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Gaetano Scirea
국적: Italia
생년월일: 1953년 5월 22일
( 死 1989년 9월 3일)
출생지: a Carnusco Sul Naviglio
키/몸무게: 178cm/75kg
포지션: DF(정확히 Libero)
A매치 데뷔전: 75/12/30 vs Greece
A매치 출장/득점: 78/2
세리에A 데뷔전: 72/9/24 vs Cagliari
유베소속 리그 데뷔전: 74/10/20 vs Varese
유럽대회 데뷔전: 74/9/18 vs Vorwarts
유베 총 출장/득점: 552/32
유베/아주리 백넘버: 6/7
SEASON CLUB GAMES GOALS
1972/73 Atalanta 20 0
1973/74 Atalanta 38 1
1974/75 Juventus 28 0
1975/76 Juventus 30 0
1976/77 Juventus 30 1
1977/78 Juventus 29 0
1978/79 Juventus 30 2
1979/80 Juventus 29 4
1980/81 Juventus 29 4
1981/82 Juventus 30 5
1982/83 Juventus 30 3
1983/84 Juventus 30 2
1984/85 Juventus 30 2
1985/86 Juventus 25 0
1986/87 Juventus 21 0
1987/88 Juventus 6 1
유베에서 들어올린 우승 타이틀
스쿠뎃토: 7회(1975,77,78,81,82,84,86)
코파 이탈리아: 2회(1979,83)
챔피언스 리그: 1회(1985)
컵 위너스 컵: 1회(1984)
UEFA컵: 1회(1977)
유로피언 슈퍼컵: 1회(1984)
대륙간 컵: 1회(1985)
1989년 9월 3일은 클럽 유벤투스에게 있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탈리아라는 국가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날 이었다.
선수 생활을 접고, 그동안 가족에게 신경써주지 못한 부분을 채워나가려는 국민적 영웅인 '리베로' 가에타노 시레아가 이국인 폴란드에서 차 충돌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신이 축구선수로써 너무나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닌 그를 시기한 것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채 40줄에 들어서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탈리아가 낳은 베켄바워
60년대 후반 세계 축구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는 축구선수로써의 모든 것을 지닌 수비수였다. 그의 냉철함은 상대 공격수를 소름끼치게 만들었고, 그의 그런 위풍당당한 모습에 넋이 나간 듯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었다. 그는 일종의 '그라운드 위의 사령관'이나 진배없었다. 내가 갑자기 베켄바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하다. 베켄바워가 세계축구에 '리베로'라는 '골든 키'를 가져다 주었다면, 시레아는 그 '골든 키'를 가지고 '골든 박스'를 열어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옛 고어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류는 본류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학문과 진술에는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 현대축구에선 점점 사라져 가고있는 포지션인 '리베로'에서 그리고 그 역할을 맡았던 선수중에서 '베켄바워가 전부다'라고 평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시레아의 경기를 보라'고 말해준다. 그는 전세계 축구팬들이 '베켄바워만이 지녀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일종의 룰과 같은 공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시레아는 베켄바워가 가지고 있던 수비라인 컨트롤, 침착성, 냉철함 그리고 공격적 재능까지 모두 판박이처럼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유럽축구 역사에 남은 유일무이한 5人
유럽축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말 축구가 유럽에 뿌리를 가지고 있긴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만드는 기록이 하나있다. 유럽선수로써 UEFA와 FIFA에서 주최하는 모든 대회 트로피를 거머쥔 사람이 딱 5명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5인중 4명 이상이 전부 이탈리아 출신의 선수들이고 전부 유벤투스에 소속되있던 선수들이다. 82년 베아르조트호의 아주리니였던 또 다른 유베의 전설 안토니오 카브리니, 세르지오 브리오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인 가에타노 시레아이다.(나머지 두 명은 8,90년대 초까지 유베의 골문을 지켰던 스테파노 타코니와 네덜란드의 대니 블린트이다.)
아주리 군단의 핵심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수비진'의 리더로써 그는 근 10년간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했고,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1982년 베아르조트호의 멤버로 이탈리아에게 세번째 대관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그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수비수이자 리베로였다. 당시 아주리를 이끌었던 엔쪼 베아르조트는 자신이 봐온 최고의 선수로 시레아를 언급할 정도였고, 세상에서 가장 전술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라는 평을 했을 정도니 가히 그의 플레이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은 명장 베아르조트가 집어낸 그의 능기에 관한 발언이다.
베아르조트曰: "어찌보면 경기를 보는 사람입장에서 그는 대인마크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건 정말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는 상대 공격수가 두려워서 바짝붙어 수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 공격수가 자신의 수비진영으로 다가올때, 그는 이미 다음 상황을 내다보고 플레이 하죠. 공을 키핑하며 다가오는 공격수가 다음 진로로 패스나 슛팅을 하기 전에 미리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상대적으로 대인마크를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그러니까 예를들면 안토니오(카브리니)와 같은 선수에게 그 공격수를 쉽게 마크할 수 있도록 유인시킵니다. 그리고 역습시엔 자신의 발끝에서 팀 전체의 공격을 창조해내지요. 이러한 능력들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타고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베켄바워와 정말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어요."
그리고 현역시절의 그는 세계에서도 가장 깨끗한 수비를 하는 선수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퇴하는 순간까지 국제적인 레벨의 경기들에서 단 한번도 퇴장을 당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의 엄청난 플레이적 가치를 더욱 높여줄 수 있는 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국인 이탈리아를 떠나서 현재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정평이 나있는 선수들은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진정한 수비와 스포츠맨쉽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느꼈고 아직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의 시작
그가 태어난 곳은 밀라노안에 있는 나빌리오라는 곳인데, 그는 어린시절부터 이미 수 많은 자국의 슈퍼스타들을 지켜보며 축구선수가 되야겠다는 꿈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여느 소년들 못지않게 축구를 좋아하고 공 차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15살이 되던 해에 이미 밀라노의 군소 유소년 클럽에서도 눈에 띌 만한 실력을 갖춘 유망주로 성장하고 있었다. 15살의 이 소년은 체격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과는 차별적인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편의 동료 수비수들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시키고 이끄는 리더쉽을 보여주었고, 생각하는 축구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년후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아탈란타 유소년 클럽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근 2년간 프리마베라 무대를 평정하고 19살의 나이에 클럽 아탈란타의 1군 소속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1974년 이제 막 21살이 된 시레아는 일찍이 프로무대를 겪은 만큼 두려울 것이 없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이듬 해에 이탈리아의 명문 중 명문인 유벤투스의 간청하에 결국 계약을 맺게 되었다. 당시 서독 월드컵을 우승시킨 최전성기의 배켄바워에게 도전장을 내밀 듯이, 또 다른 전설이 토리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JUVE e AZZURRI
그가 은퇴했던 88년을 끝으로 그의 커리어의 출장/득점 수의 스탯을 보면 세리에A 무대 총 397경기 출장 24골의 놀라운 기록을 볼 수 있다. '자이언트'라고 칭해지는 유벤투스에서 그는 그의 커리어의 확실하게 빛내줄 수 있는 순간들을 보낸다. 그리고 그가 유베에 머물던 시즌동안 7번의 리그 우승과 두 차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각각 한 차례씩의 유럽 및 세계 대회 우승을 거머쥐는 말그대로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후에 사키의 밀란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라운드위의 사령관 시레아와 그라운드 밖의 사령관인 트라파토니가 이끌던 유베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클럽이었다.
윗줄 디노 조프 옆으로 두 번째가 시레아
아주리의 모든 수비와 공격은 그의 전두지휘하에 있었다.
시레아가 트라파토니와 함께 유베의 우승 세레모니를 펼쳤다면, 국가대표에서는 엔조 베아르조트와 함께 그 세레모니를 펼쳤다.
74년 유베에 갓 입단한 21살의 '청년' 시레아는 그리스와의 친선전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 대회 2회 우승의 자랑스런 역사를 지닌 푸른 군단의 선수로써 데뷔전을 가지게 된다.
이후 그는 베아르조트와 함께 1978년,82년,86년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고, 1980년 유로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베아르조트가 지휘봉을 잡은 아주리 군단은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토리노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과거의 아주리의 강함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선수 말년이었던 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끝으로 그는 더이상 아주리 군단의 넘버 원 수비수로 군림할 수 없었다. 라이벌 클럽인 AC밀란에서 성장하고 있던 또 다른 천재 리베로 프랑코 바레시가 이미 아주리의 새로운 전력으로 구축되었고, 그는 그것을 자연스레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정한 수비수
시레아는 생전에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고 한다.
시레아曰: "내가 전력을 다해도 막기힘든 선수는 마라도나 뿐 이다.
그는 거의 모든 공격적 재능을 갖추고 있다."
1986년 월드컵 조별에선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4년전 최고의 짝꿍 스위퍼로 활약했던 시레아-콜로바티 라인을 천천히 붕괴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축구선수중 한 사람인 마라도나는 본인의 은퇴시기가 다가올 즈음 오래전 시레아의 칭찬에 답문하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마라도나曰: "요즘 수비수들은 어떻게든 손과 발,머리를 이용해
상대 공격수를 위협하려고만 한다. 그들은 시레아의 그것을 닮아야 한다."
출처 유베당사 춤추는알레님
첫댓글 바레시와 비교해 어떤가요? 바레시는 밀란에서 536경기 스쿠데토 6회, 유러피언컵 3회란 것만 알고 있는데..
70년대에 베켄바워 80년대에 시레아 90년대에 바레시 이 셋이 대표적인 리베로 선수이죠 뭐 최고레벨선수끼리 비교하긴 거시기하지요...답이 안나오는 이야기니...그래도 어쨋든 바레시가 82년에 아주리에 데뷔했음에도 86년에 시레아가 은퇴하고나서야 아주리에서 리베로를 볼수있었죠...베아르조트감독이 유베수비진들을 선호한 이유도 있습니다만은...채널4에서 선정한 역대 아주리 베스트 11에도 리베로자리에는 시레아가 뽑혔더군요...
이탈리아 올드팬들은 실력은 거의 호각이라고 보는 듯해요. 다만, 프랑코 바레시와는 달리 가에타노 시레아는 월드컵 대관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시레아쪽에 조금 더 점수를 주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풀경기 딱 하나 봤는데 하필 좀 평범한 경기였는듯. 아님 내가 볼 줄 모르거나.
말디니와 비교를 해보면?
말디니가 지금현역이라서 위대함을 더느끼는사람도있고 덜느끼는사람도있지요 데뷔부터 은퇴를 앞둔 지금까지 20년간 밀란에 있었고 커리어도 뒤지지않으니 저는 말디니
시레아선수때문에 바레시 국대에서 못뛴거아닌가.. .ㄷㄷㄷ 그만큼 대단한선수 감독의성향이지만
감독 성향이 시레아를 선호했다기 보다는 당시 카테나치오 절정의 유베 3백을 그대로 국대로 가져다 썼기에 그런겁니다 때문에 꼭 바레시가 시레아한테 밀렸다고 볼수도 없죠
사실상 바레시가 한세대 뒤 아닌가요. 겹치는 기간도 좀 있겠지만 전성기의 나이가 있는법.
그냥 위대한 한선수 은퇴하면 거물급이 바로 나오니 ㄷㄷㄷ
나도 인정함ㅋㅋ
난 리베로하면 명보형밖에 없음..
시레아!
오랫만에 축구 지대로 볼줄아는 분은 만났네요. 리베로라는 보직에서는 감히 가에타노가 최고였죠. 적절한 프리롤적인 공격가담과 타고난 리더십까지 겸비한. 개인적으로 젊은 네스타를 봤을 때 시레아의 플레이를 기대했지만, 특히 밀란와서는 부상이 잦아지면서 파체티나 시레아 반열에 까지는 오르지 못하는거 같더라구요...... 베아조르트, 사키 시절의 수비라인이 그립네요.
역겹네~ 축구 오래본 사람들만 축구 지대로 볼줄아는거냐? 암튼 무식하다...축구 오래본 건 자랑이 아냐...
세레머니가 똑같네
좋은 글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