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시와 삶이 하나가 된 자연의 철학자가 되다
자연의 철학자 유승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하늘에서 멧돼지가 떨어졌다』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과 시와 삶이 하나가 되는 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이 시집의 표제작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승도 시인은 강원도 영월 만경대산에서 자급자족의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친자연적인 시를 써왔다. 이 시집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자연과 시와 삶이 하나가 된 철학자의 사유가 빛난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사니 좋겠네/서울도 자연인데 뭐/그런가?/사람이 자연인데, 그들이 만든 도시가 자연이 아닐 리가 없잖아//친구는 전화를 급히 끊었다 바쁜 모양이다 호랑지빠귀는 동산에 해가 올라 숲을 환하게 만들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저 새도 바쁘구나
―「서울도 자연이다」 전문
문득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사니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 시인은 "서울도 자연인데", "사람이 자연인데, 그들이 만든 도시가 자연이 아닐 리가 없잖아" 라고 답한다. 인간 중심의 사고의 경계를 지우려는 이 시집의 의도가 짧은 문답에서 드러난다.
산이 구불구불 맥을 이뤄 위로 아래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꿈틀꿈틀 거대한 벌레가 기어가는 모습이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쉼 없이 나아가는 산이 부럽기도 하다/사람들이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어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도 산이 부러워서일 거다/사람은 산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스승으로 받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스스로 산이 되기도 한다/산은 가만히 있기에 되지 못할 게 없다
―「산을 보면서」 전문
"사람은 산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산을 "스승으로 받들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산이 되기도 한다"며 사람과 산 사이의 경계를 지운다. 그리고 산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온몸으로 경계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간다. 산은 때로 “친구”나 “스승”의 구체적인 의미와 결부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산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되지 못할 게 없”는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
얘가 부처여, 자기 몸을 내놓아 우리가 거하게 먹고 마시도록 해주니
그렇긴 그려,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게 쉬운 일인감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친구 다섯이 모여 깊어가는 밤을 술잔에 따르는데
우지직 우지지직, 계곡의 물소리를 죽이며 보이지 않는 소리가 다가온다
아이구, 윗집 옥수수는 오늘로 다 먹었구만
소리가 보통이 아닌데, 바위만 한 놈이 분명해
―「하늘에서 멧돼지가 떨어졌다」 부분
멧돼지를 잡아 “거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다른 멧돼지가 농작물을 다 망치고 있는 현장에서 “아무도 멧돼지를 쫓으려하지 않”는 것 역시 다른 한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멧돼지가 “엄니가 나를 살펴준 거보다 더 살뜰히” 새끼들을 대하는 모성이나, 인간의 공격에 맞서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하는 “영리”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통해 “친구 다섯”이 나누는 이야기의 핵심은 아예 멧돼지의 행위가 차지하게 된다. 멧돼지를 안주로 삼고 있던 술자리에서 말이다. 이 아이러니함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멧돼지와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이다. 즉 자연은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에 유승도 시인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인위를 최대한 배척면서도 인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위를 배척한다’는 말은 자연을 밀어냈던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비탈밭과 하늘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았다”고 시인이 토로하듯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자연의 철학자로 거듭나는 인간의 참모습을 이 시집은 잘 보여준다.
어젠 동토의 바람이 내려오더니,
앞산을 가리며 눈이 내린다 눈을 처음 보는 칠면조는 우리 안을 오락가락 횃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껄꾸두 껄꾸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낸다 작년에 겨울을 맛본 검은 고양이는 눈을 맞으며 풀숲에 앉아 함박눈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올해는 첫눈이 눈답게 내리는구나
제대한 민간인 아들을 보며 툭 한마디 건넨다
그러게요
싱겁게 대꾸를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읍내에 나간 아내를 생각한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야 할 텐데
아내는 차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빈 밭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눈은 평등하다 온 누리를 더도 덜도 없이 덮는다 천지신명께 빌지 않아도 다 덮는다 하얗게,
죄도 위아래도 권력도 돈도 원래 없는 것이다
―「첫눈이 온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