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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의 작가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지은 시골 성당 대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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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의 대화 성당. 작은 시골 성당인 이곳은‘예술의 전당’과 진배없다. 성당 지붕의 십자가는 물론, 성수대와 마리아상 등 성당 안팎의 모든 성물(聖物)들이 작가의 작품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도예가가 직접 굽고 쪼갠 분청 조각으로 모자이크한 벽면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 다른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 내부를 오묘한 빛으로 감싼다. 본당 신부와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지었다는 이야기는 이 모든 것들을 더욱 성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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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가 모자이크 한 분청 벽화, 서양 화가의 스테인드 글라스, 조각가가 만든 십자가 등이 있는 성당 내부. 성당이라는 성스러운 단어에 예술이라는 경외심이 보태진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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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과 밑그림 작업에만 5개월이 걸리고, 작품을 완성하는 데 1년여의 공을 들인 성당 내부의 도벽(塗壁). 도예가 변승훈 씨의 작품으로 그의 작업실 안성에서 대화를 오가며 2천 3백 장의 도판을 굽고 그것을 다시 쪼개어 모자이크하는 수고가 빚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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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성당의 황인찬 신부(세례명 베네딕또). 그의 표현대로라면 ‘무식한 용기’로 성당 건립을 추진했다. 팬 플루트에도 일가견이 있는 멋쟁이로 가끔씩 미사 때 연주를 선보여 할아버지, 할머니 등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다. | |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 사실적이고 서정적인 문체가 아름답기 그지 없었던 청소년 필독서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을 읽어 보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 장돌뱅이 허생원이 봉평장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벼르던 ‘대화장’을 기억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고, 동대문 밖에서 가장 컸다는 우(牛)시장이 설 정도로 번화했던 강원도 대화는 세월이 지나고 고속도로가 이곳을 가로지르면서 그저 작은 시골 마을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이곳이 얼마 전부터 타지(他地)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유명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시골 성당.
신자가 2백여 명도 채 되지 않는‘대화 성당’은 1931년에 건립, 무려 6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처음 이곳은 본당이었으나 차츰 지역이 침체됨에 따라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 30여 년 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 당시 성당의 모습 역시, 성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자들이 10여 년 전부터 나물과 옥수수 따위를 팔아 성당 건립 모금에 나서기도 했지만, 턱없이 부족함에 실망스런 마음을 챙겨 하나 둘 성당을 떠나게 되었다.
96년, 황인찬 신부(세례명 베네딕또)가 이곳으로 부임해왔을 당시 역시 상황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창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낡은 성당과 ‘이번 신부님도 성당 짓는 재주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신자들의 한숨이었다. 당시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황 신부는 이들의 낙담에 오히려 ‘무식한 용기’를 내었다. 97년 4월, 무작정 기공식을 하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성당을 돌며 모금강론을 벌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왜 고통은 착한 이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인지…. IMF라는 천재지변은 그들을 더욱 지치게 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 유세 때 그러했던 것처럼, 힘겨울수록 황 신부의 모금 강론은 뜨거워졌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는 팬 플루트를 불어 가며 새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호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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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편에 마련된 고해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 역시 분청으로 모자이크가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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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와 독서대 모두 조각가 한진섭 씨의 작품. 모두 화강석으로 만든 것으로 성 미술의 고유한 엄격함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딱딱함을 피하기 위해 돌의 모서리를 둥글렸다. | |
누구보다 성당 건립을 열망했던 대화면 신자들의 노력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조금씩 벽돌의 키를 높일 수 있었다. 신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뜻’, 뭇사람들에게는 ‘행운’으로 불릴 만한 일이 생겼다. 황 신부와 2년 전 유럽 문화 탐방 여행으로 인연을 맺었던 조각가 한진섭 씨가 우연히 서울 종로 성당에서 모금강론을 듣고 기꺼이 자신의 작품으로 성당 건립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순동 6백 킬로그램의 십자가는 물론 제대, 독서대, 성수대 등 성당 내부의 성물(聖物)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가 성당 건립에 참여하면서 황 신부와 대화 주민들의 바람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한진섭 씨가 평소 지인이었던 도예가 변승훈 씨에게 ‘함께 해보자’며 권유한 것이 성당 내부 벽면 전체를 도자기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이루는, 그 자체가 작품인 성당을 완성하게 것이다. 1년여의 시간 동안 변승훈 씨는 그의 작업실인 경기도 안성과 강원도 대화를 오가며 가로 세로 45×25센티미터 크기의 도판 2천3백 장을 가마에 굽고, 그것을 다시 깨서 벽에 붙이는 작업을 해야 했다. 벽 전체를 작품으로 도벽하는 작업을 마무리 하는 3개월 간은 거의 모든 신도들이 함께 참여해 동네 잔치를 연상케 했다. 덕분에 사방이 분청 모자이크로 덮인, 국내는 물론 세계 어느 성당에서도 찾기 힘든 귀한 성전(聖殿)이 마련되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변승훈 씨는 예술가로서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이루기 힘든 대작을 마무리하면서 공교롭게도 아들 쌍둥이를 첫 아이로 얻게 되어 신부님을 비롯하여 모든 마을 신자들의 축복을 받는 행운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한진섭 씨의 조각, 변승훈 씨의 벽화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데는 또 다른 한 명의 작가의 몫이 컸다. 바로 서양화가 김남용 씨. 성당 건축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통해 손끝으로 하나하나 이어 붙인 모자이크 도벽(塗壁)과 성전을 마련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귀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성물(聖物)들이 더욱 성스러운 빛을 발하도록 했다.
98년 12월, 신자들이 마음을 잃고 하나 둘 떠나갔던 낡디 낡은 대화 성당은 3인 작가의 대작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문을 열었다. 성당이 새로 지어지고 나자, 하나 둘 떠났던 신자들이 다시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성당의 아름다움이 어느새 소문을 만들어 일요 미사 때는 이곳 사람 이외에 외지 사람들로 붐비곤 한다. 낡은 성당이 새 성당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신자 한 사람은 그 감회를 “왠지 부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는 순박한 말로 대신하고 있다.
지난 11월 10일, 오전 10시. 대화 성당에서 수요 미사가 열렸다. 이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거의 인근에 사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복사(服事, 가톨릭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시종) 역시 환갑을 훌쩍 넘은 할아버지다. 농삿일로 까맣고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들이 손수건에 곱게 싸온 미사보를 쓰자 여느 신부 못지않게 곱고 단정해진다. 황인찬 신부의 강론 주제는 ‘작은 행복’. ‘제 아무리 시골 이장이라도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편하고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쉽고 간단한 예가 강론 중간에 들려온다. ‘시골 이장’을 행복한 사람 대표로 내세우는 신부님의 말씀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귀에 담는다. 귀한 마음으로 지어진 작은 시골 성당, 대화 성당의 모습이다. |
대화 성당 가는 길
천주교 원주교구 대화 성당은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에 있다. 대화 성당에는 ‘피정의 집’이라는 숙소가 있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작은 부엌이 함께 마련되어 있어 직접 취사가 가능하다. 황인찬 신부는 성당을 ‘관광’하기 위해 오는 이보다는 몸과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한 이들을 더욱 환영한다. 물론 신자가 아니라도 대환영이다. 인근에는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배경이 된 봉평이 있어 가을이면 ‘산허리가 온통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또한 휴양림으로 유명한 가리왕산과 기암괴석의 절경을 맛볼 수 있는 금당 계곡 역시 볼 거리 중 하나. 영동 고속도로에서 장평 인터체인지를 통과해서 평창 방면으로 10분 정도 지나면 ‘진부·봉평, 대화·평창’ 갈림길이 나온다. 이 때 대화 방면으로 가다보면 대화면을 만나게 되고 중앙로로 들어오면 농협을 지나 ‘대화 성당’을 찾을 수 있다. 문의 0374-334-2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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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김남용 씨의 스테인드 글라스. 성당 내부의 성스러움을 더욱 오묘한 빛으로 비추고 있다. |
종탑 위 브론즈 소재의 십자가는 한진섭씨의 작품으로 4명의 복음저자가 서로 어우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
모자이크 도벽과 화강암의 성수대가 현관 앞에 마련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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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ujshim@design.co.kr">심의주 기자 | 사진 neurer@netsgo.com">김동욱 객원기자 행복이가득한집 1999년 12월호
성전에서 피어난 예술 - 고종희(마리아,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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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성당의 신부님이 서울 종로 성당에서 들려주었던 색소폰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1997년 봄으로 기억된다. 성단 신축금을 모금하기 위해 종로 성당에 왔던 대화의 황인찬 신부는 신자들에게 시골 성당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한 후, 도와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영화 주제곡 "태양은 가득히"를 연주하였다. 구슬픈 음악 소리가 교회 안에 퍼지자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많았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자 했던 모금강론은 그렇게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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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미술품이 주인공이 된 성당
 대화성당에 오면 아름다운 성미술과 만날 수 있다. 대화 성당은 겉으로 보아서는 아담한 양옥집을 연상케 하는 붉은 벽돌의 작은 성당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그 독특한 분위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성당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붕 위에 있는 대형 십자가이다. 브론즈로 만들어진 이 십자가는 4명의 복음사가가 모여서 십자가를 이루고 있는 형상이다. 그 독특한 형태는 한 번 본 사람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며, 대화 성당이 갖고 있는 예술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수대가 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인물이 성수반을 받치고 있는 재미있는 형상으로 이 성당이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교회 안에 들어서면 사방이 탁 트인 공간과 함께 아름다운 도벽이 눈에 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우리가 성정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해준다. 뒷벽에는 작가 특유의 걸죽한 느낌을 살린 <골고타 언덕의 세 십자가>가 있다. 이 도벽은 성당 전체의 성미술을 모두 포용하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해 2200여 장의 분청사판을 구워낸 후 그것을 다시 깨서 한 조각 한 조각 한 조각 벽에 붙이는 고된 작업을 해냈다. 단일 공간으로는 국내 최대이며 세계에서도 이 같은 규모의 도벽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벽 사이 사이에는 색유리화가 있다. <온 누리에 가득한 성령>을 표현하였으며 세상의 빛을 정화시주는 듯 차분한 색상과 빛을 통해 성당의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대화 성당의 색유리는 전체 공간과의 조화를 위해 화려한 색상을 자제하였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자신을 차분히 드러내는 고도의 절제미를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벽을 따라 걷노라면 십자가의 길이 있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된다. 검은 대리석이 회색의 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은 전체의 분위기를 생각한 작가의 안목의 덕이라 하겠다. 발검음을 전면의 벽 쪽으로 옮기면 제대와 독경대 그리고 정갈하게 놓인 감실이 있다. 그 모양이 여느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지만 마치 그 자리를 위해 존재하는 듯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마지막으로 하얀 벽과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검은 대리석의 십자고상이 있다.죽음의 희생을 통해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이 사건에서 작가는 죽음을 초월한 평온한 모습의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이곳을 찾은 모든 이에게 평화를 안겨주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이들 성미술을 보고 있노라면 바깥 세계에서의 혼란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고, 교회의 신비한 분위기에 잠기면서 우리가 어느새 주님의 세계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어진다. 성당이 예술가들의 기예와 혼을 빌어 만들어졌을 때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닐 수 있으며 성당 본연의 종교적 기능 또한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음을 대화 성당은 보여주고 있다. 대화성당이 비록 강원도 산골의 시골 동네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처럼 아름답게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신부님과 열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봉헌한 신자들, 그리고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을 하느님께 돌리고자 했던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의 뜻을 옳게 받아주신 하느님께서는 기적처럼 이 작은 성당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 참여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표현하면서도 상대의 작품을 배려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교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뛰어난 예술적 경지를 유지하면서도 성전 본래의 기도하는 공간과 전례 공간으로서의 종교적 기능을 훌륭히 완수한 아름다운 성전이 지어진 것이다.
대화성당의 성 미술을 이끌어 나간 작가는 모두 세 사람으로 도예가 변승훈, 화가 김남용 그리고 조각가 한진섭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 중 제일 먼저 성 미술품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조각가 한진섭이다. 그는 석조(石彫)를 주로 하는 조각가로 대리석의 본산지인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10년간 활동한 후 1990년에 귀국하였다. 한진섭은 최근 몇 년 전부터 성당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에 대화 신부님의 인간적인 솔직함과 성당을 짓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 감동되어 성 미술품 제작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이 직접 제대, 감실, 독서대, 십자고상,14처, 성수대, 마리아상 그리고 종탑 위에 대형 십자가를 제작하면서 이 교회의 미술을 기획하였다.
한진섭은 도예가 변승훈을 신부님께 소개하였다. 변승훈은 애초에는 벽의 일부분만을 도자기로 처리할 생각이었으나 현장을 보고 난 후, 내부 전체를 도벽으로 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대화성당의 벽도 평범한 시멘트 벽 신세를 면치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변승훈의 출현으로 대화성당은 벽면 전체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분청 모자이크 벽화로 제작되었다. 이 성당에 들어와서 받게 되는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바로 이 도벽(陶璧)덕분이다. 그의 도벽은 성단 내부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다른 성 미술품을 모두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뒷벽에서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표현하였고, 앞벽과 옆벽은 다른 성 미술품을 수용하는 배경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변승훈과 한진섭의 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 군데 해결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바로 창문의 유리화였다. 한진섭과 이웃에서 작업하고 있던 화가 김남용은 그 무렵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고, 유리화가 필요한 것을 알고 선뜻 제작을 허락하였다. 파리에서 10여 년 간 작품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앞의 두 작가가 이루어 놓은 성당의 분위기에 마침표를 찍 듯이, 그는 전체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끌어내는 유리화를 완성하였다. 대화성당에서 받게되는 고요함과 정겨움, 그리고 그곳이 세속의 공간이 아닌 하느님의 집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세 작가들이 빚어낸 조화 덕분이다. 이들이 헌신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참여를 보면서 대화 성당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복된 성전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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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이들 세 작가는 이 성당 저 성당을 찾아다니며 이른바 '구걸강론'을 하면서 건축기금을 어렵게 마련하고 있던 본당신부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작품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좋은 성당을 만든다는 일념만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바람 나게 일했다. 대화의 신부님은 비록 미술에 대한 조예는 깊지 않았으나 성당 건축에서 미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작가들이 마음껏 작업할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를 주었고, 전례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작가들에게 이같은 분위기는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종교미술은 순수작품과는 다르기 때문에 작가들은 이를 제작하기에 앞서 상당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종교 미술은 감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보다 가까이 에서 느끼게 하고, 전례상의 기능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작품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을 만든다면 곤란할 것이고, 그렇다고 대중의 눈높이에만 맞추다보면 작품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그 적절한 선은 예술가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본다. 현재 우리 나라는 교회에서 성 미술이 자리를 잡아가는 초창기 단계임을 고려하여 작가들은 어느 정도 신자들이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수준을 지키는 선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건축주인 사제는 미술가를 선정할 때는 신중을 기하되 선정된 작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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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미술의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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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 나라는 성당이 수적으로 대단히 증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1000개 이상의 성당이 있으며, 수도원과 공소를 합치면 2500개가 넘는다고 한다.(주. 김종수, 한국교회의 성미술, 혜화동 성당 도록 부록편, 19쪽, 1996). 지금 이 순간에도 신축 중이거나 신축 예정 중인 성당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양적 팽창에 따라 성당건축의 질적 향상이 요구되고 있다. 이에 우리 나라 성 미술의 문제점 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작가들 쪽에서는 한국 가톨릭 미술가 협회(회장 최종태 교수)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중이며 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작가를 초청하여 작품을 의뢰하고자 하여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있는 작가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교회가 미술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고, 시작이 반이라고, 발걸음을 내딛었으 니 앞으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
과거 유럽의 경우를 보면 교회는 미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은 교회를 위해 일했고, 교회에서 자신들의 최고 걸작을 탄생시켰다.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와 미술가는 각기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더 이상 미술가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으며, 미술가들도 교회를 떠나 화랑이나 미술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미술가들을 필요로 한다. 성당에서 작가들이 맡아야 할 미술품으로 제대, 감실, 독서대, 십자고상, 14처, 성수대, 세례대, 마리아 상 등이 있고, 그밖에도 색유리, 청동문 등 미술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많이 있다. 미술가가 떠난 교회에는 예술성이 결여된 상품이 들어서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성스럽고 아름다워야 할 성 미술품이 싸구려 복제품이나 수입품으로 대체 될 우려가 있다. 신부님들은 작가들 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후원해야 한다. 다만 작가들은 교회미술을 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경제적 이익을 떠나 순수 신앙심과 봉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미술품은 신자들의 미적 수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교회에서 좋은 작품을 본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생소한 느낌을 받더라도 예술품이 주는 감동에 곧 익숙해질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일반적으로 집 안에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모셔두고 있는데, 본당 성 미술의 수준이 신자의 가정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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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성당의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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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건축가인 르 코르뷔제가 설계한 프랑스의 '롱샹 성당'은 그 형태가 기존 성당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배를 뒤집어 놓은 듯한 외관의 독창성 못지 않게 내부도 세세한 부분까지 건축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두꺼운 벽에 불규칙적으로 뚫린 색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마치 신의 존재가 빛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듯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그 안에 설치된 성 미술품도 모두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현대교회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위스의 '무티에' 성당은 건축과 성 미술을 위해 15년이라는 긴 준비과정을 거친 후 지어졌다. 성당이 완성된 후에 미술품을 구입하거나 주문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달리 본당신부, 건축가 그리고 미술가가 오랜 세월 논의를 거친 후 탄생한 성당이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당의 내부는 신자들이 효율적으로 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전례상으로 세심하게 고려되었고, 제대, 독서대, 세례대를 비롯한 성물들도 꼭 그 자리에 있기 위해 탄생된 것처럼 적재적소에 있었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있는 몇몇 성당들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의 건축양식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듯 하였고, 자신들의 전통미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유럽인의 지혜가 돋보였다. 이들 성당들은 하느님의 집이 어떻게 꾸며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다. 놀라운 점은 이 성당들이 세계적인 거장에 의해 설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적한 시골이나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모두가 독창성이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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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피어난 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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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름다운 성당들을 방문하면서 우리 나라에도 그같은 성당들이 지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었다. 의외로 빨리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화려함은 없지만 자연스럽고 소박한 우리만의 정서가 느껴지는 대화 성당은 위에서 소개한 세계적인 성당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은 미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더욱이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대화 성당은 미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도 성공적이라
고 생각한다. 성당은 미술관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미술품이 있어도 종교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의미를 잃게 된다. 성당의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의 창출이다. 대화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이는 미술과 종교가 결합한 결과이다. 설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대화 성당이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미술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본당신부와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했던 작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려한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강원도 대화는 지금까지는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대화 성당으로 더욱 유명해질 것이다. 이미 이 성당의 아름다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고, 침체되었던 공동체에 예비신자가 늘어나는 등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삶에 지친 도시인들은 주말에 가족와 함께 이곳에 내려와 하루쯤 쉬면서 삶을 되돌아 본다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지은 성당이 가장 값지게 빛나는 기적을 대화 성당을 통해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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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462호 1998년 1월 11일(일요일) |
특집 |
낭랑한 기도소리에 어둠은 걷히고... |
새벽을 여는 사람들 / 1. 교회의 새벽 ---황인찬 신부 (원주교구 대화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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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교회의 아침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시작된다. 새벽 미사를 준비하는 주임신부. 오전 4시부터 일과를 시작하는 봉쇄 수도원의 수녀들,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교회운영 아동복지시설 종사자들. 이들이 있기에 교회의 새벽은 항상 생기가 넘친다. 활기찬 새벽을 여는 교회의 모습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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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가산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대화땅은 겨울밤의 무서운 기세에 눌린 듯 아직 암흑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긴긴 겨울밤의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인 새벽 5시30분. 대화읍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곳, 허름한 13평 단독 주택에 불이 켜진다. 원주교구 대화본당 주임 황인찬(40. 베네딕도)신부는 일어나자 마자 새로운 아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아직 잠에서 덜깬 듯한 황 신부지만 그의 얼굴은 금방 세수를 하고 난 듯 맑은 인상이다. 그런 그에게 언제부터인지 '부시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피부가 까맣고 키가 작아 본당 신자들이 붙여준 별명이지만 오히려 그 별명은 친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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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본당에는 식복사도, 사무장도, 수녀도 없다. 사제관도 매달 20만원씩 월세를 꼬박꼬박 내야 하는 단독주택이다. 그래서 황 신부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황 신부는 우선 지난밤 간식으로 먹은 라면 그릇을 씻는 것부터 시작했다. 쌀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씻어 전기밥솥에 올려놓은 황 신부는 반찬들을 점검하고 이내 밖으로 나섰다. 반찬 걱정은 하지 않은지 오래다. 신자들이 하나둘 들고온 반찬으로 냉장고가 항상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구석에 쌓인 빨래가 눈길을 잡아끌지만 세탁은 오후로 미루고 그냥 현관을 나섰다.
비닐하우스 성당에 나무 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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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새벽,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황인찬 신부, 식복사가 없는 탓에 아침식사 준비는 항상 그의 몫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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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복사도, 사무장도, 수도자도 없이 홀로 사목
비닐하우스 성당서 성무일도 바치며 하루 시작
노인층 신자가 70% --- 신부보다 아들역할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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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합니다." 황 신부는 노인들이 아파 병원에 입원할 때 일일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황 신부는 2년 전 대화성당을 신축하겠다는, 다소는 무모하게 보이는 일에 뛰어들었다. 4억5천여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성당 |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혼자 성무일도 아침기도를 하고 있는 황인찬 신부.
을 느끼게 한다.
앞치마 두르고 아침식사 준비
황 신부는 주방으로 가서 앞치마를 둘렀다. 식복사가 없는 탓에 아침식사 준비는 항상 그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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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신부의 새벽은 산책으로 시작된다. 때로는 조깅을 하며 때론 걸으며 이뤄지는 아침 산책은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황 신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돌아오는 길에 신축 성당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제관으로 오기 전에 신자집에 들러 아침식사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사제관으로 돌아와 수단을 입은 그는 바로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은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비닐하우스. 비닐로 만들어진 성당문을 열고 들어간 황 신부는 전깃불을 밝히고 성당내 나무난로에 불을 붙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영향으로 기름값이 오르자 황 신부는 성당내 난방을 기름에서 나무로 바꾸었다. 매번 연통 틈새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지만 오히려 그것이 황 신부에게는 더 운치가 있어 보인다. 아직 냉기가 도는 성당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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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황 신부는 성무일도를 펼쳤다. 비닐하우스 성당 안은 황 신부의 목소리만 울렸다. 아침 기도를 마친 황 신부가 하는 일은 평일 미사 준비. 신자들이 자청해 미사준비를 하지만 세부적인 것은 역시 황 신부의 손이 필요하다. 평일미사 참례 신자 수는 평균 2~5명. 주일미사 헌금액이 10여만원에 불과한 대화본당의 1년 예산은 2천만원. 관할 구역내 총 인구수는 8천여명이고 그중 신자는 2백여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60대 이상 노인층이 전체 신자의 70%를 차지하는 초고령 본당이다. 그래서인지 황 신부는 어느덧 노인사목 전문가가 됐다. "사실 대화본당같이 시골본당의 경우에는 신부역할보다 아들역할이 중요합니다. 노년에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는 노인들이 편안히 삶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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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현재 60%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주일미사 헌금액이 10여만원에 불과한 실정에서 성당 신축은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저런 걱정들이 미사 중에도 내내 황 신부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2년전부터 성전 신축공사 추진
미사를 마치고 사제고나으로 돌아온 황 신부는 그제서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밥 앞에 앉았다. 반찬은 이것저것을 골라 대충 밥상 위에 올렸다. 딸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사제관 안을 울리고---. 밖은 어느덧 한줄기 빛이 새벽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의 새벽은 이렇게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0374)34-2123, 대화본당. [평창=우광호 기자] |
18 2000년 3월 12일(일요일) |
본당 |
"성당, 이보다 멋질순 없다" |
성당전체가 예술품인 원주 대화성당 신축과정서 신자 예술인들 헌신 봉사 본당측 피정의집 마련 신자들에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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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대화장'으로 친숙한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이곳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시골본당인 원주교구 대화본당(주임=황인찬 신부)이 '작은 예술의 전당'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화본당은 1931년 본당으로 설정된 후 65년부터 30년간 공소로 유지돼 오다 93년 본당으로 승격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 이후 새성전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여러 미술가들이 작품을 봉헌했고 개개 성미술품의 완성도와 함께 이들이 빚어내는 성스런 조화가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잡지와 방송에 오르내리게 됐다. 교회내 중견조각가 한진섭씨와 대화본당 주임 황인찬 신부의 우연한 만남으로 성당과 성미술의 아름다운 조우는 시작됐다. 본당설립기금 마련차 서울에 올라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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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부의 강론을 들은 한씨가 제대, 감실, 독서대, 성수대, 십자고상, 14처, 종탑위 십자가 등 성물을 제작, 봉헌하기로 결심한 것. 이후 한씨는 동료 도예가 변승훈씨에게 성당 내부를 도벽으로 장식하도록 부탁했고 변씨는 이를 수락, 도자기 모자이크로 한국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벽면을 만들었다. 이어 김남용씨가 은은한 느낌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성당의 분위기를 마무리해 '예술의 전당'인 대화본당이 이루어졌다. 이들 세 작가의 작품값을 따지자면 성전건축비를 훨씬 능가할 정도라고. 황인찬 주임신부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진정한 예술은 문외한의 마음까지 사로잡는가 보다"며 "성예술에 전문적인 안목이 없는 사람들도 '성전건축과 성예술이 이토록 조화를 이룬 성당을 보지 못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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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전체가 미술품으로 이루어진 대화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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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칭찬한다"고 말했다. 황신부는 자연 속에서 잠시 쉬며 마음 속 영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이곳을 제공하기 위해 '작은 꽃 피정의 집'을 성당 한 켠에 마련하기도. 본당 홈페이지를 제작해 젊은이들에게 이곳을 널리 알리는 한편 성당이 지역문화 활성화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황신부의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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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시에서는 조립식 건물로 된 성당을 권유하는 분위기라고 들었어요. 시골에 이런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는 게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됐지만 예술과 종교의 조화로운 만남으로 신앙심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유진 기자> cathy@catholictimes.org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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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인데도 평균 해발고도 6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강원도 평창은 쌀쌀 하기만 했다.
인구 7,000명이 채 안되는 시골마을, 대화면에는 마침 5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대화는 용평과 봉평, 평창, 진부 등과 인접해 있어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요지로 꼽혀온 곳.
특히 각지에서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5일장이 유명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가 밤길을 거닐며 향하던 곳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화장은 예전의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용평과 진부만 해도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인파가 몰리고, 장평도 영동고속도로의 영향으로 점점 커지고 있는데 비해 대화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추억의 명소로 각인될 뿐이다.
장터는 어수선하지만 어쩐지 스산함이 묻어난다.
면소재지를 조금 거닐다보면 거리에서 풍기는 스산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벽돌 건물을 만나게 된다.
네잎 클로버를 닮은 표지에는 ‘대화성당’(주임신부 김기성)이라고 쓰여있다.
기존의 성당과는 사뭇 다른 느낌.
동글동글한 십자가를 연속해 배치한 출입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누가 더 높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나 경쟁이라도 하듯 지은 서구의 성당처럼 뾰족한 첨탑도 없고 거대한 종탑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대화성당은 난쟁이처럼 땅위에 바짝 엎드려있다.
겉보기에는 조그만 시골의 아담한 성당일 뿐이지만, 이곳은 타지의 가톨릭신자는 물론이고 건축가와 건축전공자들이 종종 찾아오는 명소다.
1996년 공사를 시작해 98년 완공된 대화성당의 진가는 내부공간에서 드러난다.
도예가와 조각가, 화가 등 3인이 성당 내부를 꾸미는 데 참여한 결과다.
로비를 지나 미사를 드리는 예배당에 들어서면 박수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회백색 도벽(塗壁)에 입이 벌어진다.
도예가 변승훈씨는 명도와 채도가 다른 2,200여장의 분청사기판을 굽고 이를 다시 조각 조각내 벽에 붙였다.
구상을 하고 밑그림을 그리고, 도자기 조각을 벽에 붙이는 데 1년이 걸렸다.
예배당 뒷부분의 모자이크 벽화는 ‘골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가운데 큰 십자가는 예수를, 좌우의 십자가는 함께 처형된 죄수 2명을 상징한다.
벽화의 주제 자체가 엄숙하고 경건하기도 하거니와, 손바닥보다도 작은 도자기조각을 하나하나 붙인 정성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 이 도자기 모자이크는 변씨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공동작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성싶다.
그의 제자와 대화성당 신자들이 3개월이 넘도록 함께 땀을 흘리며 작업을 했다.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 신자들까지 거들며 아랫부분에 타일을 붙였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윗부분을 맡았다.
보통의 성당이 주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제단의 높이도 신자들이 앉는 좌석의 눈높이에 맞춰 낮게 설치했다.
제단에는 조각가 한진섭씨가 작업·봉헌한 십자고상과 제대, 독경대, 감실이 놓여있는데, 회백색의 도벽과 대비되는 자줏빛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으로 만든 성수대를 비롯한 성물(聖物)에는 동양 특유의 부드러운 선이 살아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사이에 걸린 석조는 ‘14처’로 예수가 처형당하면서부터 부활하기까지의 과정을 14개의 장면으로 묘사한 것.
동양화의 선법과 유사한 몽글몽글한 선이 보통의 성화와는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성당 외부에 세워둔 성모상도 한씨의 작품인데 서양인의 얼굴을 한 성모상 대신 원형으로 깎아 만들어 신자들로부터 ‘100m 미인’으로 불린다.
멀리서 보면 참 예쁜데, 가까이서 보면 눈도, 코도 입도 없기 때문이란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청동으로 만든 브론즈로, 보통 교회의 뾰족한 첨탑과는 사뭇 다르다.
뭉툭하게 마감한 조그만 십자가가 4개가 연결돼있는데 무게만 600㎏이 넘는다.
이 십자가는 신약성서의 4복음서를 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을 상징한다.
서양화가 김남용이 참여한 유리화(스테인드 글라스) 역시 화려하게 채색한 대부분의 성당 유리화와는 거리가 멀다.
도벽과 어울리도록 낮은 채도의 갈색과 청색, 녹색을 사용하고 다각형과 곡선으로 꾸몄다.
화창한 날, 유리화를 통해 쏟아지는 햇빛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성물뿐 아니라 성당이 지어지기까지 사연도 아름답다.
본래 1931년 설립된 대화성당은 이농 등으로 신자가 줄어들어 공소로 전락했다가 93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됐다.
예전에 사용하던 성당건물은 블록으로 지어져 여름이면 비가 새고 난방이 안돼 겨울이면 미사를 보기도 힘들었다.
60세만 해도 젊은 축에 들 정도로 대화성당의 신자들은 대부분 노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150여명의 신자들은 15년 가까이 성당을 짓자고 마음을 먹고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모이는 헌금 10여만원으로는 여름 한철 수리비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96년 부임한 황인찬 신부가 나서서 서울의 성당을 돌며 도움을 호소했고 나이든 신자들은 산나물과 꿀, 메주, 계란 등을 팔아 건축비에 보탰다.
그런가 하면 타지의 신자들도 헌금을 내놓았고 비신자들도 건축기금을 보탰다.
작가들은 성스러운 작업에 재료비만 받고 작업에 참여했다.
여러 사람에게 받은 도움을 조금이나마 보답하자는 취지에서 대화성당은 종교에 관계없이 찾아오는 이들이 편히 묵어갈 수 있도록 ‘작은 꽃 피정의 집’을 개방하고 있다.
어느 작가의 작품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신부와 신자가 한마음으로 지어올린 대화성당.
성스럽고 경건하지만, 편안함이 감도는 대화성당에 가면 누구나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