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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묵상글 ( 연중 제13주일. - 건강하게 살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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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30 05:27
- 건강하게 살려면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영성 생활을 잘하면 건강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셨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실로 창세기에서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하느님 명령대로 생겨난 존재들입니다.
한자어에서도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생명(生命)이고,
실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順命)하지 않은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령대로 순명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 따라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듯이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을 따라 살면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얘기하듯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진리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죽었던 소녀는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살아납니다.
이렇듯 살아나는 존재는 명령에 순명하는 존재이고,
살아나게 하는 존재들은 소녀의 부모처럼
주님을 믿고 생명을 간청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녀의 이웃들처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녀의 부모만큼 소녀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비웃는 자들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죽음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죽음에 속한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지혜서가 말하듯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그러므로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속한 자들은 하느님 생명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탈출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빛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어둠이듯
물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고기에게는 죽음이듯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육신만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성자의 모습과 성령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쪽만 삽니다.
육신 곧 몸뚱이만 살고 영성을 살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성령(Holy Spirit)을 사는 것이고 정신(spirit)을 사는 것인데,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 정신(Franciscan spirit)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창세기를 보면 명령대로 곧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으로 부족하셨는지 2장에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이번에는
흙으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다음 그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말의 목숨은 이렇게 한자어의 생명과 달리 목에 숨이 들락날락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에서 끊어질 때 우리 목숨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성을 산다는 것은 성령을 사는 것이고,
성령을 살 때 우린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
생명을 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 속한 자 될 것인가? 생명에 속한 자 될 것인가?
그 선택이 앞에 놓인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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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인 ‘치타’를 혹시 아십니까? 이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속 100km대를 달리는 유일한 육상 동물이며, 최대 120km/h의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속도로 사냥감을 쫓아가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어떻게 될까요? 4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동물보다는 성공률이 높기는 하지만, 때로는 계속된 사냥 실패로 인해 굶어주는 치타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끼 치타의 생존율은 어떻게 될까요? 대략 독립할 수 있는 개월 수인 17개월 동안 4.8%만 생존한다고 하더군요. 현재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제일 낮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아는 91%가 첫 번째 생일까지 살아남고, 88%가 다섯 번째 생일까지는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타는 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아주 약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강함이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남들보다 강함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이를 위해 자기 능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두터워지게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발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청합니다.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의 집으로 함께 가십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회당장의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비웃었지만, 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회당장의 모습으로 인해 실제로 딸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비웃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말입니다. 세상의 뜻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뜻만을 바라보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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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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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오늘은 연중 13주일이며, 교황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작가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셨음을 말하며, <창세기>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세 1,27)는 말씀을 반향해줍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4)는 사실도 동시에 말하면서, 불멸의 상급을 받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지혜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지혜 6,19).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지혜 15,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 어려움에 닥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하는 장면으로,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물론 물질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물질적, 영적 이중적 의미로 확장해 어려움에 빠진 신자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인물이 보여준 것은 ‘간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열병 앓은 여인에게는 “딸아, 너의 믿음이 네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이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 23)
회당장은 그야말로 전적인 신뢰의 자세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인간만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듯이, 이제 당신 “손”을 얹으시어 딸을 치유하시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청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 35)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참담한 순간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르타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믿는다면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 23-26 참조)
그렇습니다. 죽음의 이 순간이, 바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히로에게도 이 순간이,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나아가 이미 죽은 딸을 살려주실 분으로, 더 깊은 믿음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고,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가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를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눈에 보이는 희망이 가라진 현실상황에서, 바로 그 상황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다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의 뜻대로, 곧 ‘주님께서 깨우치리라, 일으키리라’는 그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탈리다 쿰!”(마르 5,41), 이 말씀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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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어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비가 내렸습니다. 비로 인한 피해가 없기를 소망하며 우리 마음에는 은총의 비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시길 빕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고 아쉬울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회당장이 타인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고 한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 할 고민이나 걱정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두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 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일정액을 봉헌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의 사랑하는 딸, 테클라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 이란다.’ 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답은 한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 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슬픔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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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199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경본을 읽을 때 꼭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황과 우리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분입니다. 33년을 지내면서 우리 교황은 3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주교는 4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그리고 정순택 베드로 주교입니다. 이곳 댈러스 교구에서는 우리 주교 ‘Burns와 Kelly'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매 미사마다 교황과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들의 직무와 직책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교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26대 사목회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27대 사목회가 출범합니다. 26대 사목회를 이끌어 주셨던 사목회장님과 사목위원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6대 사목회는 팬데믹의 어려움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1977년 시작하여 이제 27대 사목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가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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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을 단계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 단계를 함께 찾아봅시다.
복음은 처음부터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호수 반대편으로 건너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라오는 많은 사람, 호수 건너편으로 따라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건너신 호수는 바다와 같은 호수입니다. 그곳을 따라간다는 것은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모습은 야이로에게서 드러납니다. 야이로는 말합니다. ‘당신이 내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내 아이가 다시 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야이로의 믿음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의 신분은 고위 관리였고, 사람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는 랍비였습니다. 그런데 거리를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자고 빌어먹는 그 주님께 엎드립니다.
엎드린다는 것 그거, 쉽지 않은 것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도 엎드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나와 비슷하거나 못났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이 쉽겠습니까?
야이로를 보십시오. 순종과 순명을 그에게서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하는 그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야이로는 그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바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딸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인이 나타납니다. 하필이면 이때 나타날까요?
여인은 세 번째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구원받겠지’라고 말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단 하나의 소원, 그것은 구원이었고, 용서였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가 천국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가까운 여인은 그 구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어떻게 잘살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안 걸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에 있습니다. 하늘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세상의 믿음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믿음,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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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한다는 것은….
심장이 뜁니다.
귀를 심장에 대고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립니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손목의 맥을 잡으면 진동합니다.
진동이 느껴진다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진동합니다.
기쁨으로 진동하고 슬픔으로 진동합니다.
감동으로 진동하고 아픔으로 진동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대여….
진동하며 사세요.
우울함의 어둠이 다가와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처럼 만들더라도
스스로 진동하십시오.
오히려 우울을 안고 진동하십시오.
우울을 안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십시오.
그런 진동은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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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키엣 대주교님.
진실되고 겸손한 마음
하루에 수십 번 우리는 주님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하루에 수없이 많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갑니다. 수없이 많은 인파 속에, 삶과 세상에 지쳐 있는 수 많은 얼굴 속에 주님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에도, 성체 성사 속에서도 우리는 입과 머리로만 주님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진실된 믿음과 사랑 없이 주님을 대한다면 어떻게 우리 영혼이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주님을 직접 접촉한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라는 긴 시간 동안 하혈했던 여인은 진실된 신뢰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 순간 하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이미 죽었기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어린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 손을 잡아주자 아이는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질병과 죽음의 세계에서 새 생명의 세계로 돌아오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강렬한 영혼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영혼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기적과 치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필요합니다.
- 진실되고 확고한 믿음
당시 유다의 회당장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커녕 예수님을 반대하고 해칠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찾아와 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의 진실된 마음과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본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여인 역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께 다가가서 몰래 그분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깊은 겸손
겸손이란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진실된 모습들이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깊은 겸손과 확고한 믿음만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진실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간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주님의 진정한 사랑과 인자한 눈빛을 느낀다면 우리의 삶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더 깊은 겸손함과 확고한 믿음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를 어루만져 주고 계시는 주님을 느끼고 있습니까?
2. 미사를 통해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온 마음으로 기쁨과 충만함을 느낀다면 주님의 사랑에도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3. 나를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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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
“믿어라, 찾아라, 나눠라”
오늘은 예수성심성월 6월의 끝날이자 제13주일이고 교황주일입니다. 해마다 한국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나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지냅니다. 어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이어 오늘 지내는 교황주일이 참 잘 어울립니다. 교황주일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 자랑스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님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에 걸맞는 참 훌륭한 교황님입니다. 가톨릭신문에 소개된 교황님의 참 특별했던 6월14일 오전 8:30에 시작하여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소개합니다.
이날 87세 교황은 교황청에서 전 세계에서 온 100명이 넘는 코미디언을 만났고,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인공지능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연설했을뿐 아니라, 여러 지도자들을 독대하며 40대의 그 누구도 녹초가 될 일정을 소화하는 활력을 보였습니다. 교황이 주요 7개국 정상회담장에 들어섰을 때, 시끌법적하던 분위기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각국 정상들은 경외심으로 교황을 바라봤습니다.
교황이 연설할 때 각국의 정상들은 집중했습니다. 토론토대학교의 정치공학자이자 G7 연구소를 이끄는 존 커튼은 “교황은 특별한 셀럽”이라고 말했다. '셀럽'이란 celebrity(유명인)의 줄인말로, 사전적으로는 직업상 연예인은 아니지만 큰 인지도를 얻어 이를 자산으로 살아가는 이를 뜻합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넘어 명실공히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컬럼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교황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발명해야 한다. 교황직이 날개를 펼칠수 있도록 교황직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배울, 희망의 표징같은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인물을 교황으로 모신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옛 성현은 이런 참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이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대장부가 참사람이며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순교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설교시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에게, 주님과의 만남은 참되고 적절한 파스카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워졌고 새생명의 문들은 그들앞에 열렸다.”
새삼 참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매일 만나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감으로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믿어라!”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생명이자 사랑이신, 희망이자 기쁨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과 의미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이런 하느님을 믿을 때 해결됩니다. 지혜서가 이런 하느님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제1독서 지혜서 전문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들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고 당신 본성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을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떠난 영혼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이게 진짜 두려워해야 할 죽음입니다. 살아있다하나 실상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떠난 죽은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에 속한 의로운 이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둘째, “찾아라!”입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자비로운, 치유의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은, 치유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죽은 딸을 살리려고 부성애를 발휘하는 회당장 야이로, 또 회당장의 죽은 딸, 그리고 열두해 하혈병을 앓던 여자 모두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정확히 최고의 명의이신 치유의 주님을 찾았고 만났습니다.
예나 이제나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가 찾을 분은 단 한 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복음에서 치유의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용서와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열두해 하혈병을 앓는 이에 대한 치유선언은 바로 미사에 참석하여 치유를 갈망하는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말씀입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도대체 주님을 만남이 없이 어디서 이런 완벽한 전인적 치유를 받을 수 있을런지요! 야이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이들을 향해 정신 번쩍 들게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나 깨어 날 때 그대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잠시 영혼이 잠들어 죽어있는 듯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주님과 함께 깨어 일어나 부활의 삶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참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심신이 무기력하여 무너지려 할 때 즉시 "탈리타 쿰!" 하며 일어나기 바랍니다. 더불어 귀가 막혀, 입에 막혀, 잘 듣지 못하고, 잘 말하지 못한다 싶을 때는 “에파타!”외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귀를, 입을, 마음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셋째. “나눠라!”입니다.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께 받은 주님의 것이니 말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눌수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는 말도 있고, 친절한 말씨, 따뜻한 마음도, 작은 미소의 사랑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나눌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래서 더불어의 공동생활을 권하는 것입니다. 만병은 혼자의 외롭고 쓸쓸한 삶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같은 처지의 아픔을 나누는 동병상련의 나눔도 힘이 됩니다. 얼마전 작고한 민중시인 신경림의 시 ‘파장’ 첫 부분은 저절로 미소짓게 합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친구같은 얼굴들”
그러나 나눔의 절정은, 나눔의 진수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가, 즉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니아 교회가 보여줍니다. 이 교회를 극찬하는 바오로의 나눔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주님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참 깊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제2독서 코린토 후서 말씀을 전부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인지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자 가난해 지신 주님을 본받는다면 우리 역시 자발적으로 나눔으로 비움의 가난을 택할 것이요, 이 가난은 곧 부요로 바뀔 것입니다. 나눔의 비움으로 풍요로워지는 내외적 삶입니다. 마지막 말씀도 참 나눔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말그대로 자발적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의 실현입니다. 즉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의 실현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것을 나누십시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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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을 내밀어요>
오롯한 믿음으로
내가 닿고픈 이에게
손을 내밀어요
너무 멀리 있어
비록 닿을 수 없어도
손을 내밀어요
손 내미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곱게 닿으니
손을 내밀어요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원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요
여린 내 손길이 무얼 할까
괜한 의심 들더라도
손을 내밀어요
마음 담은 손길만으로도
그 사람 모두 얻으니
손을 내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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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닌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리고 회당장에게는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은 그 믿음이라는 옷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온갖 다른 덕보다 뛰어나서 강력하고 교활한 악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영혼안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퍼져 가면 갈수록 하느님의 사랑도 영혼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는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터득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가장 안전하게 확실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한 믿음입니다.
순수한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이라고 하는 두가지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믿음만이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초월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믿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빛은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분별을 줍니다. 믿음이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온존재를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것은 참되고 깊고 단순한 믿음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열망과 믿음의 힘이 생겨 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창조주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분이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분의 사랑의 심오함과 그 사랑이 우리를 정화시키고 성화시켜 하느님께 가까이 가도록 우리의 영혼을 들어올린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할 때 믿음은 성장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된 신앙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어 유아적인 믿음의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일상의 삶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맞추어 나가려는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고 모든 일에 임할 때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떠올리며 매순간 깨어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는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오,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소서.
주님,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명(命)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올바른 믿음과 확실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감각과 깨달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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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떼이야르 드 샤르뎅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올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 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올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저는-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 품의 힘을 빌어-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들 위에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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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탈리타 쿰! /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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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2024-06-29 ㅣNo.173776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나, 이날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기념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반석으로 교회를 굳건히 지킨 베드로 사도와 선교 열정으로 주님을 만방에 전한 바오로 사도를 기린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사시는 교황님이 교회를 잘 이끄시도록, 주님 도움을 기도와 봉헌으로 청하면 참 좋겠다.
회당장 야이로는 열두 살 어린 딸이 죽는 게 억울하기만 하다. 그는 아비 가시고기처럼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했으리라. 그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서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음을 믿었기에 체면이랑 아랑곳없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딸을 고쳐 주십사고 간곡히 청한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감동적인 믿음이요, 마지막 부탁이다. 그 많은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마치 신발 끈마저 메어드릴 자세로 예수님 발 앞에 구부려 두 손 모아 청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집으로 가는 동안 딸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를 듣는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이 죽음 너머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가지라신다. 당신 권능은 사람을 죽음에서 되살리는 힘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거다.
아이를 되살리는 기적은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증인이 세 사람 있었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권능을 미리 보여 주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께서는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는 함께 가시어 그의 딸을 살리셨다. 아버지와 그 딸, 억울하고 한 많은 죽음에서 역전이 되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하는 야이로, 피붙이를 낳아 지금까지 키워 왔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할 게다. 자식이 먼저 죽었다는 그 소식 믿지 못하겠다는 수많은 부모 모습이 떠오른다. 자녀 사랑하는 방법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게 자녀 사랑하는 참 길이리라. 바쁜 일상에도 잠시 짬 내어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가 되었으면 한다.
‘가시고기’라는 고기 어미는 알 낳기 전 고향으로 가, 거기서 알 낳고는 그 아비만 남기고 떠난다. 남은 아비는 정성스레 알을 보살피고 부화하면 아비는 끝내 지쳐 죽는단다. 새끼들은 죽은 아비의 몸을 먹고 산다. 이처럼 아비에게는 ‘큰 사랑’이 담겨 있다. 요즈음은 부모 역할하기가 어렵다나. 마음만은 자녀 사랑이 있지만 부모는 바쁘고 지쳐 있다. 자녀들하고 식사하고 대화할 시간이 없다. 함께할 기회가 적으니 자녀들의 고민이나 관심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자식과 부모의 삶이 서로 달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부모 자식 간의 한계를 느껴 어쩜 형언할 수 없는 분심마저 생기리라. 하느님 따르겠다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겠다는 믿음의 결심이다. 자식도 그분께 맡겼으면 다 믿자. 의심은 신앙만 흐리게 한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은 한계라는 게 아예 없다. 이런 믿음의 삶을 하면서도 자꾸 의심만 해서는 안 될게다. 앞만 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자유롭게 부르심 받았으니 성령의 인도로 일어나자.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듯이, 그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일깨우신다. “탈리타 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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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연중 제13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2독서는 가난한 이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시며 누구보다도 부유한 분이셨지만,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넘어 십자가 죽음이라는 비천함까지 껴안으십니다(필리 2,6-8 참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시는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고고하게 홀로 계심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하시는 인간과 같아지시는 거룩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가난함으로 우리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시고, 그 안에서 슬픔과 고통을 함께 겪으십니다.
이달 내내 우리가 기억한 그리스도의 성심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마음이 찢어지도록 슬퍼하시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는 그 가난으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유해지고 충만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가난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는 윤리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습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여 줍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이와 분리되어 그들에게 작은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부자 교회’가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으로 동화되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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