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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과 우연.만약 역사의 테이프를 감아 다시 자유롬게 돌린다면 인간이 다시 같은 인간으로 진화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 김동광 옮김 경문사 2004
가지각색의 다양성을 보이는 현생 생물 속에도 단일한 순서가 있다는 어리석은 사고 방식은 생명이 사다리 모양으로 진화하고 다양성은 역원뿔 모양으로 증가한다는 전통적인 도식과 그 도식을 낳은 편견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사다리에서는 참게는 단순한 생물로 인식되고, 원뿔형에서는 오래된 생물이라고 간주된다. 그리고 원래는 별개였던 두 가지 방식이 여기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사다리의 하위에 위치하는 것은 오래된 생물임을 의미하고, 역원뿔형도의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은 단순한 생물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다리 그림과 역원형뿔도라는 잘못된 도식에 대해 우리가 그 정도로 충성스러운 까닭이 거기에 특별한 비밀이나 수수께끼, 또는 미묘한 심리적 특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도식이 채택되는 것은 그런 생각들이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리라는 우리의 갈망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의 솔직함이 던지는 강렬한 함축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던져져서,
어디에서 왔는지 그 유래도 알지 못하고 물처럼 이리저리 표류하고,
황야에 부는 바람처럼,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디론가 어쩔 수 없이 떼밀려간다.
그 후에 나온 《루바이야트》(오마르 카얌의 4행시집)의 4행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역시 공허한 희망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있다.
아,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당신과 내가 함께 운명과 공모해서
삼라만상의 이 가엾은 구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구도를 산산조각으로 분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절실한 소원에 좀더 가까워지도록 다시 빚어낼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신화와 서양 문명에 등장한 초기의 과학적 설명은 이 ‘절실한 소원’에 경의를 표시하고 있다. 55-56
어쩌면 존재의 연쇄(chain of being)라는 낡은 개념이 가장 큰 위로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류보다 단순한 대부분의 생물들이 인류의 선조가 아니며 그 원형조차 아니며, 생명수의 방계(傍系)에 속하는 곁가지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생물의 다양성과 진보가 역원뿔 모양으로 증가했다는 도식이 선택된 것이다. 원뿔을 뒤집어놓은 이 그림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적은 것에서 많은 것으로의 예측 가능한 발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이, 설령 변덕스러운 방식일지라도, 좀더 복잡성이 증대되고 정신력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이행한다면, 자기 의식을 지닌 지능의 궁극적인 기원은 그 이전에 등장한 모든 생물들 속에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크 트웨인은 지질학이 전해주는 경악스러운 사실의 함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에펠탑이 지구의 연령을 나타낸다면, 그 꼭대기에 있는 첨탑에 칠해진 페인트의 두께 정도가, 인류가 지구와 공유하는 시간에 해당할 것이다. 에펠탑을 세운 목적이 그 얇은 페인트 막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59
생명의 테이프를 재생한다
버제스 혈암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반영시켜 개정한 도식이다. 해부학적 가능성의 폭은 최초의 폭발적인 다양화가 일어난 시점에서 극대화된다. 그 이후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초기 실험의 대부분이 소멸하고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모형에 기초해서 끝없는 변형을 생성하는 방식이 정착하고 만다.*
* 나는 처음에 발생했던 많은 종들에서 상당 부분이 소멸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계통에 그 이후의 역사가 물리게 되는 이 현상에서 걸맞은 명칭을 지어내려고 안간힘을 기울여왔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 패턴을 ‘키질하기(winnowing)'로 생각해왔지만, 극히 최근에 이 비유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키질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는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원래는 곡식 낟알을 골라낸다는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버제스 시대에 존재한 많은 종 중에서 일부만이 살아남은 것은 마치 복권 당첨처럼 순전히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패턴을 ‘격감(decimation)’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이 말의 어원적인 의미와 일상적인 의미르 결합시킴으로써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려는 중요한 핵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존이냐 사멸이냐 여부는 거의 우연적으로 작동하는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완전한 멸종의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우연성. 원래 'decimate'라는 영어 동사는, ‘10명에서 한 명을 골라낸다’라는 뜻의 라틴어 'decimare'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고대 로마군에서 모반이나 탈주 등의 죄를 범한 병사 집단을 대상으로 널리 행해졌으며, ‘10명 중 한 사람을 제비로 뽑아 처형하는 처벌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멸종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은유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규모.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에는 사멸할 가능성은 모두 동등하게 주어지지만 그 확률이 10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반면 버제스에서 나타내는 패턴은 이와 정반대이다. 거의 모든 종이 소멸하고 극소수가 선택되었으며, 버제스 시대의 주요 계통의 멸종률에 대한 적절한 추정치는 무려 90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62
버제스 이후에 나타나는 제거(elimination) 패턴은 역원뿔형도라는 도식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매우 급진적인 대안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승자가 일반적으로 야기되는 종류의 이유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어쩌면 해부학적 설계들을 가차없이 가지쳐내는 죽음의 신은 행운의 여신이 변장을 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일부 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실제 이유는 형태의 복잡성, 개량, 또는 인류의 출현을 위해 작용한 어떤 원인들에 이루어졌으리라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냉혹한 죽음의 신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 파괴(흔히 지구 밖 천체의 충돌에 의해 촉발되었다)에 의해 유발되는 짧은 대량 멸종 기간 동안에만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생물 집단은 평상시에 성공을 약속하는 다윈주의적 기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유로 번성하거나 사멸할지도 모른다. 가령 물고기가 수중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하더라도 연못이 말라버리면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물고기들 사이에서 웃음거리에 불과했던 볼썽사나운 폐어(肺魚)는 그 난국을 잘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폐어와 그 먼 선조의 지느러미에 발생한 건막류(腱膜瘤)가 임박한 혜성 충돌에 대해 경고했기 때문이 아니다. 폐어와 그 친척 종들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용도를 위해 먼 옛날에 진화한 형질이 상식적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 시기에 극히 우연하게도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 덕택인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폐어의 유산이고 그밖에도 유사한 수천 개나 되는 운좋은 우연들이 빚어낸 결과라면, 과연 인간의 지성을 필연의 산물이거나 예측 가능한 무엇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63
버제스 동물군의 해부학적 특징에 관해
생명은 모순이나 애매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흔히 학자들은 대사상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일관된 텍스트를 산출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곤 한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특정 주제를 연구해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 역시 서로 모순되는 해석 사이에서 씨름을 벌이고, 때로는 양쪽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한다. 더구나 그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결책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다윈의 마음속에서는 진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내적 갈등이 벌어졌다. 그는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진화의 메카니즘을 설명하는 기본 이론―자연선택설―이 진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자연선택 이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물들이 국소적인 환경 변화에 대해 적응적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를―다윈의 표현을 빌자면 “변화를 수반하는 유래(descent with modification)"―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가장 급진적인 특징은 보편적인 진보를 부정하고 국소적인 조정(local adjustment)이라는 개념을 채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1872년 12월 4일자 편지에서 미국인 고생물학자 알피우스 하이야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랜 숙고 끝에 저는 진보적인 발전을 향한 내적 경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After long reflection, I cannot avoid the conviction that no innate tendency to progressive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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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개념은 그처럼 말끔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혼란스럽고, 너무도 중심적인 개념이다.
내가 지금까지 월코트의 해석과 그 해석을 낳은 원인들을 상세히 서술한 까닭은 과학사가 가르쳐주는 가장 큰 메시지로 더 이상 좋은 예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란, 이론은 자료와 관찰에 대해 미묘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실재(reality)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말을 해주는 일은 없으며, 영혼과 사회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과학자는 없다. 과학적 혁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벽은 흔히 개념적인 자물쇠이지 사실의 결여가 아니다. 420
버제스 혈암과 역사의 본질
우리의 언어는 가장 한정적이고 고약한 고정 관념을 나타내는 어구들로 가득 차 있다. 성가신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친구에게 “과학적으로 대처하라”―그 말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분석적으로 대응하라는 의미이다.―는 충고를 하곤 한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교에서는 자연 지식에 도달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단일한 경로라도 되듯이, 마치 하나의 공식으로 경험적 실재에 얽힌 잡다한 수수께끼를 모두 풀 수 있기라도 하듯, 학생들에게 과학적 방법에 대해 가르친다.
편견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휘하는 평범한 호소력을 넘어, ‘과학적 방법’이라는 말에는 실험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계기를 조정하고 있는 남자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개념과 절차들의 집합―실험, 정량화, 재현(repetition), 예측, 복잡성을 제어와 조작이 가능한 소수의 변수로 정리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절차들은 강력하지만 자연의 다양성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역사의 결과들, 즉 그 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면 오직 단 한 차례만 일어날 수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사건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하는 과학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자연을 연구하는 큰 분야들―우주론, 지질학, 진화론 등―은 역사의 도구를 이용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 적절한 방법은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실험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narrative)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이라는 정형화된 관념은 환원 불가능한 역사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자연의 법칙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불변성으로 정의된다. 통제된 실험(controlled experiment) r기법, 그리고 자연의 복잡성을 최소한의 일반적인 원인들의 집합으로 환원시키는 기법은 모든 시대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실험실에서 적절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다. 가령 여러분이 공룡이 멸종한 이유, 또는 와이왁시아가 사멸한 데 비해 연체동물은 번성한 이유를 알고 싶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에 실험실이 아무런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유추에 의해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이라는 제한된 방법으로는 기후 조건이나 대륙의 위치가 오늘날과는 크게 달랐던 아득한 과거의 지구에서 수많은 생물들을 멸종시킨 이 일회적인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역사의 해명은 역사에 단 한 차례 일어난 현상의 서술적인 증거에 근거해서―그 자체의 관점에 의해―과거의 사건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데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와이왁시아의 멸종을 보증하는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들의 복잡한 집합들이 뒤얽혀서 이러한 결과를 확실하게 만들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운좋게도 듬성듬성 존재하는 지질학적 기록 속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 있으면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악기 멸종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외계 천체가 지구에 충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화학적인 흔적이라는 증거가 그 시대의 암석에 항상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사적인 설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종래의 실험 결과와 구분된다. 재현에 의한 증명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하려는 일이 확률 법칙으로나 시간의 화살의 비가 비가역적 측면에서 절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세부적인 독특함을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421-423
불변의 자연법칙하에서의 실험, 예측, 보조가설 등이 역사과학에서 반드시 유효한 방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역사과학이 다른 분야보다 열등하거나, 제한적이거나,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다루는 과학은 다른 설명 양식을 사용하며, 그것은 비교와 관찰의 측면에서 우리의 데이터가 갖는 풍부함에 기인한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관찰(unvarnished observation)이 아니라 대개 추론에 근거한다.(실제로 전자, 중력, 블랙홀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과학의―정형화된 과학이든 역사적인 과학이든 간에―확고한 요구는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분명한 검증 가능성이다. 우리는 어떤 가설이 명백한 오류(definitely wrong)인지 아니면 참일 가능성이 있는지(probably correct)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확실성에 대한 단언은 목사나 정치가의 몫으로 남겨놓자.) 역사의 풍부함은 우리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검증 방법으로 이끌지만, 어떤 방법에서든 검증 가능성이라는 우리의 판단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 사건들의 결과를 기록한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라는 우리의 강점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시킨다. 우리는 과거를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한탄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복되는 패턴을 찾는다. 개별 항목들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지만, 그 밖의 어떤 해석도 뒷받침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증거들에 의해 그 패턴이 나타난다.
19세기의 위대한 과학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은 많은 독립된 원천들이 ‘상호작용해서(conspire)' 역사상의 특정한 패턴을 시사할 때에 얻어지는 확신을 지칭하는 말로, ’일치‘라는 뜻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 부합)‘이라고 불렀다.
나는 찰스 다윈을 가장 위대한 역사적 과학자로 간주한다. 다윈은 생명의 역사의 통합 원리로서 진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전형적인 과학적 방법과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엄밀한 역사적 과학의 방법론을 그의 모든 저작에서―진화에 대한 대저(大抵)에서 지렁이와 산호, 난초 등을 다룬 논문들에 이르기까지―의식적이고 중심적인 주제로 선택했다. 다윈은 다양한 양식의 역사적인 설명을 탐구했고, 각각의 양식들은 보존된 정보의 밀도에 대해 적합한 것들이었다.(Gould, 1986, pp. 60-64) 그러나 그의 중심적인 논거는 항상 휴얼의 부합을 기반으로 삼았다. 우리는 진화가 생명 질서의 근본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발생학, 생물지리학, 화석 기록, 흔적 기관, 분류학적 유연 관계 등이 제공하는 이질적인 자료들이 모두 통합될 수 있는 설명은 진화론 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윈은 과학적인 설명으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원인이 직접 목격되어야 한다는 널리 받아들여진 소박한 생각을 명쾌하게 배격했다. 그는 역사적 설명에 의한 부합이라는 관점에 호소하면서, 자연선택이라는 적절한 검증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425-427
나는 지금 임의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A에서 D에 이르는 결과로 E는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중심 원리인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설명은 자연법칙에 의거한 직접적인 추론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선행하는 상태들의 예측 불가능한 순차(順次)에 그 토대를 둔다. 이 순차의 어느 단계에서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면 최종 결과가 발견될 것이다. 따라서 최종 결과는 그 이전에 나타난 모든 사태에 의존하며, 그런 의미에서 우연적이다.―이것은 지을 수 없고, 결정적인 역사라는 서명(signature)이다.
많은 과학자와 관심 있는 일반인들은 대부분 ‘과학적 방법’이라는 정형화된 개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연성이라는 설명이―그 적절함이나 본질적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조차도―훨씬 덜 흥미롭거나 덜 ‘과학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428
그러면 일군의 역사적인 설명이 있고, 그 설명들이 전통적인 과학적인 설명과 마찬가지로 충분한 증거를 갖추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결과들은 어떤 자연법칙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과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 결과들은 좀더 큰 체계의 일반적 특성이나 추상적 특성을 (예를 들어 인구나 산업적인 우위 등) 통해서도 예측할 수 없다. 과연 이러한 설명들이 좀더 전통적인 과학 결론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 세 가지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그러한 설명에도 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신뢰성의 문제. 증거에 의한 증명이나 대립 가설의 반증에 의한 진리 가능성 입증 등에서 전통적인 과학의 설명과 완전히 동일하게 확증적일 수 있다.
2. 중요성의 문제. 역사적인 우연성에 근거한 설명이 동등한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거의 부인할 수 없다. 남북전쟁은 미국사의 중심적인 사건이고 전환점이다. 인종, 지역주의, 경제력과 같은 중심적인 문제들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어도 되는, 남북전쟁이라는 대사건의 영향이다. 만약 현생 생물들의 분류학적 지위나 그 상대적인 다양성이 진화의 일반원리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 역사’의 귀결이라면 우연성이 자연의 기본 유형을 설정하는 것이다.
3. 심리적 측면. 우선 앞에 서술한 부분에서 나의 변명이 조금 지나쳤던 것 같다. 역사적인 설명이 흥미로움의 측면에서 뒤떨어질 수 있고 동등성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서 심지어는 열등감이라는 수사까지 사용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런 변명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설명은 그 자체로 끝없이 매력적이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연 법칙의 냉혹한 결과보다 사람들의 영혼에 훨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끝없는 숙고를 통해 그것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런 사건들에 감동받는다. 그에 비해서, 필연성과 진정한 임의성이라는 일반적인 이분법의 양쪽 끝은 대개 우리의 감정에 그런 정도의 충격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의 주체나 객체에 의해 제어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계속 나아가든지 아니면 다른 경로로 방향을 돌릴 뿐이다. 거기에는 그 무엇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연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우연성은 우리를 그 속으로 끌어들이고, 우리는 승리감이나 비극의 아픔을 공유한다. 반드시 그런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음을 깨닫고, 사태 진전의 어떤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른 경로로의 연속적인 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개별 사건들의 인과적 힘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들을 놓고 주장을 펴고, 한탄하고, 기뻐할 수도 있다. 미세한 것들도 모두 결과를 바꿀 힘을 갖기 때문이다. 우연성이란 편자에 박을 못이 없어서 멸망한 왕국의 이야기처럼 당면한 사건들에 의해 운명이 제어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유달리 가슴 아픈 비극인 까닭은 테이프를 되돌릴 수 있다면 천 가지 서로 다른 이유에 의해 50만의 인명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래쪽 대(臺)에 전사자 명단이 새겨진 병사들의 동상을 마을 입구나 군청 청사 앞에서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진화는 이렇듯 기묘한 사건들의 연쇄가 두 번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의 진화는 기쁨이자 경이이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연성은 역사에 참여하고 우리의 영혼이 반응할 수 있게 해주는 허가증인 셈이다. 629-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