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1 ~ 445 - 목록과 시....끝) 제401편 -채필녀 - 공 속의 허공 제402편 - 정숙자 - 환향 제403편 -임강빈 - 공일 제404편 - 롱펠로 - 4월의 하루 제405편 - 상희구 - 봄에 관한 어떤 추억 제406편 - 김수영 - 여름 뜰 제407편 - 고영민 - 풋사과 제408푠 - 마광수 - 늙는 것의 서러움 제409편 - 데니즈 두허멜 -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마시고 여왕처럼 앉으세요 제410편 - 한세정 - 울울창창 제411편 - 김이듬 - 모르는 기쁨 제412편 - 이상국 - 쫄딱 제413편 - 문충성 - 빈 무덤―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제414편 - 윤한로 소만(小滿) 제415편 - 조수옥 - 우체통에게 제416편 - 김형영 - 제4과 제417편 - 박소란 - 아아, 제418편 - 박우담 - 물의 결 제419편 - 정다운 - 납작 제420편 - 김록 - 철거 제421편 - 최형태 - 최감독 제422편 - 폴 엘뤼아르 - 연인 제423편 - 김지윤 - 서귀포 오일장에서 제424편 - 김선굉-등대 제425편 - 박의상 - 산에가는이유,의역사 제426편 - 김민자 - 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제427편 - 나희덕 - 벗어놓은 스타킹 제428편 - 이진희 - 탐구생활 제429편 - 사 포 - 내게는 그 분이 제430편 - 박봉우 - 휴전선 제431편 - 김태정 - 월광(月光), 월광(月狂) 제432편 - 박은정 - 합창 시간 제433편 - 최두석 - 안양천 메뚜기 제434편 - 유종인 - 신문 제435편 - 김원옥 - 동막 갯벌 제436편 - 윤고은 - 밤의 아주 긴 테이블 제437편 - 문정영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제438편 - 이가림 -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제439편 - 이문재 - 농담 제440편 - 김남주 - 옛 마을을 지나며 제441편 - 박성준 - 후련한 수련 제442편 - 전봉건 -희망(希望) 제443편 - 문인수 - 만금이 절창이다 제444편 - 박욜래 - 상치꽃 아욱꽃 제445편 - 안주철 - 밥 먹는 풍경 ..........끝.
----------------- 401 공 속의 허공
채필녀(1958∼ )
공이 대문 한쪽에 놓여 있다 저 공, 운동장 한구석에서 주워왔다 그 한구석도 어딘가에서 굴러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무심하게 놓여진 공은 또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은 한 번도 스스로 굴러본 적이 없다 우주가 돌아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엄마의 큰 보폭에 아이가 종종종 발짝을 맞추듯 커다란 톱니에 작은 톱니가 맞물리듯이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구와 공이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 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공은 새처럼 나무처럼 살고 싶어 빈 가죽부대로 버려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의 상처를 본다 제 몸을 터질 듯 솟구쳐 승리에 도취하기도 했던, 함정에 빠져 패배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공의 내면이 궁금하다 공기가, 공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을까 공의 몸이 허공으로 풀어지고 있다 공의 중심이 허공의 중심을 채우고 있다 붉은 살이 서쪽 능선을 넘고 있다 공이 제 몸인 허공을 보고 있다 허공은 언젠가 공의 몸이 되어 굴러가고 또 굴러올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1』(2015년 04월 20)
---------------------- 402 환향
정수자(1957∼ )
속눈썹 좀 떨었으면 세상은 내 편이었을까
울음으로 짝을 안는 귀뚜라미 명기(鳴器)거나 울음으로 국경을 넘던 흉노족의 명적(鳴鏑)이거나 울음으로 젖 물리던 에밀레종 명동(鳴動)이거나 울음으로 산을 옮기는 둔황의 그 비단 명사(鳴砂)거나 아으 방짜의 방짜 울음 같은 구음(口音) 같은 맥놀이만 하염없이 아스라이 그리다가
다 늦어 방향을 수습하네 바람의 행간을 수선하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2』(2015년 04월 22)
--------------------- 403 공일
―임강빈(1931∼ )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누가 찾아올 것 같아 자꾸 밖을 내다본다 우편함에는 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 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 한 점 구름 없이 하늘마저 비어 있다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 반갑다고 연신 아는 체한다 그래그래 알았다 오늘은 완전 공일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3』(2015년 04월 24일)
-------------- 404 4월의 하루
롱펠로(1807∼1882)
씨 뿌리고 거두어들이게 하는 따스한 태양이 다시 돌아와 고요한 숲을 찾으며 들판에 맨 먼저 피는 꽃을 바라보는 즐거움.
숲 사이 빈터에도 가득 찬 밝은 햇살 이제는 폭풍우 몰고 올 검고 짙은 구름도 없는 나는 이 시절을 좋아한다.
눈 녹아 부스러진 흙으로부터 어린 나무들 맘껏 양분을 빨아들여 겨울 추위에 웅크렸던 나무들도 또다시 생기를 얻는다.
상쾌한 숲속엔 부드럽게 지저귀는 새소리 숲 사이 빈터 쏟아지는 햇살에 번쩍이는 새들의 빛나는 날개.
밝은 황혼이 은빛 숲을 빨갛게 물들일 때 초록색 언덕은 그림자를 길게 계곡에 던진다. 밤이 되자 하늘은 푸른 호수 속에 움푹 꺼지고 달도 한쪽 귀퉁이를 물에 담궈 이윽고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검은 바위들은 물속에 거꾸로 떨리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운 나무들도 나란히 서서 물속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4월이여! 가슴에 파고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여!
가을이 찾아와 인생의 황금 열매 떨어지기까지 그대들 멈추지 말아다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4』(2015년 04월 27일)
-------------- 405 봄에 관한 어떤 추억
―상희구(1942∼ )
국민학교 적 소풍날 꽁보리밥에 양념 친 날된장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갔는데 다른 친구들 모두 쌀밥으로 싸왔거니 하고 산모퉁이에 숨어서 점심을 먹었다 이 기억만은 선연한데 그날 그 소풍 간 곳이 어디였는지 그날 어머니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으셨는지 그날 아침밥은 무슨 반찬으로 어느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는지 그날 내가 사자표 가루치약으로 양치질을 했는지 어쨌는지 그날 우리 집 뜨락에 철쭉이 몇 송이나 꽃봉오릴 매달았는지 그날 우리 집 앞을 어떤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갔는지 그날 신문에 무슨 기사가 실렸었는지 그날 또 어머니가 어떤 종류의 눈물을 흘리셨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5』(2015년 04월 29일)
------------------ 406 여름 뜰
―김수영(1921∼1968)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오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이지러진 얼굴로 여름 뜰이여 너의 광대한 손을 본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나리는 여름 뜰을 보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인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있다 그것은 둔한 머리에 움직이지 않는 사념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크레인의 강철보다 더 강한 익어가는 황금빛을 꺾기 위하여 너의 뜰을 달려가는 조고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여름 뜰이여 나는 너에게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노라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 뜰을 흘겨보지 않을 것이다 여름 뜰을 밟아서도 아니 될 것이다 묵연히 묵연히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6』(2015년 05월 01일)
---------------- 407 풋사과
―고영민(1968∼ )
사과가 덜 익었다 덜 익은 것들은 웃음이 많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잘 익고 듬직한 사과가 되렴 풋!
선생님이 말할 땐 웃지 말아요 풋!
누구니?
풋!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7』(2015년 05월 04일)
------------------------ 408
늙는 것의 서러움
―마광수(1951∼ )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길가의 집들이 지나가고 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어렸을 때 물가에 서면 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를 타면 집들은 가만히 있고 나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물가에 서면 나는 가만히 있고 강물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8』(2015년 05월 06일)
---------------- 409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마시고 여왕처럼 앉으세요
―데니즈 두허멜(1961∼ )
―필리핀 어느 대학의 여자 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세상은 여드름투성이 소녀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머리채에 광채를 내는 샴푸를 사라. 머릿결이 직모라면 파마를 해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숨결은 박하 향이 나도록 하고 이는 희고 깨끗이. 손톱은 매니큐어 발라서 반짝이는 진주 열 개로.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웃음 지어라. 특히 기분이 더러울 때. 차를 운전하면서 급회전할 때에는 머리를 숙여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사교춤 출 때 치맛자락을 추켜올릴 수 있지.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교수와 혼인하지 말고 학장하고 해라. 왕하고 혼인하지 백작하고는 하지 마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9』(2015년 05월 08일)
------------------ 410 울울창창
―한세정(1978∼ )
기다려라 관통할 것이다 나를 향해 나는 전진하고 나를 딛고 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손이 없으면 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마다 초록의 힘으로 나는 더욱 무성하게 뿌리 내릴 것이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내가 절망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까지
초록의 목덜미가 선연한 핏줄로 붉어질 때까지 나는 이파리를 움켜쥐고 또 다른 이파리를 향해 울울창창(鬱鬱蒼蒼) 온몸으로 나를 흔들어댈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0』(2015년 05월 011일)
-------------- 411 모르는 기쁨
―김이듬(1969∼ )
해운대 바다야, 아니 바다 아니고 바닷가야. 작은 여자가 자기 머리칼을 한 묶음 손으로 쥔 채 몸을 숙이고 모래밭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찾고 있어. 그녀에게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냐고 물어보았지. 몰라도 된다고 하네. 나는 그녀가 그 백사장에서 썩어서 하얗게 바랜 애인의 유해를 찾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에, 뭐하러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적고 있나, 몰라도 된다고 나는 내게 말하지. 내 생각의 절반 이상은 몰라도 되는 생각, 억지스런 상상. 난 눈을 질끈 감아보지. 보이지, 캄캄한 심해의 눈 없는 물고기처럼 비로소 나는 활발해지지. 죽은 나의 사람들이 지하 언덕에서 지느러미로 춤추며 나를 건드려. 나는 출렁거리지. 돌멩이도 노래하고 저녁도 낄낄거리네. 멈추지 않는 슬픔, 검은 파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 금이 간 찻잔 같은 얼굴로 나는 웃고 있겠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1』(2015년 05월 13일)
------------------------- 412 쫄딱
―이상국(1946∼ )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2』(2015년 05월 15일)
----------------- 413 빈 무덤―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문충성(1938∼ )
댓잎 바람 소리 봉분들 빈 무덤들 만들었네 시신들 찾지 못해
시뻘겋게 미쳐나 제주 하늘 떠돌다 시커멓게 멍든 혼들아!
50년도 더 지나 고작 눈물 무덤들 지어냈으니 와서 보아라!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나라는 어디에 있지? 백의민족은? 우리가 창조해낸 삶, 아! 그 빈 무덤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3』(2015년 05월 18일)
-------------------- 414 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4』(2015년 05월 20일)
------------- 415 우체통에게
―조수옥(1958∼ )
기다림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 몸속에 아직 차오르지 않는 꽃대의 빈 속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바람의 쓸쓸한 안부를 빈 가슴으로 적셔보는 일입니다 무수한 날이 별똥별처럼 떨어질 때 아직 봉인되지 않는 입술은 부르터 바람인 듯 쉬 닫히지 않습니다 직립의 사무침이 한 곳에서 기다림으로 붉게 꽃피울 수 있는 것은 깜깜함이 온통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나요 마음의 모퉁이를 서성이던 날들이 발신음으로 떨고 있지는 않나요 기다림은 비어있는 자리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비워놓은 그대 손길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5』(2015년 05월 22일)
------------- 416 제4과
―김형영(1945∼ )
제 1과, 끝끝내 덜 된 집 제 2과, 단번에 깨친 듯 거침없는 바람 제 3과, 흥에 겨워 허구한 날 노래하는 나무
이 세 귀신(鬼神) 사이에 끼어보려고 반평생 기웃거리며 살았는데 끝끝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다가
숨 몰아쉬기도 힘든 그날이 다가와 한숨 한 번 몰아서 이렇게 써봐야지. 제 4과, 못 지킨 빛 한 줄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6』(2015년 05월 25일)
--------------- 417 아아,
―박소란(1981∼ )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7』(2015년 05월 27일)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
-------------- 418 물의 결
―박우담(1957∼ )
1 너는 노를 젓고 있다 물을 노크하고 있다 너는 물을 벗겨내고 있다 노를 저어 물의 척추를 간질이고 있다 척추는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입에 재갈을 물린 듯한 템포 빠른 호흡을 하고 있다 너는 노를 젓고 있다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아갈 방향으로 결을 따라 애무해야 한다
2 척추가 물꼬를 트게 물을 잔뜩 애무해야 한다 어느덧, 물은 넌출거리며 갑시게 추임새를 넣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8』(2015년 05월 29일)
-------------------- 419 납작
―정다운(1977∼ )
은퇴한 아버지는 유명 카페 가맹점을 냈다 커다랗고 똑같은 간판이 싫단다 하지만 아무도 간판 보고 찾아오지 않는다 지도앱을 이용하지
어쩌다 한 번 이메일을 받았다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어도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는 말 널 치면 네가 다니는 회사 네가 먹은 저녁이 뜨는데 너의 이름은 유별나고 거칠고 물고기처럼 덥석 무니까 정다운 원룸이나 어린 여배우가 나오는 내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내가 너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 길을 머릿속으로 다시 걷는 거 지하철역에서 포장마차를 지나 아파트에 둘러싸인 움푹한 공터까지 가면 아무도 없는 새벽의 낮은 흥분과 누가 베란다 밖을 내다 볼 것 같은 불안이 거기 있다
너는 꿇어앉고 나는 그 마음을 자꾸 묻고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다고 우린 그렇게 어렸고 그렇게 들쑥날쑥했다
사람들은 목을 구부리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납작한 지도 위를 잘도 걸어 다닌다 이제 기억은 골목처럼 구부러지는 게 아니라 목록처럼 길어져서 인기 많은 아빠의 가게가 있고 검색되지 않는 내가 저 밑에 있고 너는 몇 쪽쯤 찾아보다가 포기했을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9』(2015년 06월 01일)
------------------ 420 철거
―김록(1968∼ )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 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집을 허물면서 한 집안의 금붙이 동붙이를 팔아먹고 이웃집에 주기로 마음먹은 화분과 장독까지 깨부쉈다 철거 전 영산홍을 파내어 화분에 옮겨 심고 장독들은 깨끗이 닦아 놓았는데 기나긴 세월 무엇을 참고 있었기에 이같이 하찮게 무너질 어진 마음을 모셔 두고 있었을까 집하장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걸릴까 정든 것에 일일이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도저는 한 집안의 위엄을 뭉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다 버리기 위해 또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공터에 다다르면 기중기는 허공의 뼛가루만 들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너진 집을 또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서, 가훈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0』(2015년 06월 03일) ―시집『불세출』(사문난적, 2013)
--------------------- 421 우리 아들 최 감독
―최형태(1952∼ )
전공인 영화를 접은 둘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바리스타에 입문하였다 졸업 작품으로 단편영화를 찍고 개막작으로 뽑히고 하길래 영화감독 아들 하나 두나 보다 했는데 영화판에는 나서볼 엄두도 못 내고 여기저기 이력서 내고 면접도 보러 다니고 하더니 끝내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 날 손에 들고 들어오던 권정생 선생 책이라니…… 아비 닮아 저런 책이나 좋아한다 이 험난한 청년 수난 시대에 어찌 먹고살려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식구들은 그를 감독이라 부른다 최 감독 안 되면 자신의 삶이라도 연출할 테니까 알고 보면 누구나 감독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1』(2015년 06월 05일) ―시집『어느 무명 파두 가수의 노래』(책만드는집, 2015)
------------------- 422 연인
―폴 엘뤼아르(1895∼1952)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그녀는 내 손의 모양을 가졌다, 그녀는 내 눈의 빛깔을 가졌다,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삼켜진다.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처럼.
그녀는 눈을 언제나 뜨고 있어 나를 잠자지 못하게 한다. 훤한 대낮에 그녀의 꿈은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기고, 울리고 웃기고, 별 할 말이 없는데도 말하게 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2』(2015년 06월 08일)
------------------ 423 서귀포 오일장에서
―김지윤(1980∼ )
매일 비워졌다 또 밀물 차오르는 모래톱처럼 닷새마다 꼬박꼬박 열리는 오일장
가을감자 파는 좌판 할머니 앞에서 한 푼, 두 푼 버릇처럼 감자 값을 깎다 하영 주쿠다(많이 줄게요), 하며 감자 자루 내미는 부르튼 손 검은 흙 낀 손톱 보며 할머니 텃밭 감자 위로 하영 쏟아졌을 뙤약볕처럼 사뭇 낯 뜨거워져
바람이 차요, 남은 것 제가 다 사드리면 집에 가 쉬실래요? 응, 응, 경허믄 고맙수다게(그러면 고맙지요) 할머니 말씀에 그만 감자를 한 무더기나 사서 한 바퀴 돌다 집에 가는 길
아까 그 자리 그대로 한 무더기 감자를 또 그만큼 앞에 내놓고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할머니
할머니의 좌판에 놓인 감자를 정녕 내가 모두 가져갈 수 있다고 믿다니! 늘 그만큼의 부피와 무게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게, 삶이라고 좌판에 앉은 할머니 나를 조용히 꾸짖는 듯하다
그날 저녁 소반 가득 찐 감자를 내놓고 자꾸 먹어도 허기지다
한 입씩 베어 문 듯 자꾸 비워지는 초승달처럼, 어둠이 살라먹은 자리 다시금 채워지는 만월(滿月)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3』(2015년 06월 10일)
------------------- 424 등대
―김선굉(1952∼ )
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다. 내 생의 등대가 저 깜빡이는 불빛 아니던가.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 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고 등불을 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4』(2015년 06월 12일) ―월간『현대시학』(2015년 05월호)
------------------- 425 산에가는이유,의역사
―박의상(1943∼)
산에 갔지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다음엔 바위를 보러 갔고 언제부턴가 무덤을 보러 갔지
그리고 오늘부터는 저것들 보자고 산에 가지 산 아래 멀리 저어기 강가의 새 도시에 우뚝 선 것들, 번쩍이고 으르렁대는 세상에, 저 예쁜 것들, 야호! 야호! 그래, 어디, 어디, 나, 다시 보자!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5』(2015년 06월 15일)
------------------ 426 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1962∼ )
반짝이는 것들에게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어
길을 걷다 보면 늘 온전한 것보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 훨씬 반짝거려
강물이 그렇듯 반짝이는 것도 부서지고 깨진 돌멩이 강바닥에 모여 있기 때문일 거야
떠나온 곳에서 한 발 더 허공을 더듬어 길을 만든 나뭇가지 한 마디 더 깊어진 상처 자국 햇빛 아래 내어 말리고 있을 때 나는 보았지 슬쩍 눈물 훔치는 나뭇가지 손등에 묻어 나온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슬픔의 빛깔
말없이 나를 보는 너의 눈빛처럼 상처 난 가슴들 많아 이 봄이 이렇듯 반짝거리나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6』(2015년 06월 17일)
---------------- 427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1966∼ )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 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7』(2015년 06월 19일)
-------------- 428 탐구생활
―이진희(1972∼ )
나는, 나는 매일 나는 애벌레거나 곤충의 상태인 듯한데
밤이면 짐승이나 꿀 법한 꿈에 시달리면서도 한낮에는 천연덕스럽게 꽃이나 나무의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간신히 성장하는 기분, 도무지
나는 무얼까 어떤 숙제도 제대로 한 적 없는데 어떤 통과의례도 차분히 겪은 적 없는데
혓바늘이 따뜻한 입속 부드러운 혀를 상기시킨다, 내게 식도와 위장, 항문 말고도 아름다운 허파와 성대가 있다는 것을
성장 속도가 현저히 느린 나는 무엇이 아니면 좋을까 태어났으므로 죽음에 분명 가까워지고 있는데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이들에 대한 무례 무례함만이라도 조금 지워보자
나 혼자 체험했던 사소한 부끄러움과 당신이 애써 펼쳐 보여준 슬픔의 커다란 뺨이 동일하다고 쉽사리 단정 짓지 않기 위하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8』(2015년 06월 22일) ―계간『시인동네』(여2015년 여름호)
---------------- 429 내게는 그분이
―사포(기원전 625년 무렵∼기원전 570년 무렵)
내게는 그분이 마치 신처럼 여겨진다. 당신의 눈앞에 앉아서 얌전한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그 남자분은.
당신의 애정 어린 웃음소리에도 그것이 나였다면 심장이 고동치리라. 얼핏 당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목소리는 잠겨 말 나오지 않고
혀는 가만히 정지된 채 즉시 살갗 밑으로 불길이 달려 퍼지고 눈에 비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귀는 멍멍하고
차디찬 땀이 흘러내릴 뿐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할 뿐 풀보다 창백해진 내 모습이란 마치 숨져 죽어버린 사람 같으리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9』(2015년 06월 24일)
----------------- 430 휴전선
―박봉우(1934∼1990)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0』(2015년 06월 26일)
---------------- 431 월광(月光), 월광(月狂)
―김태정(1963∼2011)
불을 끄고 누워 월광을 듣는 밤 낡고 먼지 낀 테이프는 헐거워진 소리로 담담한 듯, 그러나 아직 삭이지 못한 상처도 있다는 듯 이따금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
소리를 이탈하는 저 소린 불행한 음악가가 남긴 광기와도 같아 까마득한 상처를 일깨워주네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 월광을 듣는 밤은 미칠 수 있어서 미칠 수 있어서 아름답네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 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테이프가 늘어지듯 상처도 그렇게 헐거워졌으면 좋겠네 소리가 톡톡 튀어 오르듯 때론 추억도 그렇게 나를 일깨웠으면 좋겠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1』(2015년 06월 29일)
------------------ 432 합창 시간
―박은정(1975∼ )
지휘자의 붉은 반점이 짙어졌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겠지 우리는 파트를 나누어 노래를 부른다 소프라노와 알토가 불협하고 테너와 베이스가 제 목청에 넘어갔다 강당의 커튼이 휘날린다 신의 이름을 부를수록 세기말이 즐거웠던 사제처럼 우리는 간절하게 후렴구를 반복했다 지휘자의 얼굴이 신의 얼굴을 닮아간다 한줄기 빛 속에서 구체적이며 입체적으로 신의 얼굴을 본 적 있니? 악보를 넘기는 손들이 바빠지고 목청이 주춤거렸다 그럴수록 화음은 웅장하게 퍼졌다 지휘자의 슈트 자락이 펄럭인다 저 새들은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거지? 저, 저 백치들은? 정오가 되자 길고 누런 잎들이 아래로 늘어졌다 입을 벌리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높은 곳으로 낮과 밤이 없는 곳으로 창세기의 새가 날아오른다 천상의 노래를 불러야 해 옆구리에서 투명한 날개가 돋아나도록 지휘자의 동공이 커지자 하품을 하던 여학생의 콧등 위로 파리가 앉았다 일곱 번째 날이 지나고 있었다 최초의 고공비행은 실패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2』(2015년 07월 01일)
------------- 433 안양천 메뚜기
―최두석(1956∼ )
라면 봉지, 팔 꺾인 인형 따위를 띄우고 시꺼멓게 흐르는 안양천 천변의 바랭이 풀밭을 걷다가, 떼를 잃은 메뚜기 한 마리 보았다
벼 이삭이 누렇게 고개 숙일 무렵 유년의 들판을 온통 날개 치는 소리로 술렁대게 했던 메뚜기 그래 너를 이십 년 만에 만나는구나
― 메뚜기 ― 뛰었다 ― 어디로 붙잡으러 뛰어다니다가 술래잡기가 되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 놀이는 이어지고 쉴참에는 논둑에서 나란히 누구의 오줌발이 멀리 뻗치는가 시합도 하고
사타구니에 거웃이 돋을 무렵 놀이는 끝나 동무들 뿔뿔이 고향 떠났다 아니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메뚜기가 들에서 살 수 없듯이
돌연한 불청객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이제 사뿐히 풀잎 위에 올라앉아 쉴 새 없이, 더듬이를 움직이는 메뚜기를 보며 문득 생각한다 소꿉놀이의 단짝이던 계집애를
그리워한다. 앉아서 누어도 오줌발이 사내애들보다 멀리 뻗치던 명님이, 풍문에 의하면 니나노집 작부가 되었다는 계집애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3』(2015년 07월 03일)
--------------- 434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4』(2015년 07월 06일)
--------------- 435 동막 갯벌
―김원옥(1945∼ )
송도 첨단 도시 만든다고 둑을 쌓아 놓은 그때부터 그대 오지 않았어요
하루에 두 번 철썩철썩 다가와 내 몸 어루만져 주며 부드러운 살결 간직하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검게 타버렸네요 터지고 주름투성이가 되었네요
그때는 나도 무척 예뻐서 내가 좋아 찾아오는 사람 많았어요 난 너무 행복해서 쫑긋쫑긋 작은 입 배시시 웃으며 곰실곰실 속삭였어요 “어서 오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 다 드릴게요 바지락도 있고 모시조개도 있어요 게도 있고 낙지 다슬기도 있어요” 앞가슴 풀어헤치고 아낌없이 주었지요
연인들도 아암도 갯바위에 서로 어깨 맞대고 앉아 해내림을 보고 있으면 내 짭짜롬한 냄새는 그들 어깨에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오는 이 없네요 희망 가득 싣고 분주히 오가던 통통배 부서진 몇 조각 남아 그때의 이야기 들려주려 하지만 귀먹은 작업복들만 와서 짓밟다 가네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5』(2015년 07월 08일)
---------------- 436 밤의 아주 긴 테이블
―윤고은(1980∼ )
내 집은 여기 안달루시아 그 중에서도 세비야 미스테솔 거리 74번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이야기하려면 좀 길지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지 수많은 밤이 흘러갔지 그러나 밤은 테이블일 뿐 긴 밤은 조금 더 긴 테이블일 뿐 너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긴 밤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을 뿐 결국은 하나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있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잠들 때뿐 나에겐 잠이 필요해 너에게도 잠이 필요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6』(2015년 07월 10일)
--------------- 437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문정영(1959∼ )
한옥의 창문을 공부하다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다’라는 말의 봉창을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소개 받았다.
내다보는 것이 窓이라면 여는 것이 門이다. 분합문, 미닫이문, 미서기문에는 바라지창, 광창 등 크고 작은 창이 있다. 그 창으로 조상들은 능소화를 내다보았을 것이나 문을 열고 좀처럼 길가까지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봉창은 내다보는 창이 아니라 빛과 공기가 드나드는 문이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봉창은 사랑채의 창문 위에 달려 있다.
종이로 발라 놓은 봉창은 햇볕으로 열 수 있으나 사람이 두드리면 열리지 않는다. 누가 봉창을 두드렸을까. 들어갈 수 없는 문을 두드려 난감해진 조상은 누구였을까.
돌과 묵은 이끼가 있는 연못에도 봉창이 있다. 문을 열고 연못까지 걸어간 조상은 거기서 한울 같은 잉어를 만나 물 위에 봉창을 만들었으리라. 구름 문 하나를 연못에 풀어놓았으리라.
동본(同本)이나 나는 대구 달성에 가본 적은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7』(2015년 07월 13일)
----------------- 438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1943∼)
송코이 강가 마을에서 연초록 풀잎으로 태어난 손, 땡볕에 그을린 웃음 깔깔거리며 고무줄놀이 하던 손, 바구니 가득 망고를 따던 손, 한 모금 처녀의 샘물을 움켜쥐던 손, 불타는 야자수 그늘 아래 물소를 몰던 손, 느닷없이 M16 총알의 탄피가 스쳐간 손, 칼에 찢긴 손, 밧줄에 묶인 손, 코브라의 목을 조른 손, 송장을 불태운 손, 빵과 옷을 훔친 손, 가짜 입국사증과 약혼반지를 바꾼 손, 피의 강을 헤엄쳐온 손, 대양에 던져져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외친 손, 어머니 사진을 찢어버린 손, 아아, 마침내 남의 땅 구정물통에 빠진 손, 인천 신포동 술가게에 팔려온 손, 악어 잔등보다 더 거친 손, 내가 입 맞추고 싶은 거룩한 슬픈 삶의 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8』(2015년 07월 15일)
--------------------- 439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9』(2015년 07월 17일) ―시집『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2006, 랜덤하우스중앙)
------------------- 440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0』(2015년 07월 20일) ―유고시집『옛 마을을 지나며』(문학동네, 1999)
------------------ 441 후련한 수련
―박성준(1986∼ )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외침이 될 때까지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춤의 하소연이란 애인의 소란스러운 울음을 감싸 안을 때처럼 반짝이는 빈틈으로 여기에 거울을 깨고 있소 모르는 말이 건너오는 동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 있소 물속을 듣던 바위의 귀는 오래오래 초록을 껴안고 시시때때 하얀 발톱들은 잇몸 근처에서 자라나오 어쩌자구 물속에는 찡그린 미간들이 그리도 많아 물의 어깨를 비튼단 말이오, 비바람과 수련이 키스를 나누는 동안 저 부력은 감은 눈꺼풀에서 풀려 나오는 힘 눈을 감고 응결하는 입술과 입술들의 향연 빗줄기의 청력이 허공과 연못을 꿰매고 있소 서로가 서로에게 눈이 없어 몰라도 좋을 얼굴, 그저 묻고 있소 향기로 취미를 가진 우울한 표정들이여, 꺼져가는 물속의 핏빛을 보오 툭 터진 엄지에서 연못을 향해 배어 나오는 개봉된 허공의 저 피를 보시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1』(2015년 07월 22일)
--------------- 442 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웃으며 내려오는 하늘… 그 눈부신 계단에 핀 진달래를 또 신문(新聞)이 음악(音樂)처럼 뿌려지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여기 무수히 검은 총(銃)알 자국 얼룩진 나무와 나무 사이 눈이 깔린 밤 … 여기에서.
오 두 마리 버들강아지 꼼지락이는 은(銀) 목걸이를 생각하며, 꽃바구니의 꽃 그리고 사과이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구름도 지구(地球)도 인간(人間)도 생활(生活)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그리운 내가 전쟁(戰爭)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내 눈시울 속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겨울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까닭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2』(2015년 07월 24일)
-------------- 443 만금이 절창이다
―문인수(1945∼ )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라.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3』(2015년 07월 27일)
------------------ 444 상치꽃 아욱꽃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4』(2015년 07월 29일)
--------------- 445
밥 먹는 풍경
―안주철(1975∼ )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을 먹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5』(2015년 07월 31일) ?시집『다음 생에 할 일들』(창비, 201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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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100주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100 (목록과 시) http://cafe.daum.net/sihanull/DRy/36052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 50) - 목록과 시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6512
현대시 100년 한국인의 애송童詩 (1 ~ 50) - 목록과 시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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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은 시를 읽어야 할 시간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
첫댓글 황인숙 시인이 동아일보에 행복한 시 읽기를 시작한 것은 2012년 9월 12일, 매주 월 수 금 세편을 연재했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어떤 시를 선보일까 궁금해서 보게 되었는데 2015년 7월 31일까지 거의 3여년에
445편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시로는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고 445편 마지막 시는 안주철 시인의 ‘밥
먹는 풍경’ 이다.
지금은 나민애 평론가가 이어 받아 금요일에 한 편씩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을 연재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주옥같은 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