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華滿發*
영등포 슈바이처
도반 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1월초 주간조선 조동진 기자가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왔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살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 아닌지요? 그 주인공이 의대 교수·병원 과장직을 던지고 2009년 쪽방 촌 무료병원으로 들어간 ‘제2의 영등포 슈바이처’ 요셉병원 신완식 원장입니다. 이 감동의 기사를 너무 길어 요약 정리하여 널리 알립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신도림 방향으로 1~2분, 불과 30여m를 걸어가면 ‘이곳이 서울일까’란 생각이 들 만큼 초라한 동네가 눈앞에 나타난다. 집과 집을 양철지붕으로 서로 이어 붙인 쪽방들.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서기만 해도 꽉 차는 좁디좁은 골목. 그 골목 어디쯤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조차 없을 만큼 동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퀴퀴한 냄새까지. 세상이 숨찰 만큼 빠르고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거꾸로 시간을 30~40년쯤 뒤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32번지 쪽방 촌 모습이다.
이곳 영등포 쪽방촌 골목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3층 건물의 요셉의원이 있다. 이 요셉의원에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가 ‘영등포 슈바이처’ 신완식(61) 박사다. 신 박사는 감염내과 분야 한국 최고 권위자다.
2년 전만 해도 신 박사는 가톨릭의대 교수이자 여의도성모병원 내과과장,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과 가톨릭 생명위원회 위원까지 겸직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다. 그가 2009년 2월, 정년까지 6년이나 남아 있던 교수직을 내던지고 단 한 푼의 보수조차 받지 못하는 요셉의원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지금 치료비 한 푼 낼 수 없는 노숙자와 행려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이곳 영등포동 쪽방 촌을 지키고 있다. 1월 6일, 2012년의 첫 금요일에 찾은 요셉의원 2층. 진료실에서 만난 신완식 박사의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가슴으로 웃는 법을 알았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찾았다”고 했다.
“제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또 교수로 부족한 것 없이 나만을 생각하며 살 때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말이지요. 제가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저보다 일찍 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청소를 해 주시는 분들. 술 취하고, 더러운 행색으로 밀려드는 환자들을 마치 자기 몸을 씻어내듯 닦아주면서도 단 한 번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을 하루도 빼지 않고 마주하게 됩니다.
그분들을 마주하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더군요. 이분들뿐 아니지요. 차가운 우리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쓰러졌던 분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하루에도 수십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분들을 통해 오히려 제가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요셉의원에 종종 들러 목욕봉사를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 그분이 병원에 오신 날 하반신을 못 쓰는 행려 환자가 실려 왔지요. 얼마나 안 씻었는지 몸 전체에서 심한 악취가 났어요. 치료를 위해 발과 항문을 반드시 씻겨야 했는데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저조차 발과 항문 주위를 씻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봉사자 분께서 조용히 행려 환자의 옷을 벗기더니 환자의 발에 따뜻한 물을 몇 번 적시더군요. 그리곤 그 발에 입을 맞추셨지요. 그 순간 봉사자 분의 표정에선 더 이상 악취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발과 항문 주변까지 깨끗이 씻겨 주셨지요.” 신 박사는 “불과 30여분쯤이었다.”며 지금껏 자신의 기억이 담아낸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했다.
“천사가 살아있다면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지 못했던 제 자신에게 ‘부끄럽다’란 게 어떤 건지 처음 알게 됐습니다. 또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사는 법을 그제야 알게 됐지요. 지금은 그분 같은 천사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는 “막연히 ‘의사 신완식, 교수 신완식’으로만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 사이, 신 박사는 곧 60줄에 들어서게 될 자신을 생각하니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참 많이도 아파하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몸 아픈 사람이야 X레이 찍어주고, 약 주고, 정 안되면 수술이라도 해주면 되지요. 그런데 여기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서 더 아픈 거랍니다. 고쳐 주기도, 보듬어 주기도 힘든 마음의 상처에 아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서, 뜻하지 않았던 단 한 번의 실수로 세상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을 향해 너무 깊고 가혹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막는다.’ 하더군요. 그래도 이곳이 지금처럼 하루 100명이 넘는 노숙자와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일이 더 이상은 없어 제가 백수가 되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 아닐까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건 결국 우리 사회가 약자를 끌어안아 줄 만큼 포용력 있는 따뜻한 사회가 못 된다는 말이잖아요. 나와 다른 이도 품어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요셉의원은 정부나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보통 사람들이 한 푼 두 푼을 모아 보내준 성금과 자원봉사자들의 열정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 박사는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진 못하지만 꼭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어떠셨는지요? 세상이 아름답지 않으십니까? 이 아름다운 세상 영등포의 슈바이처처럼 우리 각자의 분야에서 마음껏 나누고 한껏 베풀고 가면 좋겠습니다.
원기 97년(2012) 1월 25일 덕 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