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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연단
창세기 16: 1~14
○ 사래와 하갈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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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사라의 초조함과 경솔한 행동
본문의 스토리를 다시 엮어 봅시다. 사래는 결혼 후에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고민 고민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네 자손이 창대하리라! 그 말씀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생기지 않고, 오히려 사래의 경수는 끊어졌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보다 더 초조해진 것은 사래입니다. 남편마저 생산력이 떨어지면 자녀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남편이라도 멀쩡할 때에 애를 만들자! 그래서 사래는 결단을 했습니다.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자! 당시에는 종에게서 난 아이는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하갈은 애굽왕 파라오가 사래에게 준 여자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흉년 때문에 애굽에 갔을 때에 사라를 누이라 하고 파라오 왕에게 줬습니다. 파라오는 사라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면서 하녀를 준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사래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됐고, 하갈은 젊기 때문에 남편에게 줘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요구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냥 아내의 말을 들었다고만 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내를 한 사람 더 준다고 하니까 이게 웬 횡재냐 하고 그냥 따른 것 같습니다. not bad! 아브라함은 하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스마엘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갖게 되면서 가정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습니다. 사래는 남의 태를 빌려서 자기 아이를 가지려고 했지만 비싼 댓가를 지불합니다. 하갈이 아이를 가지면서 여주인을 무시합니다. 본문에 “멸시하다”(ll'q;)는 말은 가볍게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됨으로 여주인의 존재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제 나도 당당한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었으니 사래의 말을 들을 필요가 뭐 있겠나? 사래가 뭐라고 하든지 무시했습니다. 사래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따집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당해야 마땅하오. 내가 하갈을 당신 품에 안겨줬는데 하갈이 나를 무시하니 당신이 책임지시오! 남편에게 안겨 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남편 탓을 합니다. 원인 제공자가 오히려 큰 소리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사래 역시 처음부터 훌륭한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선민의 어머니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튼지 사래가 뭐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미뤄버립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볼 때는 하갈은 아내이지 종이 아닙니다. 함부로 다루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사래에게 미룬 겁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6)
당신의 종이니 당신의 맘대로 하시오! 부름받은 초기의 아브라함은 결단력 있는 믿음의 용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유부단하고 아내의 말에 따라 오락가락 하고, 곤란할 때는 아내에게 미뤄버리는 평범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맘대로 하라고 하니까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학대하다”(hn:[)는 말은 누른다, 혹은 심하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사래가 하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인으로서 하인에게 복종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그렇습니다. 하갈은 사래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출합니다. 늙은 여주인 사래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살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집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방황하는 하갈을 설득하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너는 사래의 여종이 아니냐? 왜 집을 나왔느냐? 어디로 가려느냐?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집으로 돌아가서 여주인에게 복종해라!
그러면 내가 네 자식을 번성하게 해 주겠다! 그에게 자손의 번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과 사래는 오랫동안 한 집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 가정에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본문에 보세요.
하갈의 자손은 숫자적 번성은 약속되었지만 질적으로 우수하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 모든 사람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됩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12)
들나귀(wild donkey)가 뭡니까?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도덕과 윤리 밖에서 뛰어다닙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좋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적대적입니다. 이웃 사람들 역시 이스마엘 후손들에게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결을 보세요. 그런 형국이 수 천 년을 계속하게 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평생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끝날까지 좌우합니다.
오늘 먼저 깨달을 일이 있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초조해 아지 마세요. 일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다고 인간적인 술수나 수단을 쓰지 마세요. 잘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벌어집니다. 사래나 아브라함은 편법으로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방법으로 상속자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가정불화가 계속 일어납니다. 가족끼리 멸시하고, 학대하고, 가출하고, 분쟁합니다. 자손 대대에 적대적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일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다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절대로 만들지 마세요.
더딘 계시가 원인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원인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장래 일을 더디 알려주신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더디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단번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알려주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큰 민족이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입니까?
현재는 단 한 명의 자식도 없는데, 큰 민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자식을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래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거느리고 아브라함 곁을 떠났습니다. 혈육이 다 떠났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6)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벌어지고 아브라함은 적에게 사로잡힌 롯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다행히 롯을 구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자손에 대한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단 말인가!
자식도 하나 없는 몸이!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제 8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자손 창대는 커녕 이제는 상속자가 없어 걱정입니다. 자식은 없고, 다메섹의 엘리에셀를 상속자로 삼아야 할 형편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기른 하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식이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십니다. 저 별들을 보아라! 네가 저 별들을 셀 수 있느냐? 네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리라! 하늘의 별은 여러 가지 상징이 많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인간의 손길이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만들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하늘의 별은 뛰어난 인재들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상에서 뛰어난 자손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 어떻게 자식을 준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또 기다려야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특징은 점진적이라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민족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체적인 인물로 좁혀집니다. 엘리에셀입니까? 아니다. 네 몸에서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체적으로 사래에게서 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착각한 겁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브라함은 육체적으로 아이를 만들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은 수단은 아브라함이 다른 여자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계시를 점진적으로 주실까요?
단번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종말에 대한 계시도 그래요.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오신다고 확실히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왜 아무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게 하셨을까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천천히 알려주심으로써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성숙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게 해 놓으시고 일체의 설명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망했는지? 언제 다시 회복될 것인지? 욥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통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은 모든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성큼 자라난 모습이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미래가 궁금하십니까?
내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 몰라서 낙심 됩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모르는 게 약입니다. 하나님은 장래 일을 모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분발하게 하십니다. 노력하게 하십니다. 사색하고 생각하게 하십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저는 처음 예수 믿고 병 낫기를 위해 애썼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내 병이 나을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미리 알려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사람들처럼 단번에 기적으로 고쳐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저는 앓을 만큼 다 앓았습니다. 그 바람에 남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신령한 것들을 넘치도록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됐지요. 장래가 궁금하세요? 오직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장래 일을 더디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결과는 확실하게 성공입니다. 실패는 없습니다. 빨리 되든 더디게 되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 마세요. 미래가 어떻게 되든지 소망을 확실히 잡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인내입니다. 더딘 계시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천천히 알려주심으로 우리는 참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연단의 수단입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오랫동안 숙성된 발효 음식입니다. 김치, 된장, 간장이 왜 맛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숙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fast food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인생도 빨리 흥하고 빨리 망합니다. 깊이가 없어요. 사는 맛을 몰라요. 말초신경적으로만 살아갑니다. 빨리 사랑하고 빨리 이혼합니다. 빨리 배우고 빨리 잊어버립니다. 현대 문학에는 서사시가 없습니다. 자연 경관을 감상하고, 인생을 노래할 겨를이 없습니다. 빨리 돈 벌어야 되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책망하십니까?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사8:6-8) 하나님 자녀들이 너무 빠른 성취만 기대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신앙이 성숙되고 인격이 성숙되는 것을 몰라요. 그냥 빨리 부자 되기만 바랍니다. 빨리 승진하기만 바랍니다. 빨리 유명 인사 되고, 빨리 공부 잘 하고, 빨리 성공하고, 빨리 죽고...? 요즘 사람들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속전속결입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몇 차례 중얼중얼 하다가 끝내버립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다리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
하나님이 성공하라고 하시면 성공합니다. 성공의 때에는 실패하라고 해도 실패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실패하라고 하실 때에는 성공을 위해 발버둥 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병들게 하시면 고칠 방법이 없고, 하나님이 낫게 하시면 못 고칠 병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기다리는 동안 훈련받고, 훈련 받으면서 소망을 얻으면 됩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요? 때때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기다리는 중에 일이 망쳐지는 듯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무려 25년을 기다리는 동안, 사래는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여자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남자 구실을 거의 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사래나 둘 다 육체적인 능력을 상실했을 때에 자식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이삭은 육체적인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서 기적으로 출생했습니다. 이삭은 예수님처럼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칼을 들고 죽이려 해도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케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다림 속에서 성취됩니다. 인간적 소망이 다 끊어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결혼해서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편법을 쓰지 않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삭 시대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애굽에 내려가지 않고 참고 그 땅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더니 100 배의 소득을 올렸습니다. 양과 소가 너무 많아져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힘들게 수 십 미터 땅을 파고 우물을 만들었더니 이웃 사람들이 자기들 우물이라고 내놓으라고 합니다. 아버지 같으면 한 판 승부를 벌였을 텐데 아무 소리 않고 내어줬습니다. 또 우물을 팠더니 또 내놓으라고 합니다. 또 줬습니다.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이웃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삭을 두려워 했습니다. 저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이삭과 함께하는 하나님은 두렵도다! 바로 그겁니다. 참는다고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돈도 주시고, 자식도 주시고, 명예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만족도 주시고, 보람도 주십니다.
끝까지 참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세요.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세요.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계속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사람의 머리로 계산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