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영생의 지체들과 생명의 말씀으로 교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만난 모든 자는 복음과 생명의 은혜에 열린 자, 주님께서 보내신 영혼들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나팔수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바, 미지근한 반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제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돌아보며 ‘웬 은혜인가!’ 감격할 뿐입니다.
교만하여 시큰둥했던 저를 뜨거움으로 반응하는 자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기에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잡초처럼 돋아나오는 악한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본문 주해)
31~34절 :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은 안식일 전날(준비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다리를 꺾고 시체를 치워달라고 하였다.
그 안식일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날로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큰 안식일을 기분좋게 지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그대로 두지 말고 빨리 죽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고도 하나님은 섬기는 일에 열중한다.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하는 자는 종교적 행위에 철저할 뿐이다.
원래 십자가형이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달아놓고서 말려 죽이는 것이다. 몸이 강한 자는 죽지 않고 며칠씩 십자가에 달린 상태로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금요일 못 박았고 내일이 큰 안식일이니 시체를 빨리 치우고자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의 다리를 꺾는 것은 피를 통하지 않게 하여 죽음을 재촉하는 방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다리를 꺾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군병들이 예수가 아닌 두 사람의 다리를 꺾고 그들을 죽게 하였고,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기에 군병들은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한 군병이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고,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
로마 군인이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나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이는 가장 깊은 진리를 가리키는 사건이 되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가 참으로 인간이었고, 실제로 죽었음을 증거한다.
예수는 확실히 죽으셨고, 그의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
바로 물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피는 살과 함께 생명을 주는 아들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35절 : 예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증인이 있다
바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증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6~8)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는 이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십자가 아래에서 영생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믿음에 이르고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36~37절 : 예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성경을 말씀을 다 이루심이다.
예수의 뼈가 꺾이지 않은 것과 자신들이 찌른 자를 본 군병들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됨을 본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뼈가 꺽이지 않는 것과, 예수님께서 찔림을 당하시는 것까지 모두가 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다.
38~42절 :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이다.
이들은 예수의 생전에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인정하지 못했으나, 예수가 처형된 후에는 공개적으로 나타나 예수를 장례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자였고(마27:57),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으며(막15:43),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공의회에서 예수를 죽이자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은 자(눅23:50~51)였다.
니고데모는 요셉처럼 공회원으로서 전에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자이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다. 백 리트라는 32.7kg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인데, 이같이 많은 양은 보통 왕족들의 장례에 사용되었다.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미리 준비한 자신의 무덤이라고 마태복음(27:60)에서는 말한다.
이 장례는 안식일 전에 끝내야 했기에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신속히, 그러나 예를 갖추어 진행되었다.
(나의 묵상)
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며 죽으셨다.
‘혹시나 어떤 기적이라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십자가 곁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비참하고 무력하게 죽고 말았다.
마리아를 부탁받은 요한의 마음도 무너졌고, 십자가 곁에 머물렀던 여인들의 마음도 무너졌으리라.
십자가에서 비참하고 무력하게 죽은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가?
어제 묵상에서 창세전 하나님 아버지의 뜻-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묵상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의 이루심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구약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뼈가 꺽이지 않는 것과, 예수님께서 찔림을 당하시는 것까지 모두가 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구약이 증거 하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이 내 안에 가득 차오른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의 고백을 통해 신구약을 넘나드는 말씀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오늘 등장하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십자가로 가까이 이끌어내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세상 속에서 여러모로 대단한 위치에 있던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만큼 높은 권세를 가지지 못한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고민과 착잡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보았지만 그 진리를 따르기에는 손실이 너무 큰 인생들이 아닌가? (아니 그저 손실 정도가 아니라 죽음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도 나타내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 주님이 죽은 마당에, ‘게임 오버’ 된 이 시점에 굳이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낸 필요가 어디 있을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을 노출시켰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의 마음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들의 용기를 그들 자신의 결단이라고 생각하여 요셉처럼, 니고데모처럼 용감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고 쭈그러들어 자책하는 행동은 이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능력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죽으셔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오늘날 내게 임하셔서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같은 것이다.
구약의 말씀을 이루셔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시고, 높고 귀한 신분인 이스라엘 공회원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초라한 예수의 제자로 이끌어내시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인 것이다.
내게 임한 십자가의 능력이 너무도 감사하다.
나 스스로는 불가능 100%의 십자가의 삶, 여전히 오르지 못할 태산을 바라보는 느낌의 십자가의 삶이지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니 때로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때로는 놀라서 떡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용히 따른다.
나를 부인하는 삶을 사니 자랑, 시기, 질투, 미움이 무의미할 뿐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갑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보다 연약했던 때, 그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니 영혼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기도하게 된다.
다 풀어내면 끝이 없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들도 십자가의 다 이루심임을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장차의 나의 모든 삶 역시 성령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믿으니, 곧 평안인 것이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오늘도 계속된다.
(묵상 기도)
주님,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아들의 죽음을 봅니다.
숨어서 한숨 쉬는 자들을 빛의 자리로 이끌어 내시니 아들의 죽음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고 기뻐 춤추는 자가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베드로의 말을 되풀이하는 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려가자’ 하시면 그것도 좋아합니다.
성령께서 언제나 동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오늘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