면, “정원貞元 12년(796) 칙령으로 황태자에게 모든 선사를 회집會集하여 선문의 종지를 해정楷定하게 하고, 마침내 신회선사神會禪師를 제7조第七祖로 내세웠다. 신룡사神龍寺 경내에 칙령으로 안치한 비기碑記가 현존하고, 또 덕종이 친히 칠조찬문七祖讚文을 지었는바, 현재 세간에 유행한다.”(貞元十二年 敕皇太子集諸禪師 楷定禪門宗旨 遂立神會禪師爲第七祖 內神龍寺 敕置碑記見在 又御製七祖讚文 見行於世)라는 명문明文이 있다. 해정楷定은 시비를 결정하고 후세에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다.(楷定則意謂決定是非 以爲後世楷模之義)
지금은 개명시대開明時代이다. 새벽녘에 동트고 햇빛이 비치면 만상이 밝게 드러난다. 하나도 감출 곳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조단경은 신회스님을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폄하한다. 이도 또한 적반하장이다. 선종의 기반을 조정과 재야에 확고하게 다진 선사가 첫째 신수국사이고, 둘째 신회대사이며, 셋째 혜충국사이기 때문이다. 정사正邪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가 있는 학자라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하택신회선사어록荷澤神會禪師語錄에 있는 글을 인용하겠다. 우두산牛頭山 원선사袁禪師가 질문하고 신회스님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우두산 원선사가 질문했다. “불성이 일체 처소에 두루 미칩니까?”(牛頭山袁禪師問 佛性遍一切處否)
신회스님이 대답했다. “불성은 일체 유정에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습니다.”(答曰 佛性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나의 견해: “불성은 유정에 두루 미치고,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 신회스님의 이 견해는 어떠한가?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니, 일체 초목은 성도成道하거나 법륜法輪 등을 굴릴 수 없다.”(有情有佛性 無情無佛性 一切草木不能成道轉法輪等) 이를 화신불化身佛의 권교權教라 한다. 만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면,”(佛身充滿於法界) 어찌 불성인들 법계에 충만하지 않으랴. 또한 어찌 법계에 유정만 있고, 무정은 없으랴. 유정과 무정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으니, 또한 불성은 유정에도 무정에도 두루 미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조그만큼 허공에도 불신이 없는 곳이 없느니라.”(當知無有少許處空無佛身) 불성도 또한 그러하다.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은 제불경계이니, 성문이나 연각은 알 바가 아니니라.”(善男子 衆生佛性諸佛境界 非是聲聞緣覺所知) 제불의 경계는 일체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선배 대덕스님들이 모두 이야기하기를,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는데, 지금 선사는 어떤 연고로 ‘불성은 단지 일체 유정에만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까?”(問曰 先輩大德皆言道 青青翠竹盡是法 鬱鬱黃花無非般若 今禪師何故言道 佛性獨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나의 견해: 신회스님이 취죽법신 황화반야의 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바로 불성은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삼승 권설이다. 삼승 권설로 어찌 일승 실설을 힐난할 수 있으랴. 어불성설이고, 언어도단이다. 이 언어도단은 세간의 통설을 빌린 것이다.
“어찌 푸릇푸릇한 취죽이 공덕법신功德法身과 동일하며, 어찌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가 반야의 지덕智德과 동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청죽青竹과 국화가 법신이나 반야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는 곧 외도의 설입니다. 여래가 어느 경에서 청죽과 국화가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았다고 설했습니까? 열반경에 구체적으로 명문이 있는 바,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答曰 豈將青青翠竹同於功德法身 豈將鬱鬱黃花等般若之智 若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如來於何經中 說與青竹黃花授菩提記 若是將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此即外道說也 何以故 涅槃經云 具有明文 無佛性者 所渭無情物是也)
나의 견해: 무정의 수기 여부는 위에서 혜충국사가 천명했다. 이에 해설을 생략한다. 공덕법신功德法身은 다섯 가지 불신佛身 중에 하나로, 만행의 공덕으로 성취한 불신이니, 보신이다. 일체 제법을 관찰하는 제불의 지혜를 지덕智德이라 한다. 취죽은 진여이고 국화는 반야이다. 신회스님은 이 견해를 반박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취죽과 국화는 무정물이고, 열반경에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는 법문을 근거로 내세운다.
신회스님이 열반경에서 인용한,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라는 말의 출처는 어디인가? 대반열반경 37권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이르기를, “불성이 아닌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 무정물이며, 이와 같은 등 무정물을 여의면 이를 불성이라 일컫는다.”(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라고 한다. 신회스님은 열반경을 인용하되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인용했다. “불성이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非佛性者 所渭無情物)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 양자의 의지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무정물은 불성이 아니라고 하면 그 이웃사촌은 될 개연성蓋然性은 있다. 그러나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고 단정하면 다시는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다. 열반경 경문은 위에서 설명했다.
신회스님은 6조 혜능대사의 전법제자 중에 일인一人이고, 혜충국사와 함께 조정과 재야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렇지만 “불성은 일체 유정에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佛性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라는 견해는 삼승 권설을 벗어날 수 없고, 이는 또한 혜능대사의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라는 종지를 충실하게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4)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여, 면면무절기綿綿無絶期로다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은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생몰연대는 알지 못한다. 마조도일선사어록馬祖道一禪師語錄에 초참문답初參問答이 있다. 아래와 같다.
대주스님이 처음 마조스님을 참방參訪하자, 마조스님이 물으셨다.(大珠初參祖 祖問曰)
“어디서 왔는가?”(從何處來)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曰越州大雲寺來)
“여기에 와서 어떤 일을 구하려 하는가?”(祖曰 來此 擬須何事)
“불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曰來求佛法)
“자기 집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려두고 사방으로 치달리니, 무슨 짓을 하는가? 나의 이곳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한단 말인가?”(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 作什麼 我這裏一物也無 求甚麼佛法)
대주스님은 드디어 절하고 물었다.(珠遂禮拜問曰)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 보물창고입니까?”(阿那個 是慧海自家寶藏)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니라. 그대의 보물창고는 일체를 구족하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운용運用이 자재하거늘,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祖曰 即今問我者是 汝寶藏一切具足 更無欠少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대주스님은 언하言下에 친히 본심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알았다. 환희용약하며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珠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踴躍禮謝)
6년 동안 사사師事한 다음 월주로 돌아가서 친히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 1권을 찬술했다. 마조스님이 이 책을 보고 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師事六載後歸 自撰頓悟入道要門論一卷 祖見之 告衆云)
“월주에 대주大珠가 원명圓明하고, 광명을 놓아 자재하며, 가려져 막힌 곳이 없구나.”(越州有大珠圓明 光透自在 無遮障處也)
나의 견해: 나개那個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말한다. 옥나개阿那個의 옥阿은 조사이다.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니라.”(即今問我者是)
한 문장을 여기서 끊는다. 바둑은 수가 보이는 대로 둔다. 글도 보이는 대로 끊어 읽는다. 법거량法擧揚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붙을 곳이 없다.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느냐?”(欲識佛去處)
“단지 이 말하는 소리뿐이니라.”(只這語聲是)
자시者是와 성시聲是의 시是자는 그 용법이 동일하다. 촌보寸步도 떨어져 있지 않다. 묻는 그놈이고, 말하는 소리이다. “당처를 여의지 않고 언제나 담연湛然하다. 찾으면 바로 알지니, 그대는 볼 수 없느니라.”(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본체를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어도 장님이나 다름없다. 제1구를 수용하지 못하니, 부득이 제2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에 연이어 그 묘용을 파설한다.
“그대의 보물창고는 일체를 구족하고, 또한 부족함이 없이 운용運用이 자재하거늘,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본심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는다.” 지각知覺은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육식의 작용이다. 본심은 근본이고, 지각은 지말枝末이다. 지말은 근본을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찌 근본이 지말을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으랴. 본말의 차서가 그러하다.
“본심은 지각을 말미암지 않는다.” 이 경계는 어떠한가? “구태여 밖을 향하여 찾을 필요가 있으랴.”라는 힐난詰難에 대한 수응隨應이다.
6년 동안 사사師事했다면 남음이 없이 탁마상성琢磨相成했을 것이다. 마조스님의 찬탄은 제자 대주스님과 그의 저서 돈오입도요문론을 함께 기리는 것이다.
“월주에 대주大珠가 원명圓明하고, 광명을 놓아 자재하며, 가려져 막힌 곳이 없구나.”(越州有大珠圓明 光透自在 無遮障處) 통상 “월주에 대주가 있다.”라고 번역한다. 또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 그대의 보물창고이다.”(即今問我者是汝寶藏)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면 뜻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이 문장의 주어는 대주이기 때문이다. 이 유有자는 “보통명사나 고유명사 또는 형용사 앞에 놓여 이음절어를 구성하며, 번역할 필요는 없다,”라는 용법과 같이, 보통명사 명주 앞에 놓인 조사이다. 조사로 보고 해석해야 비로소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구 대주원명大珠圓明은 체體로 보고, 제2구 광투자재光透自在는 용用으로 보며, 제3구 무차장처無遮障處는 상相으로 볼 수도 있다. 말구는 통연명백洞然明白으로 보아도 또한 좋다.
대주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 무정법문과 관련하여 두 편의 글이 있다. 먼저 온광대덕과 문답이 있고, 다음 화엄좌주와 문답이 있다. 아래와 같다.
온광대덕韞光大德이 물었다. “선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아십니까?”(有韞光大德問 禪師自知生處否)
대주대사가 대답했다. “일찍이 죽은 적이 없는데 어찌 출생을 상론할 필요가 있습니까? 생멸을 안다면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는데, 말하기를 생사가 있다 없다고들 합니다. 마조대사가 이르기를, ‘당금當今 출생出生해도 곧 불생不生이다’(當生即不生)라고 하셨습니다.”(師曰 未曾死何用論生 知生即是無生法 無離生法 說有無生 祖師云 當生即不生)
나의 견해: 온광스님이 생사의 근원을 묻는다. 대주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다고 답한다. 유정의 생로병사나 무정의 생주이멸이 다르지 않다. 생사가 바로 생멸이다. 생을 안다 또는 생멸을 안다는 것은 생멸을 멀리 여의었다는 생멸멸이生滅滅已를 말한다. 생멸은 일체 세간의 대대경계待對境界이다. 이에 반하여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절대경계이다. 이 세계는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다. 이 도리를 모르는 이들이 설왕설래하며 생사의 유무를 가지고 힐난한다.
마조대사의 4구게 중에 결구만 인용한 바, 전체를 이른다면 아래와 같다.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시니,
보리법문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사사와 이사가 모두 무애하니,
당금 출생해도 바로 불생이니라.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礙 當生即不生
수시隨時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시세에 순응하다, 시의에 부합하다, 둘째, 어느 때나, 하시를 불문하고, 셋째, 시속을 따라 등이다. 만일 심지법문이 화엄법문이라면 상설常說이 될 것이다. 지녕只寧은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해석한다. 녕寧은 여시如是와 같다.
심지함종心地含種이란 말이 있다. 심지心地가 불종佛種을 함축하고 있다. “법달아, 나는 항상 원하노라. 일체 세인世人의 심지로 언제나 친히 불지견佛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지니라.”(法達 吾常願 一切世人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生知見) 이 심지는 중생의 심지이다. 경문에 “시방 여래의 최고 수승한 비밀의 심지법문”(十方如來最勝祕密心地法門)이란 말이 있고, 불심지佛心地란 말도 있다. 이 심지는 제불의 심지이다. 중생의 심지는 사의思議할 수 있고, 제불의 심지는 사의할 수 없다.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식識이고,(有分別是識)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지혜(無分別是智)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심지법문도 또한 양분兩分할 수 있다. 심지법문은 중생의 심지로 보면 수타의어이고, 여래의 심지로 보면 수자의어이다. 보리법문은 실설로 수자의어이다. 이에 마대사의 심지를 중생의 심지로 보고 해석한다.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시니, 보리법문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사사와 이사가 모두 무애하니, 당금 출생해도 바로 불생이니라.”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면 보리법문이 되는 것이고, 보리법문도 또한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면 심지법문이 되는 법이다. 권설이라 실설이라 단정하지 말라. 단정하면 막히고, 자재하면 융통하여 사사가 무애한다. 이 경계에 어찌 출생과 불생에 분별이 있으랴.
“자성을 보지 못한 이도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曰不見性人亦得如此否)
“스스로 자성을 보지 못한 것이고,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보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이 없으면 볼 수 없고, 아는 것이 바로 자성이기 때문에 자성을 안다고 말하며, 깨닫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을 통달한다고 이르고, 만법을 출생할 수 있어서 법성이라 부르며, 또한 법신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마명조사가 이르기를, ‘이른바 법이란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라고 하시니, 만일 마음이 생기면 이 때문에 일체 법이 생기고, 만일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일체 법도 생기는 곳이 없으며, 또한 명칭도 없습니다. 미인迷人은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줄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큰소리칩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수록收錄할 만하겠습니까? 대면對面하고 진불眞佛을 미혹하여 장겁을 희구하며, 모두 체법體法 가운데서 미혹하여 밖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이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달은 이는 종횡으로 자재해도 이 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師曰 自不見性不是無性 何以故 見即是性無性不能見 識即是性故名識性 了即是性喚作了性 能生萬法喚作法性 亦名法身 馬鳴祖師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若心生故一切法生 若心無生法無從生 亦無名字 迷人不知法身無象應物現形 遂喚青青翠竹總是法身欝欝黃華無非般若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法身即同草木 如人喫筍 應總喫法身也 如此之言寧堪齒錄 對面迷佛長劫希求 全體法中迷而外覓 是以解道者行住坐臥無非是道 悟法者縱橫自在無非是法)
나의 견해: 원문 “미인迷人은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줄을 알지 못한다.”(迷人不知法身無象應物現形)
1차 요약: “법신은 형상이 없지만 만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룬다.”
2차 요약: “법신이 무정에 응하여 형상을 이룬다.”
나의 결론: “법신이 취죽에 응하여 취죽이란 형상을 이루고, 법신이 황화에 응하여 황화란 형상을 이룬다. 그러나 취죽과 황화는 여전히 무정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취죽과 황화는 법성만 있고, 불성은 없다. 이 법신은 불성이 아니고, 법성이다.” 이는 또한 신회스님의 견해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마침내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큰소리친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큰소리치는 이의 허물인가? 큰소리친다고 말한 이의 허물인가?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다.” 육조대사의 무정무불종 종지는 대주스님까지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이다.”
“일체 대지가 이미 불신佛身이라면 일체 중생이 불신 위에서 생활하며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히고, 또 구멍을 뚫으며 불신을 짓밟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客曰 一切大地旣是佛身 一切衆生居佛身上 便利穢汙佛身 穿鑿踐踏佛身 豈無罪乎)
“일체 중생은 전체가 불신인데, 누가 죄가 되겠느냐?”(師曰 一切衆生全是佛身 誰爲罪乎)
사람이 죽순법신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중생불신이 대지불신 위에서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힌들 무슨 죄가 되느냐? 대주스님과 혜충국사의 견해는 명확히 엇갈린다. 천지현격이다.
“대면對面하고 진불眞佛을 미혹하여 장겁을 희구한다.” 대면하고 진불을 미혹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타인을 걱정할 형편이 아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함이 또한 옳다.
“모두 체법體法 가운데서 미혹하여 밖에서 찾는다.” 반야경의 핵심은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니니, 색이 바로 공이다. 색을 멸진한 공이 아니고, 색성色性 자체가 공하다.”(色空爲二 色即是空 非色滅空 色性自空) 만사萬事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니, 만법萬法은 자성이 없다. 석법析法을 의거하지 않고, 이 색법色法 자체가 공적空寂함을 통달하니, 이를 체법體法이라 말한다. 만사나 만법 색 색법 등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이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달은 이는 종횡으로 자재해도 이 법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도’를 가지고 아승지겁을 수행해도 불지를 수용할 수는 없다. 이 누구의 허물인가? 그 근원이 어디인가?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화엄경을 강의하던 지좌주志座主가 질문했다. “선사는 무슨 연고로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구절을 수긍하지 않습니까?”(講華嚴志座主問 禪師何故不許 青青翠竹盡是法身 欝欝黃華無非般若)
대주화상이 대답했다. “법신은 무형무상無形無象하니 취죽에 수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것이고, 반야는 무지무상無知無相하니 국화에 대응하여 형상을 드러낸 것이며, 저 국화와 취죽은 반야나 법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진법신眞法身이 마치 허공과 같고, 중생에 수응하여 신형身形을 나투심이 물속에 달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취죽도 또한 묘용에 수응할 수 있습니다. 좌주는 알겠습니까?”(師曰 法身無象應翠竹以成形 般若無知對黃華而顯相 非彼黃華翠竹而有般若法身 故經云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翠竹還能應用 座主會麼)
“이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曰不了此意)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습니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습니다. 만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취죽을 말하면 취죽에 집착하고, 국화를 말하면 국화에 집착하며, 법신을 말하면 법신에 집착하고, 반야를 말하면 반야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논쟁을 이룰 뿐입니다.”(師曰 若見性人 道是亦得 道不是亦得 隨用而說 不滯是非 若不見性人說翠竹著翠竹 說黃華著黃華 說法身滯法身 說般若不識般若 所以皆成爭論)
지좌주가 절하고 물러서서 나갔다.(志禮謝而去)
나의 견해: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는다.” 이는 이사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명언이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주스님의 견해가 투철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천지는 장구하지만 다할 때가 있으리라. 이 한은 면면하여 끊어질 기약이 없을지니.”(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이를 차용하여 위 소제목을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여, 면면무절기綿綿無絶期로다’라고 명명했다.
5)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의 사자상전師資相傳 여부
육조스님의 법보기 중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에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란 문구가 있다. 이를 자세히 구명해보고자 한다. 성상性相을 여의고서는 단 일구도 설법할 수 없다. 동정動靜도 성상 중에 하나이다. 이 동정을 진가眞假로 수식하면 진동眞動 진정眞靜과 가동假動이 가정假靜의 4개 조합이 생길 수 았다. 동정動靜 중에 후자 정靜을 부동不動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하면 진동 진부동眞不動과 가동이 가부동假不動이 된다. 진동과 진부동은 보살행이고 여래행이며, 가동과 가부동은 범부와 이승의 행이다. 그 게송은 아래와 같다.
유정有情은 곧 동행動行을 알지만,
무정無情은 바로 부동행不動行이로다.
만일 유정이 부동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부동행과 같아지느니라.
有情即解動 無情即不動 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만일 진실한 부동행을 찾고자 하면,
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느니라.
부동행은 바로 부동행이라,
무정은 불종佛種이 없느니라.
若覓眞不動 動上有不動 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게송이다. 복행福行과 죄행罪行 그리고 부동행을 삼행三行이라 한다. 십선 등 복행을 닦으면 욕계 중에 인천의 과보를 받고, 죄행을 저지르면 욕계 중에 삼악도의 과보를 받으며, 부동행 또는 무동행無動行 곧 유루有漏의 선정을 닦으면 색계나 무색계의 과보를 받는다. 부동행과 상응하여 복행과 죄행을 동행이라 한다. 이는 유루의 동행과 부동행이니, 곧 범부행凡夫行이고 이승행二乘行이다. 또 하나의 동행과 부동행이 있다. 바로 무루無漏의 동행과 부동행이니, 바로 보살행菩薩行이고 여래행如來行이다.
“유정有情은 곧 동행動行을 알지만, 무정無情은 바로 부동행不動行이로다.”(有情即解動 無情即不動) 동행은 둘이 있다. 하나는 몸의 동행이니,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다. 둘은 마음의 동행 곧 심행心行이니, 일체 의식의 작용이다. 유정은 의식작용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경계를 상대하여 견문후상각지見聞嗅嘗覺知할 줄 안다. 그러나 무정은 의식작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육경에 대하여 동행하지 않는다.
“만일 유정이 부동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부동행과 같아지느니라.”(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부동행은 수행이다. 제법이 부동하여 적정하다. 이것이 무정의 부동행이다. 유정은 성문사과의 계위를 올라가며 부동행을 닦는다. 노자도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내가 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명제冥諦를 좋아하여 지도至道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수다원 행인行人은 8만겁, 사다함 행인은 6만겁, 아나함 행인은 4만겁, 아라한 행인은 2만겁, 벽지불 행인은 1만겁을 선정에 머무르고, 외도도 또한 8만 대겁을 비상비비상천에 머문다. 이것이 모두 부동행이다.
“만일 진실한 부동행을 찾고자 하면, 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느니라.”(若覓眞不動 動上有不動) 진실한 부동행은 보살행이고, 불행佛行이다. 보살의 수행은 동행 중에 부동행이 있고, 부동행 중에 동행이 있다.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 성성하다. 곧 성적惺寂이 등지等持하고, 적조寂照가 쌍류雙流한다. 상주부동常住不動한다.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러 세간의 제상이 상주한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열반적정涅槃寂靜 무위안락無爲安樂이 또한 부동행이고, 불행이다.
“부동행은 바로 부동행이라, 무정은 불종佛種이 없느니라.”(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 동행 가운데 동행이 있으면 호사난상胡思亂想이다. 부동행 가운데 부동행이 있으면 바로 무기無記이다. 이 때문에 무정은 불종이 없느니라.
“너희들은 모두 좌정坐定하시라. 내가 너희들에게 몇 수의 게송을 주노니, 이름을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라 한다. 너희들이 이 게송을 암송하고, 나와 더불어 그 게의偈意를 함께하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그 종지宗旨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汝等盡坐 吾與汝等一偈 名曰 眞假動靜偈 汝等誦取此偈 與吾意同 依此修行 不失宗旨) 육조대사가 임종을 앞두고 하신 법문이다. 이 때문에 육조대사의 수타의어로 보기도 어렵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은 일승 실설이 아니고, 삼승 권설이다. 이 무정무불종의 종지는 달마대사 이후 대대로 사자상전師資相傳한 것일까? 아니면 육조대사 전유專有일까? 그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능가사자기 중에 4조 도신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고, 여기에 매우 중대한 법문이 하나가 있다. 또 6조 혜능대사의 법보기에 5조 홍인대사의 전법게도 있다.
해석 1: “열반경에 이르기를,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라고 했지만, 어쩌면 장벽와석은 불성이 없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없다면) 어떻게 설법할 수 있으랴.”(涅槃經云 一切衆生有佛性 容可說牆壁瓦石而非佛性 云何能說法)
해석 2: “열반경에 이르기를,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라고 했으니, 어쩌면 장벽와석도 불성이 있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설법할 수 있으랴.”(涅槃經云 一切衆生有佛性 容可說牆壁瓦石 而非佛性 云何能說法)
용容자는 부사로 ‘아마, 혹시, 어쩌면 ...일지도 모른다’ 등으로 쓰인다. 위와 같이 문단의 띄어쓰기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모두 무정도 불성이 있다는 쪽에 방점을 찍었다. 하나를 간택한다면 아래 해석을 취한다. 6조 혜능대사는 명백하게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이라 말하고 있다. 무정은 불종이 없다, 부처 종자가 없다, 불성이 없다. 모두 같은 뜻이다. 만일 4조 도신대사는 무정은 불성이 있다고 했다면, 사자상전師資相傳하는 그 법맥이 어떻게 될까? 이를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까?
법보기에 있는 5조 홍인대사의 게송이다. 앞 게송은 돈황본에 있고, 뒤 게송은 통용본에 있다. 제2구는 완전히 다르고, 제4구도 그 차이가 적지 않다.
유정有情이 종자를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바로 피어내도다.
무정이 다시 종자가 없다면,
심지心地에 또한 피어날 수 없도다.
有情來下種 無情花即生 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유정이 종자를 뿌리니,
땅을 인하여 열매가 다시 열리도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무성無性이라 또한 결실할 수 없도다.
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既無種 無性亦無生
래來자는 어기사로 구체적인 뜻은 없다. 구 가운데 쓰여 음절을 완전히 채우거나 어기를 느슨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첫째 돈황본 게송의 제3구를 가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확정으로 볼 것인가? 이에 대한 결정권은 제2구에 있다. “유정有情이 종자를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바로 피어내도다.”(有情來下種 無情花即生) 씨앗의 종자는 무정이고 유정은 아니다. 비유이다. 무정이 유정과 상응한다. 유정이 부처종자가 있다면 무정도 또한 부처종자가 있다. 만일 “무정이 다시 종자가 없다면, 심지心地에 또한 피어날 수 없도다.”(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무정이 불성이 없다면 성불할 수 없다. 이사가 부합한다. 제3구를 “무정은 다시 종자가 없다.”라고 단언하면, 제1구와 제2구를 상반되게 해석해야 한다. 한번 상반되게 해석해 보시라.
둘째 통용본 게송이다. “유정이 종자를 뿌리니, 땅을 인하여 열매가 다시 열리도다.”(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이는 더 논란할 것 없이 바로 유정 성불이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니, 무성無性이라 또한 결실할 수 없도다.”(無情既無種 無性亦無生) 이는 단적으로 진가동정게 중에 무정무불종과 그 취지가 동일하다.
만일 5조 홍인대사의 전법게를 정본으로 돈황본을 취하면, 홍인대사가 무정성불의 취지를 수용하는 것이고, 통용본을 취하면 무정무불종의 종지를 사자상전師資相傳하는 것이 된다. 나는 전자를 취한다.
6) 무정법문의 종초지말從初至末이 모두 불설佛說이다
“또다시 불자여, 비유하면 대해에 그 물이 사천하四天下의 땅속과 80억의 모든 작은 섬 속에 잠류潛流하니, 구멍을 뚫는 이는 모두 물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저 대해는 ‘내가 물을 내보냈다.’라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불지佛智의 해수海水도 또한 이와 같이 일체중생의 심중心中에 유입流入되느니라. 만일 모든 중생이 경계를 관찰하고 법문을 수습修習하면, 바로 지혜가 청정하고 명료明了해지지만, 여래 지혜는 평등무이平等無二하여 분별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의 품류品類를 따라 심행心行이 다르기 때문에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심의 셋째 심상心相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알지니라.”(“復次 佛子 譬如大海其水潛流四天下地及八十億諸小洲中 有穿鑿者無不得水 而彼大海不作分別 ‘我出於水’ 佛智海水亦復如是 流入一切衆生心中 若諸衆生觀察境界修習法門 則得智慧清淨明了 而如來智平等無二無有分別 但隨衆生心行異故 所得智慧各各不同 佛子 是爲如來心第三相 諸菩薩摩訶薩應如是知”)
범부의 입장에서 보면 견성見性이란 진실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도 또한 그러하다. 달마대사가 동토로 와서 선종을 개창한 뒤 2조 혜가대사와 3조 승찬대사는 은둔 수행에 전념했지만, 4조 도신대사 이후 산문을 열고 대중교화에 힘쓰셨다. 이에 전법제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무정불성에 대하여 4조와 6조의 견해가 다르고, 신수대사와 혜능대사의 돈점 논란이 두드려졌으며, 6조의 문하에 혜충국사와 신회스님의 무정관無情觀이 현저히 다르다. 또한 6조의 무정무불종 종지가 4세 법손 대주스님까지 전승되었지만, 당말 송조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가 끊어졌다. 이 논란을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는가? 이 때문에 위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인용한 것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경계를 관찰하고 법문을 수습하면, 바로 지혜가 청정하고 명료明了해지지만, 여래 지혜는 평등무이하여 분별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의 품류를 따라 심행心行이 다르기 때문에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느니라.” 이 화엄경의 ‘증득한 지혜도 각각 동일하지 않다’라는 말씀을 인정하면 논란은 간단히 끝난다. 이를 인정하겠는가? 아니면 삽삼조사의 전법은 부처님의 심인을 밀전密傳했기 때문에 전혀 다를 수 없다고 주장하겠는가?
이에 나는 또 하나의 방패를 준비했다. 연수스님의 종경록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때문에 알지니, 지혜는 있지만 다문多聞이 없거나, 다문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이는 모두 실상을 통달하지 못하고, 다문과 지혜를 구족해야 심원心原을 있는 그대로 보느니라.”(故知有智慧無多聞 有多聞無智慧 俱不達實相 聞慧具足眞見心原)
이를 의거하면, 4조 도신대사와 혜충국사는 다문과 지혜를 구족했다고 말할 수 있고, 6조 혜능대사와 신회스님 그리고 대주스님 등은 다문과 지혜를 구족하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문의 판단 기준은 화엄경의 파지把持 여부로 결정한다.
무정은 차치하고, 유정도 또한 불성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끝이 없다. 하물며 무정이랴. 유정의 불성 유무도 부처님의 설법에 근원하고, 무정의 불성 유무도 또한 부처님의 법문에 시원始原한다. 무정법문의 종초지말從初至末이 모두 부처님의 설법에 있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부처님이 병을 주고 약을 주신 것은 아니다. 중생의 병이 갖가지라 처방도 또한 그에 상응할 따름이다. 갖가지 불성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 그리고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이다. 이 삼어三語를 알면 일체 논란이 그 자리에서 바로 쉬고, 이를 모르면 불성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면면히 이어져서 그 끝이 없을 것이다.
11. 무정설법의 선가수용禪家收容과 그 폐단弊端
무정설법은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며, 일체 공안의 귀결처歸結處이다. 이와 같은 무정설법의 선가수용禪家收容은 그 시원을 명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일단 인도를 제외하면 도생법사의 취죽황화가 시원에 상당할 것이다. 취죽황화의 그 지취를 선가에서 널리 휘날린 이가 바로 혜충국사이다. 이후 당말과 송조에 이르러 만개했다.
1) 무정설법의 문답 사례
사례 1: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나의 견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선가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좌는 이 판치생모를 들고 참선할 수 있다. 부처님은 금불今佛도 있고, 내불來佛도 있으며, 또한 고불古佛도 있다.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이냐?”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
이 조약돌을 화두로 삼고 참구할 수도 있다. “어째서 고불심을 조약돌이라 말했을까?”
사례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석두화상石頭和尙이 답변했다. “노주露柱에게 물어보라.”(師曰 問取露柱去)
나의 견해: 노주露柱는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기둥’(露在外面之柱)이라는 뜻이다. 보통 법당이나 불전佛殿 앞에 있는 원주圓柱를 말한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다. 곧 “나의 본신本身이 이 동토東土에 온 것은 불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이에 조사서래의는 ‘불법의 적실한 대의’(佛法的的大意)와 그 뜻이 같고, 또한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와도 그 뜻이 동일하다. 이 때문에 광의로 해석하면, 확연무성廓然無聖이나 문취노주問取露柱도 그 낙처落處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사례 3: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조주화상이 답변했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師云 庭前柏樹子)
나의 견해: ‘뜰 앞에 잣나무니라’라는 화두는 용장龍藏에도 없다고 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화두 또는 공안을 성문이나 벽지불 또는 삼현이나 십성은 필요하지 않는다. 공안이 일승 실설보다 존귀하여 용장에 없는 것이 아니고, 현성의 분상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이 공안 수행법이 부처님의 수행 법문보다 수승하다면, 조사의 지혜가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말세 근기가 지극히 하열한 학자한테만 필요하다. 말세 학자는 번뇌 망상이 치열하다. 이 처방전이 바로 공안 수행법이다.
사례 4: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수룡睡龍스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에게 맡겼는데, 그 고불의 마음을 묻지 않는구나.”(我委你 不問古佛心)
나의 견해: 내가 그대에게 고불의 마음을 맡겨두었는데, 어째서 묻는 당처에 있는 그 고불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고, 달리 먼 곳에 있는 고불의 마음을 묻느냐?
사례 5: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면전에 드러내주어도 유由는 알지 못하는구나. 부처를 묻는 사람한테 어찌 고불심을 맡길 수 있을까?”(覿面相呈由不識 問佛之人焉能委)
나의 견해: 유由는 자로子路를 말한다. 출처는 순자荀子 유화편宥坐篇에 있다. “유는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너한테 일러주마. 얘야, 이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등용되더냐? 왕자 비간은 심장을 가르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孔子曰 由不識 吾語女 女以知者爲必用邪 王子比干不見剖心乎)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 이야기를 할 수 없다.(痴人面前 不得說夢)
사례 6: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보봉寶峰스님이 말씀하셨다. “마침내 흙과 나무 기와 조약돌이라 말씀하지 않았던가?”(終不道土木瓦礫是)
또 자복資福스님이 말씀하셨다. “산하대지니라.”(山河大地)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흥평興平스님이 말씀하셨다.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卽汝心是)
“비록 그러하다고 할지라도, 또한 제가 묻는 곳은 아닙니다.”(雖然如此 猶未是某甲問處)
“만일 그러하다면 목인木人에게 물어보라.”(若與摩 問取木人去)
나의 견해: 국사의 말씀처럼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도 고불의 마음이고, 질문하는 선객의 마음도 또한 고불의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본래 구족한 청정진여심淸淨眞如心도 또한 고불의 마음일 것이다.
사례 7: 앙산스님이 누워계시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師臥次 僧問云)
“법신도 설법할 줄 압니까? 알지 못합니까?”(法身還解說法也無)
“나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있다.”(我說不得 別有一人說得)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說得底人在甚麼處)
스님은 목침을 내밀었다.(師推出枕子)
나의 견해: 목침은 어떤 사람의 분수가 있을까? 또 어떤 법신을 물었을까? 무정법문이 당말唐末과 송조宋朝에 이르러서는 선가에 일상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보고 말하는 것과 알고 말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무정설법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의 대인경계라야 들을 수 있는데, 당송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사는 무정법문이 일상사가 되어 입에 달고 산다. 어쩌면 신회스님과 대주스님이 후대 선사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2) 조사교祖師敎의 출현과 쇠퇴
“모든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일미一味로 귀착歸着하는데, 이 일미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일심一心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뜰 앞에 잣나무니라’라는 화두는 용장龍藏 처소에도 저본底本이 여전히 없다고 이른 것이다.”(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나의 견해: 선가에서 보면 위 말씀은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만일 교가에서 보면 어떠한가? 이 경우에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이 없다. 이사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전자는 곡설曲說이고, 후자는 직설直說이며, 전자는 수타의어隨他意語 또는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이고, 후자는 수자의어隨自意語이며, 전자는 권설이고, 후자는 실설이며, 또 전자는 일미로 귀착하고, 후자는 일심을 드러낸다는 주장이다. 일미一味와 일심一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 무미無味와 무심無心도 다른가? 이는 불교의 선종이 아니고, 조사교祖師敎이다. 조사교의 주장은 일승 실교법문 일체를 선문으로 삼고, 삼승 권교법문을 교문으로 한정하며, 여래선 위에 조사선이 있고, 선문이 교문보다 더 수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조사교의 시조로 진귀조사를 내세우기도 한다.
부처님은 세칭 활 같은 설법으로 불찰미진수 보살을 교화했다. 그 지위가 모두 십지보살 이상이다. 조사는 활줄 같은 법문으로 교화한 보살의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설자說者와 청자聽者의 지위가 전혀 다르다. 이보다 더한 적반하장이 있는가? 서가 세존이 입멸한 이후 어떤 조사가 성불했는가? 누구인가? 마명보살도 제이의 부처라 경칭敬稱하고, 용수보살도 또한 제이의 서가라 존칭하지만, 능가경에 의하면 환희지보살로 기재되었고, 무착보살도 초지보살이라 전해 내려올 따름이다. 이 밖에 삼현보살의 지위에 올랐다는 스님들이 더러 있다. 세칭 조사라는 분들도 초지보살 이상은 없는데, 그 밑에서 수학한 이들이 어찌 불찰미진수 십지보살에 상당하랴.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성불이 묘각위를 증득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언어의 유희이다. 그래도 또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여래선 위에 조사선이 있느니라. 가비가통이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있느니라.”(州云 有)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가죽포대를 치고 들어갔습니까?”(僧云 旣有 爲甚麽卻撞入這箇皮袋)
“그이를 위하여 알지만 짐짓 범했느니라.”(州云 爲他知而故犯)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又有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없느니라.”(州曰 無)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데, 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없습니까?”(僧云 一切衆生皆有佛性 狗子爲什麽卻無)
“그이를 위하여 업식業識이 있구나.”(州云 爲伊有業識在)
나의 견해: 수행인이 불성의 유무를 묻는 것은 신심을 확립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불성을 묻는 것은 불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불성을 철견徹見한 수행자라면 구태여 타인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조주스님을 고불이라 한다. 그 출처는 설봉스님이다. 이백의 시에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있고, 또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도 있다. 이 고불이 딱 그러하다. 내가 조주스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스님의 문손이 스승을 추앙하고자 칠지보살이라 덕칭德稱했는데, 후인이 이르기를 대혜스님은 칠지보살이 아니고 불지보살이라 말한다. 조사교의 문손이 이와 같다. 이는 또한 조사교의 폐단이 아니랴.
12. 결어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은 그 시원始原을 도생법사道生法師의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라는 취죽황화翠竹黃花로 상정想定할 수 있다. 이를 법거량法擧揚 곧 문답의 양식을 빌려서 정리한다.
“어떤 것이 진여법신眞如法身이냐?”(如何是眞如法身)
“취죽翠竹이니라.”
“어떤 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이냐?”(如何是實相般若)
“황화黃花이니라.”
이 취죽황화라는 무정설법은 전적으로 교종의 문제이고, 그 원조元祖는 도생법사이다. 혜충국사는 취죽황화의 무정설법을 절대 긍정하며, 또다시 장벽와력廧壁瓦礫이라는 무정설법을 제시한다. 이에 혜충국사는 화엄의 무정설법을 맨 처음 선문으로 수용한 또 하나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입니까?”(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師曰 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도생법사(355~434)는 혜충국사(675~775)와 출생년도로 비교하면 320년의 차이가 난다. 도생법사가 취죽과 황화라는 무정설법을 제창한 이후 3백여 년 동안 무수한 고승들 사이에 찬탄과 힐난詰難이 동시에 교차했다. 동진東晉 의희義熙14년(418)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삼장이 60권 화엄경을 번역했고 보면, 화엄경을 공부한 일승학인은 찬탄했을 것이고, 삼승교설을 국집한 학승들은 힐난에 동참했을 것이다.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 그리고 고불의 마음이 또한 불성과 다를 것이 없다. 이 글의 제명이 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이다. 취죽과 황화 그리고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은 모두 무정이지만, 또한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도 되고, 그리고 다시 고불의 마음도 된다. 이 무정설법은 “일체 법이 모두 무성인 줄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는다.”(知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 라고 하는 무성법문無性法門과 함께 지고무상의 법문이다. 혜충국사의 논법을 빌리면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의 경지라야 비로소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어떻든 달마 7세손 혜충국사가 선양한 이후 8세손 석두스님을 위시하여 10세손 위산스님 운암스님이나 11세손 동산스님 등은 무정설법을 선문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선가의 제사諸師가 수용한 무정설법은 달마대사가 상전한 선문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가 도생법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상전한 선문이다. 이에 나는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을 남양선南陽禪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화엄선華嚴禪이라 말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공안선을 굳이 화엄선이라 정의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당말과 송조에 이르러서는 선가에서 무정설법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는 화엄에 대한 선가의 절대 수용이고, 또한 항복 선언이다. 선가의 일체 무정공안은 무정설법에 대한 주석이고, 그 밖에 공안은 무성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선종의 자긍심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어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양언揚言도 또한 적반하장이다.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을 종취로 삼고, 무문을 법문으로 삼는다.”(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라는 명문과 명백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불심을 대표할 수도 없다. 육바라밀 중에 불심을 대표할 수 있는 바라밀은 오직 지혜뿐이다.
동일한 달마대사의 법손法孫이지만, 4조 도신대사와 혜충국사는 무정불성을 수용하고, 6조 혜능대사와 신회대사 그리고 6조의 4세 법손 대주스님은 무정무불종의 종지를 견지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육조스님이 무정설법을 몰랐다고 하여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무정설법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묘각보살이라야 수용할 수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도 관음보살을 눈앞에서 친견하고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삼현보살은 십지보살의 출몰出沒을 알 수 없고, 십지보살은 십일지보살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효보살이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을 몰랄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위 법거량에서 두 개 관문觀門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상상근기上上根機가 취하는 관문이니, 바로 고불심古佛心이다. 불심과 여래심 고불심은 말만 다르고 그 뜻은 같다. 고불심에서 어떻게 관문을 얻을 수 있을까?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欲知諸佛心 當觀佛智慧 佛智無依處 如空無所依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게송을 그 본문을 인용하여 부연敷衍한다. “불자여, 여래의 심의식心意識은 모두 알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응당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을 알 수 있느니라.”(佛子 如來心意識俱不可得 但應以智無量 故知如來心)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如來心을 알 수 있고, 여래의如來意를 알 수 있으며, 여래식如來識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도 또한 본문을 인용한다.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 만물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허공은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는 일체 세간 지혜와 출세간 지혜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여래의 지혜는 의지하는 곳이 없느니라.”(譬如虛空爲一切物所依 而虛空無所依 如來智慧亦復如是 爲一切世間出世間智所依 而如來智無所依)
불심이나 여래심 또는 고불심을 관하는 차서가 이러하다. 내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처나 여래 또는 고불도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지혜이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것이 바로 상상근기의 관이다. 상상근기는 삼매에 들어가 경문을 읽기 때문에 저절로 관이 되지만, 범부는 망상 속에 읽는데 어찌 관을 이룰 수 있으랴.
이미 고불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았거나와, 지혜가 없는 이 중생은 또한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후자를 취한다. “고불심을 어째서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라 했는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하여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어째서 조약돌이라 했는고?”
2023년 1월 21일, 임인년 12월 30일 세모일歲暮日 74세 길상묘덕 74쪽의 글을 씀
추기
제8장의 일부를 수정 보완하니, 75쪽의 글이 되다. 이에 말미를 다시 쓴다.
2023년 1월 22일, 계묘년 1월 1일 세단일歲旦日 75세 길상묘덕 75쪽의 글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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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운 글입니다.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무정법문은 불교의 최고 법문입니다.
비록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한번 읽기를 권유합니다. 감사합니다.
예
결국은 사함 받는 길인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채은님은 선근이 있어서 위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신 듯합니다.
@만리강산
예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려웠지만
빠르게 쭉 ㅡ읽어 보았습니다
어느 대목에서 ㅡ?를 찾아 볼까 하고요
부처님은 사주팔자가
식상생재생관생인생나로
구성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보아요
대단한 언변가시죠
깨달아도 표현이 안되는 사람 있을 겁니다
선근
사함의 결과가 선근으로도 나타납니다
바램이죠
행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을 거에요
일체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평등하다.
무정도 불성이 있어서 유정과 절대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차별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자기자신이 사함을 받는 객체가 되는 것보다는 사함을 주는 주체가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만리강산
예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