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11일(화)
* 시작 기도
(요 1:15) 요한이 그(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주님...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언은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앞섰다고 말하는 것은 육신의 출생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그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재(先在)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분은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나셨습니다(요 5:26).
그렇게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므로 완전한 사람도 되셨습니다.
나는 오늘 나의 주요 그리스도이신 그 분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죄 많고 허물 투성이입니다.
이런 나를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종으로 살기 원합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오니 거룩한 불구자로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기사 사분오열된 이 나라가 다시 하나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20:1-10
제목 :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 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준비일에 십자가에 죽으셨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둔 새 무덤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3일이 지났다.
안식일이 지난 첫날,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
다른 성경의 병행구절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함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가 두었다가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요한복음에서도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 나오지만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주님이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알리는 여인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복수의 여인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이 또한 공관복음에 의하면 무덤에 도착한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일행은 무덤에서 천사를 만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마 28:5-7)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럼에도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믿게 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믿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그들이 있던 곳에서 나와 무덤을 향하여 달려간다.
둘이서 함께 달려가다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무덤 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허리를 숙여 무덤 안을 보고 거기에 세마포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 뒤따라온 베드로는 지체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세마포가 놓여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무덤 안 다른 곳에 머리를 쌌던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를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런데 ‘개켜 있더라’로 표현된 헬라어 ‘엔테튈리그메논’의 원형 ‘엔튈릿소’는 한글개역성경처럼 ‘잘 포개어 접다’는 의미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토대로 개역개정성경은 이를 잘 번역해 놓고 있다.
(7절)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며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했다고 한다면 촌각을 다투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다른 곳에 그것도 원래 머리를 쌌던 모습 그대로 있을 리 만무하다.
또한 예수님의 시신을 급하게 훔쳐가면서 머리를 쌌던 수건 채로 훔쳐가지, 수건을 두고 갈 리도 없을 것이며 원래 있던 모습대로 잘 챙겨두고 갈리는 더더욱 만무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마치 고치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예수님의 머리를 싸맨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었으나 그 육신이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모든 문들을 닫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문을 열지 않으시고 그대로 벽을 통과하여 제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는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와 똑같은 육체가 아니라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 몸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 예수님의 몸은 이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죽을 몸도 거룩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며 이미 죽은 자들은 거룩한 몸 곧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의 몸이 이처럼 거룩한 몸,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함이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한편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던 다른 제자도 이제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에서 예언한 부활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였다.
9절 말씀은 다른 제자 곧 요한의 부가적인 해설이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이미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고 예언하였다.
(행 2:30-31)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말씀은 다윗의 시인 시편 16:10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은 예수님 오시기 천 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도 믿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믿지 못하였다.
이들은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후에야 믿게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비로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완전한 성취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행 2:27-28)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유대인들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내용이다.
한편 무덤에 들어갔던 두 제자 곧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부활하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이 너무나 답답한 것은 이 두 제자들의 영적 우둔함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책망하거나 답답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은 나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둔한 자요, 미련하며 정말 깨닫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지식적으로 아는 ‘(헬)오이다’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가 목사요 선생으로 서 있었으니 나를 통하여 주님을 알기 원하는 많은 성도들은 오죽 했으리요?
얼마 전 어떤 이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증거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나의 의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목사로서 설교를 하고 나면 항상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곧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이는 내가 설교를 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도 아니요,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설교는 오직 하나님이 전하기 원하시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을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아들의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생각을 전하면서 말씀을 그 근거구절로 이용하였고, 온갖 재미있는 유머를 가져다가 성도들의 마음을 열고자 웃기려고 애를 쓰는 자였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여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 받았노라는 반응을 얻으려는 나의 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말씀 도둑질을 서슴지 않았고,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죄인 중에 괴수인 자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심판하셨고 나를 무덤으로 넣으셨다.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던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다.
이 복음을 통하여 심판을 통한 무덤이 주님의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나의 무덤은 무덤 그 자체이지만, 나의 무덤이 주님의 무덤과 연합될 때 그 무덤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수많은 인생들의 무덤은 그저 무덤에 지나지 않으나 주님의 무덤만큼은 생명으로 나오셨다.
따라서 나의 무덤이 주님의 무덤과 연합될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주님의 무덤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으며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 것이다.
오늘 나의 생명은 어제의 생명과 다르다.
오늘은 다시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연합하여 또 다시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영적 하루살이로 살아간다.
어리석고 우둔하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그리고 생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던 내가 이제는 담대하게 그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간다.
나는 정말 말 주변도 없고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정말 신이 나고 기쁘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있고 또한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믿는다.
나의 남은 생을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하여 드리길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적으로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과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자들의 우둔함으로 인하여 답답해 할 자격이나 있는 자인가요?
나야말로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앞뒤가 꽉 막혀 있는 자인데 말입니다.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머리로만 아는 ‘오이다(지식적인 앎)’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나를 우리 주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나이다.
심판을 통하여 무덤에 내려가게 하셨으나 나는 심판도 무덤도 알지 못했기에 그저 제자들처럼 두려워하며 벗어나고자 애를 쓸 뿐이었나이다.
심판과 무덤은 해결해야 될 문제였기에 주님께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과 무덤이 복음임을 나중에야 깨닫고 알게 되었나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이제는 주님의 생명을 얻어 하루하루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자 되었사오니 오늘 하루가 새 생명으로 사는 주의 날 되게 하시고 영적 하루살이로 이 날을 담대하게 살게 하소서.
오늘 생명은 오늘 살게 하시고 내일은 또 내일 주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마르다의 고백처럼 주님의 재림 때에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로 누리는 영생이게 하소서.
나의 전부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