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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가 아니라 은혜다
□ 본문 : 창세기 49장 1-4절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열 두 아들들을 부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지금부터 야곱이 하는 말은 단순한 유언이 아닙니다. 물론 열 두 아들들을 향한 개인적인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향한 예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의 삶을 통해서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넘어진 인생을 살았던 아들들을 통해서는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을 정말 조심해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똑같은 죄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승리의 인생을 살았던 아들들은 우리의 본이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저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겠구나 하면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의 예언대로 유다지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르우벤을 향한 유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르우벤은 장자입니다. 장자는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지도권을 물려받습니다. 그 집안을 대표하며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들입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소유 중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를 더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르우벤을 향해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위엄이 있고 힘도 탁월했으니 야곱의 뒤를 이을 장자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르우벤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장자였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러나 르우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축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지만,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물의 끓음 같았기 때문입니다. ‘끓음’이라는 단어는 ‘음탕(방탕)’ ‘변덕’ ‘경박’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우벤이 물의 끊음 같았다는 말은, 자신 안에 있는 음탕(방탕)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의 끓음 같았은즉’을 현대인의성경에서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아서’로 표현했습니다.
물이 소용돌이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음탕이 방탕이 르우벤을 사로잡으니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갔습니다.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입에 담기조차 악하고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이 한 번의 죄로 르우벤은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한 번의 죄로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던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음란의 죄는 우리 인생을, 우리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르우벤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내가 아무리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았어도, 내가 아무리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해도 내 안에 있는 정욕을 통제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으로 인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우리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르우벤과 같은 사례들을 얼마나 자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목회를 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목회자가 르우벤처럼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던 사역자가 말입니다. 목회자만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르우벤처럼 넘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로 인하여 일평생 쌓아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들은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여전히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내 감정대로 내 정욕대로 살고 싶은 방탕의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빠지면 어느 누구도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정욕의 소용돌이, 이 방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1.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르우벤처럼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르우벤의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의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르우벤처럼 우리도 한 순간에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정욕의 소용돌이 근처에는 아예 가지도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셉입니다.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과 동침하자고 날마다 요셉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39:10) 요셉은 자신 안에 있는 정욕을 알았습니다. 이 소용돌이에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용돌이 근처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여인이 요셉의 옷을 붙잡고 자신과 동침하자고 합니다. 마귀가 이 여인을 통해 요셉을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도록 공격하는 것입니다.
정욕이 우리를 삼키려고 할 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단 빠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깨어지고 완전히 망한 후에야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요셉은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도망갑니다. 정욕이 일어납니까? 내 감정대로 기분대로 하고 싶습니까? 그 사람에게서, 그 상황에서, 그 장소에서 속히 도망가십시오.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은, 우리도 르우벤처럼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며, 또한 르우벤에게 일어난 결과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그로 인하여 장자의 사명과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순간의 육신의 쾌락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입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르우벤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잠언은 음녀에 빠지지 말 것을 계속해서 경고하면서 음녀에게 빠진 자가 결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7:25,26)
음녀는 성적으로 유혹하는 여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음녀, 마귀에게 사로잡혀 우리를 넘어뜨리고 작정하며 달려드는 음녀를 만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 음녀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르우벤처럼 무너집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음탕만 음녀이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 기분대로 살고 싶은 육신의 정욕도 음녀요,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안목의 정욕도 음녀요, 나를 높이고 나를 자랑하고 나의 의를 내세우는 이생의 자랑도 음녀입니다. 음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2.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안에 정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습니다. 늘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정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르우벤처럼 넘어진 사역자들이 왜 이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모르겠습니까? 알지요. 알아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런데 왜 알면서도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집니까? 정욕은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내 안에 여전히 정욕이 있고, 탐심이 있는데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후나 정욕과 탐심은 그대로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이 우리를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더 이상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자유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욕과 탐심의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정욕과 탐심의 어둠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빛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욕과 탐심의 어둠이 떠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정욕과 탐심이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행동으로 음행의 죄를 짓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보혈이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정욕과 탐심이 떠나갑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유혹이 강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교리로만 알고 있어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유혹의 순간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승리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어떤 유혹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언제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유혹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때입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동침하자고 요셉의 옷을 잡았던 날도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보는 눈이 있으면 그런 죄를 짓지 못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없으니 동침하자고 유혹할 때 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이 큰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셉과만 함께 계셨고 르우벤과는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요셉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르우벤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유혹의 강도를 보면 요셉이 받았던 유혹이 훨씬 더 큽니다. 요셉은 여자가 동침하자고 붙잡았습니다. 그것도 날마다 말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주인의 아내가 말입니다.
반면 야곱의 첩 빌하가 르우벤에게 동침하자고 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서모라 할지라도 엄연히 빌하는 아버지의 아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동침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도 르우벤은 음탕의 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유혹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바라보지 않느냐, 이 한 가지의 차이입니다.
르우벤과 같은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끊지 못하는 죄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분이 있습니까? 내 인생만 아니라 가정에도, 교회생활에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무너지는 죄가 있습니까? 이렇게 죄에 붙잡혀 살다가는 멸망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죄는 어쩔 수 없나보다, 죽어도 끊을 수 없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정욕과 탐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죄도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죄의 유혹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르우벤처럼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고 승리합니다.
3.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야곱의 열 두 아들들 가운데 왜 르우벤이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져서 아버지 야곱의 침상에 올라가는 악한 죄를 저질렀을까요? 르우벤이 다른 아들들보다 더욱 음탕한 사람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이와 같은 죄를 지었던 이유는 그가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뒤를 이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만 아니라 야곱의 모든 가족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빌하는 정욕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다가오는 르우벤을 물리치지 못했을까요? 서모라도 엄연히 어머니인데 말입니다. 르우벤이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야곱은 이미 100세를 훨씬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지는 해였고, 르우벤은 떠오르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빌하는 르우벤의 악행에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우벤이 장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서모와 동침하는 죄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르우벤은 자신이 마치 가문의 족장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르우벤은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주석집은 이 구절에 대해서 ‘르우벤이 장자로서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합니다. 르우벤은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품위와 인격이 있어도 정욕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라고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가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도 없는 죄를 짓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탁월한 품위와 인격 뒤에 숨어있는 자신의 죄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을 보았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은 그런 죄성을 절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탁월한 품위와 인격으로 얼마든지 정욕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갑니다.
사역자들이 넘어지는 것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신실하게 사역합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큰 부흥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높아집니다.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우습게 보입니다. 자신은 절대로 그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를 잘하는 것인데, 마치 자신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대단한 사역을 하는 것인데, 성령의 능력으로 큰 부흥을 경험하는 것인데, 마치 자신이 큰 능력의 사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신의 인격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순간에 정욕의 죄를 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입니다. 그래서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르우벤처럼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장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조심,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성령충만하고, 믿음이 강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한 순간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르우벤을 향한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르우벤은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장자의 사명도 장자의 축복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르우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이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징계하셨습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은 르우벤에게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라고 예언합니다. 르우벤이 장자의 지위와 특권과 축복을 잃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더 이상 형제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들의 존경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야곱의 유산도 두 배로 받을 수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 저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만약 르우벤이 저주를 받았다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집에서, 신앙공동체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르우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르우벤을 낮추셨습니다. 르우벤은 더 이상 장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머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이전처럼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가는 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르우벤의 장자의 축복을 빼앗으셨습니다. 두 배의 몫은 요셉이 받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더 이상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르우벤도 다른 형제들처럼 한 몫을 받습니다. 르우벤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장차의 축복은 빼앗겼지만 야곱의 유산을 물려받는 아들의 자리에서는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르우벤은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르우벤을 낮추신 것은 르우벤을 향한 사랑의 징계요, 동시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는 르우벤의 복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르우벤을 탁월하지 못하게 하시고 르우벤의 축복을 빼앗아 가신 것은 르우벤으로 하여금 다른 형제들과 함께 믿음의 기업을 물려받게 하시려는, 르우벤으로 하여금 영원한 구원의 복을 물려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르우벤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르우벤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져서 정욕의 소용돌이 가까이 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살리시려고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가진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교만한데도 계속 높아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 순간에 망합니다. 영원히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절대로 우리를 사망에 넘겨주지 않으시는, 우리를 마귀에게 넘겨주지 않으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의 기업만큼은 지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고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겼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셔서 정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고 낮추셔서 회개하고 정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셔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셔서 진짜 복, 구원의 축복만큼은 지켜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낮아질 때, 연약해 질 때, 외로워질 때, 예수님 없이는 살 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며, 우리의 유일한 기쁨과 평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게 됩니다. 그래서 징계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거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져가시거든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겸손하게 하셔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오직 예수님만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직 예수님으로만 충만해집니다. 낮아져도,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