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침은서곡—사라진 명황성과 회란탑江口沉银序曲——消失的明皇城与回澜塔
출처: 청두일보 저자: 何大江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석룡 대 석호, 금은 만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청두 저택을 다 살 수 있습니다. 강구침은에 얽힌 이 전설의 동요는 쓰촨성 펑산 일대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 장커우 명나라 말기 전쟁터 유적지의 제3기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결과 보고회가 개최되었으며 금은기를 기반으로 한 수만 점의 문화재가 출시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게 16근, 금 함유량 95%의 촉세자보 금인(金印)이 눈에 띕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장셴중(张献忠)의 장구침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청두 지도에서 사라진 두 개의 지명인 밍황성과 후이란타(回澜塔)는 우리를 역사적 미스터리로 안내합니다.
회란탑과 홍제교의 '다리는 활을 휘는 탑과 화살과 같다'는 명황성 성두의 변화된 대왕기 명황성으로, 옛 터는 오늘날의 톈푸광장, 쓰촨과학기술관, 후쯔먼 일대에 있습니다.
이른바 '황성'은 사실 촉의 왕부로 주원장이 그의 열한 아들 주춘(朱椿)을 위해 준비한 왕궁입니다. 그것은 홍무 15년(1382)에 지어졌고 8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아들에 대한 주원장의 중시, 전략적 판도에서의 쓰촨의 중요성, 그리고 풍부한 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촉왕부의 우람한 기개는 동시대의 다른 왕부들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1390년, 주춘은 쓰촨성 청두부에 번성하여 왕부의 초대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후손들은 다음 주인인 장헌충이 입주할 때까지 254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명만력, 숭정 연간에 왕조는 비바람에 휘청거렸습니다. 숭정 7년(1634년)과 10년(1637년), 장헌충군과 이자성군은 각각 20여 일 동안 청두를 포위했습니다. 숭정 17년(1644년), 장헌충은 다섯 번째 입천(入川)을 이끌고 기문(夔門)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청두(成都)로 돌진했습니다.
8월 5일, 장헌충 대군이 도성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현아문 장용 출신인 장헌충은 심리전술에 정통하여 나무로 가짜 대포를 만들어 성내 수비군을 위협하고 의지를 무너뜨렸습니다. 한편 성북쪽 성벽의 한 단이 흙으로 되어 있어 취약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몰래 화약인입선을 묻었습니다.
초아홉째 아침, 화약이 터지면서 굉음과 함께 성벽이 수십 길이나 무너졌습니다.
8월 15일 추석, 마지막 촉 왕 주지수는 비빈궁녀를 이끌고 우물에 뛰어들어 명나라의 촉 지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두 달 후, 장셴충은 청두에서 즉위하여 대서국을 건국하고 연호를 '대순'으로 정했습니다.
장헌충은 촉왕부를 황궁으로, 시정전 운송전을 승천전으로, 소명전을 금란전으로 바꿔 황권천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승천의 덕담은 그가 황성의 주인이 되는 것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1646년 초, 황태극의 장남이자 청화석 숙친인 왕호공은 오삼계를 대동하고 만주 대군을 이끌고 사천으로 진군했습니다.
장셴충(张献忠)은 대세가 기울자 청두(成都)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시는 청두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번고(國庫)를 부수고 성 안팎의 민가와 절, 관아서를 불태웠습니다. 일찍이 장헌이 의기양양한 승천전과 금란전을 지켜봤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촉왕부는 벽돌로 지어져 있어 파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터는 촉나라의 후주 맹창의 황궁이었으며, 조각이 정교한 반룡대주 두 개가 남아 있습니다. 장헌충(张献忠)은 병사들에게 돌기둥에 면사를 감아 기름을 두르고 다시 불에 태우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큰 기둥이 부러지고 전당이 무너졌습니다.
촉왕부가 마침내 사라졌을 때는 1646년 음력 8월이었습니다. 촉왕댁의 각종 금은보화는 모두 장헌충이 가져갔습니다. 이번에 출토된 '촉세자보' 금인은 명나라 촉 왕세자가 소유한 것으로 촉 왕부의 역대 세자전용의 보물입니다.
황성의 웅장함, 이탈리아 선교사 릴레우스, 포르투갈 선교사 안문사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궁중에서 장헌충의 연회에 초대받았는데, 정전인 승천전은 '72주(柱)가 두 줄로 갈라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대재앙을 겪은 촉왕부에는 금수하(金水河)의 돌다리 세 개와 다리 남쪽의 돌사자, 홍조벽의 일부 잔해 등 소량의 유물만 남아 있었습니다.
회란탑교가 활탑을 구부린 듯 활시위를 당겼을 때, 장헌충이 명황성의 주인이었을 때, "다리는 활, 탑은 화살, 활은 활을 휘둘러 승천전을 쏘았습니다. "교궁탑전이란 다리는 금강에 있는 홍제교(고구안교)이고, 탑은 그 남쪽에 있는 회란탑입니다.
둘 다 명나라 만력 해에 건설되었으며 포정을 위해 위일룡의 건설을 조직했습니다.
회란탑은 10층 높이로 당시 초고층 빌딩에 속했습니다. 아치형 다리는 활처럼, 높은 탑은 화살처럼 날카롭고, 승천전에 쏘겠다는 예언은 장헌충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듭니다.
미신을 믿는 그의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화살을 부러뜨려 못 쏘게 하는 것. 장헌충은 회란탑을 철거하고 탑을 허물어 얻은 벽돌을 그 자리에 장대를 쌓도록 지시했습니다.
후란타(回澜塔)는 해체된 지 백 년 만에 다시 태어납니다. 청나라 건륭 30년(1765년), 사천총독 개태수(開泰修)가 회란사(回澜寺)를 지으면서 동쪽에 3층 높이의 정자식 누각을 짓고 동경각(同慶閣)이라 이름하여 민간에서는 백탑(白塔)이라 불렀습니다.
다리는 활이고 탑은 화살이라는 장면이 금강변에 재현돼 있습니다. 재건된 탑은 180년 동안 존재했으며 1945년 인근 판잣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금강골드러시 민국의 모험놀이가 청두에서 철수할 무렵, 장헌충은 번고를 부수고 금은주옥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청나라 건륭제 때 한림원 편수 팽준사가 쓴 '촉벽'에 따르면 장헌충은 금강을 자르고 깊이가 몇 인에 달하는 큰 구덩이를 파고 금은과 옥을 매립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은이 가라앉은 곳은 회란탑 부근이라고 합니다. 금강에는 금은보석이 묻혀 있다는 말이 그럴듯하고 석룡 대 석호라는 동요는 이 돈의 매장지를 암시합니다.
청두부를 다 사들이는 것은 얼마나 큰 유혹인가, 그러나 스룽과 스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동요는 민간에 널리 퍼져 다양한 버전으로 파생되었는데, 예를 들어 '석룡 대 석호'도 '석우 대 석고'를 만들고, '금계 대 석고, 은 십만 오천'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가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주댁을 사겠다고 와서 '석인 대 석고, 황금 5만 5천 위안입니다.
충칭(重慶)댁을 사들일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장셴충(张献忠)이 청두(成都)에서 가져간 그 부는 여러 해 동안 세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민국 연간에는 금강에서 골드러시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연되었습니다.
1938년 음력 9월, 한때 군벌이었던 마쿤산이 주도하여 '진강황금도금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중에는 고위 관리들과 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보물 발굴 과정은 한동안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석우와 석고가 실제로 발굴되었습니다.
골드러시들은 아마 "만만오"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결국 수확은 작은 동전 몇 광주리였습니다. 강구침은 석룡석호는 지금도 장헌충이 란탑을 허물고 있으며, 황당무계하지만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탑을 해체할 때 옛 비석을 파냈는데, 위의 전문은 회란탑의 건립과 파괴를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장헌충의 마지막 운명도 예언했습니다. 비문에 이르기를 탑을 쌓고 여일룡을 세우고 탑을 허물어 장헌충을 바칩니다.
세밑에 갑을병을 만나니 이곳의 피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요괴의 운명은 천북에서 끝나고, 독가스는 천동까지 퍼집니다. 퉁소를 불 때 대나무를 쓰지 않고 가슴에 화살을 꽂습니다.
염흥 원년 제갈공명기. '소 불 때 대나무를 쓰지 않는다'라는 글자가 있는데, '소'가 대나무를 뺀다는 것은 석숙친왕의 호격인 '숙'입니다. 《촉벽》에 따르면, 호거가 천동염정에서 장헌충을 사살할 때 비로소 이 참어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헌충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1400여 년 전 제갈량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이 이야기는 자연히 황당무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AAA1이 AAA2에게 잡혀서 염정 봉황산에 죽은 일은 정사(正史)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명사·장헌충전》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한나라로 진군할 때, 강장 유진충이 군에 와서 길잡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장셴충은 청두에서 철수한 후 펑산장커우에서 명삼장 양전에게 저지당했습니다. 한 차례의 전쟁에서 30만 명의 헌병이 대패하고 수천 척의 전선이 불에 탔으며 장헌충은 잔당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날 짙은 안개가 끼어 일찍 일어나 행군하다가 옌팅 펑황산에서 갑자기 AAA 대군과 마주쳤습니다. 한바탕의 난투극에서 장헌충은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장작더미 밑에 엎드려 숨었다가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 목을 베었습니다.
강구진과 양전의 격전 중에, 전선은 불에 탔고, 배의 가치가 매우 높은 보물은 어디로 갔습니까? 배에 실려 있던 금은주옥과 은초는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의 행방은 줄곧 세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석룡 대 석호'라는 민요도 등장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보물찾기 이야기에서, 천착은 일상적이지만, 석룡과 석호는 실제 존재입니다.
스룽은 펑산장커우진 스룽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몸길이는 17m, 지름은 0.7m입니다. 절벽 위를 선회하는 석룡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표정이 매우 생생합니다.
석룡이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마주보고 있던 석호는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렸습니다.
탐방객들에 따르면 덧니가 눈에 띕니다. 석룡과 석호는 송대에 개착하여 복호사 산문 밖을 지켰습니다. 석호는 1960~70년대에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졌고, 석룡은 오랜 세월 동안 토사에 묻혀 있었습니다.
1970년대 도랑을 만들다가 모래와 돌이 미끄러지면서 용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룽(石龍)과 스후(石虎)가 있는 곳은 장커우(江口)의 침은 유적지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 격전의 생존자들이 보기에 거대한 석룡과 석호는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수많은 금은기들에게 매우 명확한 표식작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금강의 하상에는 장셴충이 청두 번고에서 가져간 재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구 명나라 말기에 전쟁터 유적이 수년간 지속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강구 침은' 전설이 허구가 아님을 증명해줍니다.
당시의 옛 전쟁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지, 사람들은 끝없이 상상했습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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