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격 없는 자,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정결케 하여 하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본문 주해)
1~2절 : 마리아가 안식일 다음 날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린다. 그녀는 적대자들이나 도굴꾼들이 한 짓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알린 것이다.
2절의 ‘우리가’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자들은 마리아와 다른 이들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네 복음서 모두 여인들을 언급한다.
3~7절 :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속히 무덤으로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요한이 몸을 굽혀 무덤을 살핀다.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이어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개켜 있더라는 말은 착착 접어서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쌌던 형태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세마포도 몸을 쌌던 그대로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몸만 그대로 빠져나간 것이다.
8~10절 :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새번역)
그제야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무덤의 모든 흔적을 보고 요한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어렴풋이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나의 묵상)
8절에 요한이 무덤 안의 흔적을 보고 ‘믿었다’고 한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을 믿은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은 의외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소식을 알리며 난리를 쳤어야 하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왜 이런 반응일까?
요한복음 21장 3~4절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20장(19~29절)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직접 만난 이후인데도, 21장에서 베드로가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잠시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건(20:1~10), 또는 잠시 놀라고 기쁜 사건이 되었지만 다시 무덤덤해지면서 그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21:2~3)이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한 도마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 보이셨는데도 그들의 태도는 맥아리가 없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자들이 ‘부활’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신 것이고, 나는 나의 생업과 세상의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는 식인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여전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시면 그때 한 자리를 꿈꾸고 있었는데,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나 이젠 그 ‘한 자리’가 물거품이 된 상황이니 무력감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부활 신앙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무력감은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 상태와 비슷하다.
과거 나에게 ‘부활 신앙’이라는 것은 매년 부활절 행사 때나 잠깐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종교생활)을 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 나도 부활시켜 주신다. 그래서 천국에서 살게 되겠지....그런데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 나의 당면 현실 상황이나 문제해결이 더 급하다..... ’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 새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실패와 좌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활 신앙은, 일평생 종노릇하던 사망 권세에서 벗어났으니, 현실의 상황을 뛰어넘어 예수 안에서 자유하며 살아가는 신앙인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인가? 부활하셨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었던 무력한 물음표와 말없음표....그들처럼 무덤덤한 부활을 생각했던 내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주님의 부활이 기쁨의 느낌표가 되어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이 종말의 때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빈 무덤을 보고도 무덤덤한 베드로와 요한,
그것은 부활의 참의미를 모르고 살았던 제 모습이니
부활의 능력이 없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참으로 비참한 자일 뿐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종말의 때를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되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