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2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 이들이 예수를 보았다고 전하였으나 그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그 자리에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완악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막 16장).
주님과 늘 동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는데 내가 뭐라고 흔들리지 않으리요?
하지만 나를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큽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상념들은 주의 보혈로 싹 씻어주시고 주님으로만 가득 채워주소서.
늘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평초와 같은 나를 주의 강한 손으로 장악하여 주사 날마다 아버지 품속에 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20:11-18
제목 :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나의 묵상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자인 것 같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지만 여자의 몸으로 다른 곳도 아닌 무덤에, 그것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미명에 말이다.
그 사랑이 그녀를 그토록 담대하게 만든 것일까?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부터 추억이 많았다.
그녀는 누가복음 8:2절에 의하면 일곱 귀신 들렸었는데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고침을 받은 여인이다.
또한 누가복음 7:37-38절에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의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은 뒤에 향유 담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남달랐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심지어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뒤에도 남아서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았으며(요 19:25), 예수님이 운명하신 뒤에는 제자들이나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가장 먼저 보기도 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남달랐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보이신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사랑을 가진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 주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서 울면서 무덤 안에 있던 천사들과 대화를 한다.
천사들이 왜 우느냐고 묻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다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고 뒤돌아섰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인 것을 몰라보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볼 때 마리아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전의 예수님을 아무리 많이 알고 사랑했다 할지라도 그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았다는 것, 즉 부활의 주님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사실을 간과하였거나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눅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동행하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지낸 자들이었으며 심지어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다는 소식도 들었던 자들이다.
심지어 제자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확인하였는데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신다.
이처럼 영적 눈이 가려지면 예수님을 예수님 곧 구주로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뿐 아니라 또 있다.
바로 내가 그런 자였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의 주님은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분이었다.
그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알고 전하였다.
십자가 복음이 중요한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아버지께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십자가를 알고 믿는다 해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게 되어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몰랐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됨으로 그의 어두운 눈과 지각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눈이 가려져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몰랐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떡을 먹을 때에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눅 24:13-35).
그 일이 있은 후 즉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과 부활의 주님이 떡을 떼어 주심으로 자기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었던 일들을 말하였다.
나 역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주 편협하여 부분적으로만 아는 자였다.
목사이면서도 십자가복음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장사복음은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부활복음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다지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고 잘 전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수도 없이 롬6:4절 말씀을 읽었으면서도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이들처럼 눈이 가려져 무덤에 계신 주님이나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로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또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 땅의 것을 구하여, 보란 듯이 성공하고 부요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땅의 것으로 맴돌기만 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고 부탁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 말씀은 부활의 주님만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또한 우리들도 가야 할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임을 정확하게 알려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만물 안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버지 집, 그 나라에 갈 때에 비로소 만족할 수 있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땅의 것에 치심하지 말고 아버지의 집에 나의 마음을 두라고 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연민의 정으로만 안타까워했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주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연민이 어쩌면 우리의 영적 눈을 가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주님이 당하신 아픔을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살리셨다는 것이요, 무덤에 누우신 주님과 함께 나도 장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래서 나의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십자가와 무덤은 나의 죄인 된 옛 사람을 못 박고 끊어버리는 것이며, 부활은 새 생명으로 살아나 주님과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 편협된 것이 아니라 통합된 복음으로 나를 온전히 살게 하였으며 땅에 치심하지 않고 오직 영원한 그 나라, 창세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나이다.
나를 죽이고 다시 새 생명으로 살리신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신 그 영광을 저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주님으로 인하여 오늘도 아들의 생명으로 나아가오니 이 종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