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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남리승만과 건국사 원문보기 글쓴이: 알리미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제131회 탄신추모식
일시:2006년 3월 24일(금요일)오후 2시
장소: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
주최:사단법인 건국대통령 리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초빙연사: 김충남 박사 (the East-West Center, Hawaii)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
이승만정부 왜곡의 분석
이승만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에서 건국을 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수호한 역사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집단과 남로당 세력이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왜곡 선전했기 때문이다.
북한공산정권은 생존을 위해 남한정부를 파멸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이승만만 제거하면 공산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전선동 수단을 총동원해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정부를 분단을 주도한 정부, 친일분자들이 득세하는 정부,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정부, 그리고 미국의 앞잡이 정부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김일성은 친일파를 청산했는데 이승만정권은 친일파를 옹호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김일성은 공산독재체제 수립을 위해 친일파뿐만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모조리 숙청했다. 그러나 건국 직후 사정은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는 것이 더 시급했다. 당시 제주는 좌익세력의 무장폭동으로 무정부상태였고 제주사태를 진압하러 가라고 명령받은 여수주둔 14연대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처럼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정부 주요기관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침투해 있었다. 치안과 국방을 담당할 군대와 경찰에서 좌익분자를 제외하면 일본 군대나 경찰에 있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친일분자를 제거했다면 치안과 국방은 좌익세력이 장악하게 되었을 것이고 나라는 공산세력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또한 당시 지식인층 대부분이 친일인사였는데 이들을 다 제거해 버리면 전문인, 교사, 기술자가 모자라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둘째,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 이승만을 그들의 정책에 방해가 되는 고집스럽고 비합리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독재자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세계전략 또는 동아시아전략 차원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의 이익을 등한시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전쟁의 목표나 휴전문제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로 판단했기 때문에 미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승만정부가 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든 그 무엇이든 언제든지 재건할 수 있지만 나라를 지키는데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가졌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건국초기 특히 공산침략을 받았을 때, 그리고 북한의 위협이 심각했을 때, 반공과 국가안보가 최우선 가치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오늘의 기준으로 결코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52년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하여 두고두고 비판하고 있지만 장개석 정부는 1949년부터 1988년까지 계엄령 하에서 통치했다. 지구 저편에 있는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직후인 1950년 12월 15일 한국전쟁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우리의 가정, 우리나라,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기본권을 제한하고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했으며 1952년 4월 철강노조 파업 시 무기생산의 차질을 우려하여 상무부로 하여금 철강회사를 접수하여 직접 운영하도록 대통령 명령을 하달했던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는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초치를 남발했다. 그는 국회동의 없이 군사작전을 명령했고, 징집을 기피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적대세력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으로 대한 사람들은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했으며,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했고 비판하는 신문사 발행인들을 체포했으며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고 야당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함으로서 언론에 의해 독재자 또는 폭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있고나서 헌법이 있다면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헌법을 위배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고 “평상시 헌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그 같은 조치들은 나라를 보위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1주일 전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 임하면서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해야 한다. 그 같은 정신은 의회, 법원 등 사회 모든 부문에 적용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미국의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헌법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1차대전 기간 중 미국 연방정부는 2천여 명을 간첩혐의로 체포하여 그중 절판정도를 투옥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4선 대통령이 되었으며 2차대전 당시 그는 갖가지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고 수천억 달러의 예산을 지출했으며 수백만 명을 징집했다. 언론 검열을 실시했고 10만 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시켰다. 이 같은 조치들이 “평시에는 헌법에 위배되며, 비민주적이고 그야말로 독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미국인들은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2001년 9월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고 나서 부시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인권을 제한하고 있다.
한국처럼 긴박한 안보위협 하에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건국 후 15년 동안 안보우선의 권위주의통치를 경험했다. 초대 수상 벤구리온은 "민주적 독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나라는 헌법과 법률에 국가안보를 우선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인권과 자유를 제한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민주국가”라 불리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자유보다 안보가 우선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구한 이 대통령을 인권을 침해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계속되는 정치적 격변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따라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장교를 길러내는 사관학교에서도 역사교육은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만 가르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책을 보면 절반은 대한민국의 건국인데 혼란과 갈등을 부각하고 있는 반면 절반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일사불란한 발전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발행한 자료가 이 모양이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역사학자들은 현대사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로 일반국민들도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은 이미 오래전에 암기과목으로 전락했고 그것도 선택과목이 되어 역사인식은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역사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요 정부의 책임이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국민이 어떻게 위대한 역사를 개척할 수 있겠는가?
이같이 된 데는 지식인들이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외국 수정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커밍스는 다분히 친공(親共)적인 입장에서 한국역사를 해석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폄하했지만 김일성과 북한 공산정권의 스탈린식 가혹한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를 커밍스는 남한에는 국민의 저항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모두가 김일성을 지지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김일성이 그렇게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선정을 베풀었다면 왜 해방당시부터 1947년 중반 사이에 매일 평균 4,000 여명이 남하했으며 북한인구의 17%에 해당하는 백 8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는가?
마지막으로 과거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잘못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오늘의 이라크에 가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선진 민주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한국의 과거 지도자를 평가하면 모두 잘못된 지도자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학자들은 과거 지도자들을 연구하려 해도 권위주의 지도자를 옹호한다고 비난받을까 우려하여 연구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정치학자들도 이승만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4.19세대를 비롯한 한국 지식인들과 야당정치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치우쳐 그의 역사적 공로는 묻혀버리고 부정적인 인식만 보편화된 실정이다.
저는 지난 10여 년간 대통령을 연구하면서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국민교육 수준이 높은 서구의 리더십 평가기준을 개발도상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개발도상국 지도자는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 또는 독재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저는 리더십 환경이 다르면 리더십 전략과 스타일이 다르지 않으면 성공하는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저는 국가발전 단계에는 선진국과 달리 달성해야 할 과제가 세 가지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로 국내외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며 둘째는 경제적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고 그 두 가지 바탕위에서 민주주의는 서서히 발전된다고 본다. 개발도상국의 한정된 경험과 능력으로 안보, 경제, 민주주의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할 수 없고 단계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시대적 과제인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데 성공했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그는 역사적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본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철학과 업적을 올바로 평가하여 그분의 역사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 등을 신화적 존재로 부각하여 교육시키고 있다.
또한 모든 전직 대통령을 위한 기념관과 도서관을 건립하고 곳곳에 기념물을 세우고 거리와 건물, 학교, 항공모함, 공항 등에 대통령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직 대통령은 존경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국민들의 단합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저는 1993년 초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와 기념사업을 필요성을 말씀드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김영삼대통령은 취임직전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했고 그 며칠 후인 3.1절 기념식에서는 문민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후 대통령들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기념관이나 동상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은 완전 파멸상태에 있지만 곳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과 기념물이 서있다. 한국에도 각계 지도자들을 위한 동상이 많고 특히 김구, 서재필, 안창호, 윤봉길, 안중근, 안익태 기념관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지도자들을 위한 동상과 기념관이 모두 있다. 그런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공공장소에 하나도 없고 그분의 건국이념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방 당시 북한은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북한은 완전히 파멸상태에 이르렀고 한국은 자유와 번영이 넘치고 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우리는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계승 발전시켰지만 김일성은 수천만의 인민을 죽이고 국민을 노예로 만든 소련식 국가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그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대한민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지만 지도자를 잘못 만난 북한은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세계사의 추세를 볼 때, 남북한의 엄청난 국력격차를 볼 때 그리고 남한인구가 북한의 두 배가 넘는 것을 고려할 때,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 멀지 않았으며 그것이 역사적 순리이다. 이것은 이 대통령이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통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시대의 역사를 준비하려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을 바로 세우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남산 위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이 민족 최고지도자로 숭상하고 기리게 해야 할 것이다.
국민정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국민정신 확립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계승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을 함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여 그분의 애국애족정신과 건국이념,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연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청소년들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희 우남 이승만박사 숭모회에서는 그러한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귀하께서 자발적으로 정치에서 은퇴함으로써 귀하의 나라가 귀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히 상기하게 됩니다. 1945년 한국의 재탄생은 오랜 세월에 걸친 귀하의 끈질기고 피나는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귀하께서 보여 주신 확고한 결의와 용기는 모든 한국인들은 물론 전체 자유세계의 존경과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부터 귀하의 영도 하에 한국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회복하였으며 그것은 일생에 걸친 귀하의 노력에 대한 기념탑이 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편지. 196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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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박사 주요약력】
*현재:1997년 이래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The East-West Center) 연구원으로 재직.
POSCO Fellowship을 관리하는 동시에 대통령 리더십, 남북한관계, 한미관계 등 연구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
*육군사관학교 교수,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으로 9년 여에 걸쳐 3명의 대통령을 직접 보좌
*휴버트 험프리 공공정책연구소 교환교수와 RAND 연구소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자문위원
【저서】
*최근간:『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3.20)
『Leadership for Nation Building:Korean Presidents from Syngman Rhee
to Kim Dae Jung』현재 미국에서 출판 중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정치사회화와 정치교육』,『현대공산주의 분석』(공
저) Korea and Asia-Pacific Region』(공저), 『A Changing Korea in Regional
and Global Contexts』(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