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승과 수도원의 영적 세계를 부러워하고 질투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러한 부러움과 질투는 이 지극히 세속적인 수도승들이 추구하는 신성神聖의 세계로 들어감에 따라 점차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들은 신이 우리에게 현세적인 앎과 기쁨을 선사했다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세속적이다. 마음이 가난한 모든 영적 순례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피터 고메즈(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 포스트모던 시대에 뉴스케테 수도승들의 솔직한 발언과 통찰은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다. 이 광야의 탐색자들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참신한 동?서방 수도원 전통의 광범한 지혜와 비잔틴 전례의 풍부함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모든 사물의 심장에 깃들인 신의 은총과 연민을 발견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 속에서 인생이란 곧 해방과 거듭남 그리고 도전임을 깨닫게 된다.
―프랭크 T. 그리스올드(미국성공회 대주교)
● 현재 유행하는 개인주의적 영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영적 스승을 모시는 것, 명상, 성서를 읽고 삶에 반영하는 것, 조용히 묵상하고 규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전례에 따른 예배와 공동체의 가치가 아름답고도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
[출판사 서평]
《행복을 꿈꾸는 수도원》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며 그것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파한 ‘행복론’이다. 저자인 뉴스케테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이 책에서 수십 년간 수도생활에 정진하면서 얻은 행복에 대한 경험과 생각들을 솔직 담백하게 풀어놓고 있다.
원래 로마(서방) 가톨릭에 소속되어 있었던 뉴스케테 수도승들은 동방정교회의 전례를 따르는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건설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동방정교회의 수도 공동체가 고대로부터 보존해온 순수한 종교적 이상과 단순한 삶의 원리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회원의 대부분은 서방 크리스천 전통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쩐 일인지 동방 그리스도교 신앙에 마음이 끌렸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언제나 교회 간의 분열 상황에 특별히 민감해왔으며, 나름대로 사람들 사이에 이해의 가교를 놓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우리는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동등하게 대접하며, 공동체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올곧게 살려고 애쓴다. (본문 466쪽)
‘단순한 삶’을 통해 뉴스케테 수도승들이 걸어온 영적 여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인간 존재는 행복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수도생활 역시 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길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경박한 세속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한 삶,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수도승들도 행복을 꿈꾼다 뉴스케테 수도승들은 가톨릭 전통을 따르되 교조적인 관습과 제도를 거부하며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은 저 하늘 위 하느님의 나라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종교적인 편견을 비판한다. 행복을 어떤 완벽한 상태로 상정할 때 불행이 생겨나며, 행복이란 바로 이 지상에,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도승들은 행복을 “깊고 영구한 내적 평화”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때, 또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며 그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온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모시며 사는 수도승들답게, 그들은 하느님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참 행복으로 가기 위한 절대적인 관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롤로그>에 명시되어 있듯이, 이 책은 일반적인 신앙 입문서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 신자뿐만 아니라, “영성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볼 만한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이들”의 영적 사색과 성장을 위해 수도원의 지혜와 통찰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수도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생활이 수도원 안에 사는 사람들이나 밖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할 말이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수도생활이란, 참된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을 공유하고 숙고하기 위하여 수도승이 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종교적이 되거나 특별히 경건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침묵과 묵상의 분위기에서 참을성 있게 탐구해나가노라면, 그 대답은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50쪽)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영적인 삶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담아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 많다. 지극히 인간적 삶을 지극하게 추구하는 것이 곧 신의 뜻임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질을 깊이 있게 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가르침들이 책 속에 알알이 들어차 있어, 종교에 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종교에 관심은 있으나 기성 종교권력의 박제화된 가르침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만한 대목들도 많이 있다. 수도승들은 근본주의 복음 전도사들이 떠들어대듯이 무조건 “할렐루야”, “아멘”만 외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성서의 말씀을 곧 하느님의 뜻으로 절대 숭배하는 성서지상주의, 무비판적으로 전통을 따르는 교조주의 등을 매섭게 비판하며 창조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들의 사상과 실천은 기독교계의 분열상을 통합하고자 하는 에큐매니컬 운동에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가톨릭 교단뿐만 아니라 각계의 종교인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수도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 이 책은 ‘구도자’라고 불리는 청년이 수도원에 들어와 차츰 영적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줌으로써, 정교 가톨릭(Orthodox Catholic, 동방정교회의 공식 명칭) 수도원의 경건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미국의 《퍼블리셔스 위클리》지는 이 책에 대해 “전례에 따른 예배와 공동체의 가치가 아름답고도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수도승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수도원 생활의 원리와 규칙, 전례,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통 수도승 하면 고행이나 경건주의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뉴스케테의 수도승들은 거창한 사제복 대신 평복을 입고 생활한다. 또 자립 수단으로 셰퍼드를 키우고 개 훈련 지침서 및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하여 판매한다. 그래서 때때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수도승들의 뜻은 단호하다. 면벽 수도의 고독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도원적인 삶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참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온 세계가 그 자체로서 경외롭고 경이로운 수도원”이라는 것이다.
▷구성상의 특징 이 책은 뉴스케테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우리’라는 대명사는 뉴스케테의 모든 수도 공동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수도승들의 모임을 통해서 오랫동안 토론해온 내용들을 토대로 하여 실제적인 저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로렌스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 축인 ‘구도자’는 진지하게 영성생활을 추구해온 각 수도승들의 인생 이력을 반영하여 꾸며낸 인물이다.
책의 다채로운 플롯 및 서술 방식은 종교철학적 에세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①‘구도자’가 수도원에 들어와 로렌스 신부의 인도 아래 차츰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대한 소설적 구성, ②영적 수련의 과정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 ③수도승들과 방문객들의 대화, ④영적 깨달음에 관한 다양한 우화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 본문 소개
1장 구도자
평소 영적인 삶을 꿈꾸어온 ‘구도자’는 우연히 뉴스케테 수도원 원장인 로렌스 신부의 글을 읽고 수도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수도생활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 뉴스케테를 방문한 그가 수도승들의 예배 장면을 접하고 차츰 그 신성神聖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과정이 소설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렌스 신부의 입을 통해 뉴스케테 수도원의 유래 및 수도생활의 원리를 설명한다.
예배는 그의 정신과 마음뿐만 아니라 그가 지닌 모든 감각의 축제가 되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그를 깊이 감동시켰다. 예배는 그를 높은 영적 세계로 휩쓸어 올렸다. 전에도 그는 몇 차례 정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예배는 처음이었다. 여기 뉴욕 북부의 한 작은 예배당에서, 그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전례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본문 46쪽)
2장 첫 열정
수도원의 매력에 이끌린 ‘구도자’는 로렌스 신부로부터 계속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몇 달 동안 종교적 황홀경에 심취했던 ‘구도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열정이 차츰 식어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로렌스 신부는 그러한 현상이 초심자들에게는 흔한 것이며, 진정한 영적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임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참으로 이것을 하기 원하는가? 수도자들은 매일 묵상 중에 반복해서 자신에게 묻는다. 그렇게 하는 한, 영성생활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투쟁이 된다. 투쟁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유혹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수도생활은 이 유혹과 정면에서 맞서려고 선택한 투쟁 방식이다. 수도생활은 값싼 은총을 선전하지 않는다. 그대신, 삶을 통해 일어나야 하는 전적인 변화의 길을 우리 앞에 제시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배우고 자신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확장되는 책임과 의무에 참여하라고 사람들을 부른다. 참된 변화만이 영성생활에 진정한 해결을 주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본문 59쪽)
3장 메타노이아
수도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도승들의 대화를 통해 영적 탐구와 변화의 길에서 ‘스승’의 존재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스승 중의 스승인 예수께서 말씀하신 “메타노이아!”의 참뜻에 대해 설명한다. 메타노이아metanoia란 ‘회개’를 뜻한다. 이 말은 TV나 거리에서 설쳐대는 근본주의 복음 전도사들이 즐겨 쓰는 유행어이다. 그러나 예수의 참뜻은 그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은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마음을 열 때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들은 회개에 대한 광범한 사실을 무시하고 좁은 개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회개가 참으로 포함하는 것, 즉 전적인 위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지나쳐버리고 있다. 한마디로, 메타노이아란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의식적?양심적 각성이며, 자각이며, 출발이다. 사물을 새롭게 봄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통찰을 시작하며 통합된 삶을 위해 변화를 시도한다. 우리의 전통에서, 이것은 가장 뛰어난 스승이신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본문 106쪽)
4장 거짓 자아를 넘어서
수도원 생활의 내적 원리 중 하나인 아스케시스askesis, 즉 일생에 걸친 ‘자제의 훈련’을 강조한다. 수도원 하면 보통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되지만, 아스케시스란 현세적 생을 경멸하는 극단적 금욕 실천과는 다른 인식적 토대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집 주위의 풀 뽑기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상적 의무를 다하는 일까지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영적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아스케시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 거짓 자아가 꾸며내는 거짓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는 참 행복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며, 거짓 자아를 벗어나 현실과의 소통을 위해 큰 거리로 나서고자 하면,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벽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때로 그것은 친구를 돕는 일일 수도 있고, 성심 성의껏 일상사에 임하는 태도일 수도 있으며, 기꺼이 다른 사람의 심부름을 맡아 하거나, 고집스런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또는 감사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며 표현하는 일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아름다운 일몰을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돌연 작은 세계를 벗어버리고 뛰쳐나오기도 할 것이다. 자진해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성심껏 책임지면서 ‘지금 이 현실이 나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충실하게 응답할 때, 자기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고자 하는 거짓 자아를 탈출하여, 타인들의 신선한 공기를 비로소 숨쉬게 되는 것이다. (본문 146~147쪽)
5장 영적 수련은 기교가 아니다
서점마다 넘쳐나는 책들 속에서 우리는 영적인 삶에 대한 내적 욕구들을 해소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영성을 부추기는 이러한 책들은 특정한 기술을 통해 영적인 삶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문제는 그러한 기술이 진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정신과 마음의 변화, 태도와 행동의 변화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개인의 울을 넘어 공동체적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풍부한 영적 에너지를 풀어놓음을 강조한다.
로렌스 신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혼자서 영성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소위 영성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이완된 기분 사이를 오가며 그네 타기를 하기 위한 피로회복제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문제의 뿌리를 찾고자 의미를 탐구하며 참된 신념과 영감에 의존하는 대신에 말이죠. 그 결과 ‘영성’은 사람들의 ‘마지막 약물’이 되어가고 있어요. 영적 테크닉이라고 자처하는 이 해괴한 기술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유해한 개인주의를 사회에 만연시키고 강화시키며 조장하고 있어요.” (본문 170쪽)
6장 나는 누구인가
뉴스케테의 수도승들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수도원에서 발견한 뜻밖의 사실은 하느님을 발견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점점 더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절대자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더 잘 아는 것이 진정한 영성생활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하느님은 저 먼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자기 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기애에 갇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크리스토퍼 수사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실은 자신을 알면 알수록 다른 사람에게 동정적이 되고, 접근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요. 새로운 자기 이해로써 보다 깊은 곳에 있는 공통의 인간성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실적으로 보다 잘 이해할수록, 사회의 불의나 고통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는 사고와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자기 이해는 우리에게 이런 성향을 제압하라고 도전합니다. 따라서 자기 이해를 위한 노력은 분별없는 자기 몰두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본문 193쪽)
7장 거룩한 독서
8장 거룩한 독서의 실천
영적인 수련에 있어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거룩한 독서는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묵상에 빠져드는 것으로, 예로부터 수도승들이 애용해왔다.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익하게 경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묵상 방법이다.
오늘날의 독서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인격적 변화를 지향하기보다는 정보를 축적하고 즐기는 데 집중하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자기 성장에 관한 많은 책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되찾아 읽는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마저 서둘러대며 자기들이 얻은 지식을 쳐들고 흔들어대다가는 곧 책장에 처박아버린다. 이렇게 해서 이해도 하기 전에, 알고자 하는 시간을 전혀 가져보지도 못한 채, 거대한 지식의 물결에 휩쓸려 질식당하고 만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저 식상한 음식으로 끝나고 만다. (본문 263~264쪽)
9장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를 혐오하고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한다. 육체적 욕망은 버리고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 육체를 소중히 갈고 닦음으로써 즉 인간성을 오롯이 발현시킴으로써 진정한 신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원론에 근거한 성성聖性의 개념을 고집하려면 몇 가지 선택이 불가피하며, 이것은 모두 문제가 된다. 1)우리에게 고유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고 무시하든가 2)전력을 다하여 육체와 싸우거나 3)결국에는 자포자기함으로써, 영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버리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성성이란 전인적 인격으로 도전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가치를 균형 잡고 통합하며 식별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호된 시련이며, 단번에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이야말로 어떤 종교 생활과 영성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문제이고, 참된 성성의 핵심이다. (본문 292~293쪽)
10장 전례로의 초대
수도원 생활에서 전례典禮가 갖는 위치와 의미를 논한다. 전례란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 의식을 의미한다. 전례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의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된 가장 고결한 욕망과 열망을 깨닫게 되며, 그 속에서 진정으로 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독자들을 특정 종교로 개종시키거나 회심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나 욕심은 아니다. 우리의 의도는 누구에게나 유익을 줄 수 있는 인생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는 데 있다. 이 작업을 통해 제시된 원리들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보편적이고 빼어난 진리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리스천 수도승으로서의 경험과 이해를 이야기함으로써만, 이 원리들을 참되게 증거할 수 있다. 전례와 예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생의 중심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325쪽)
11장 사랑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그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말이라서 더 이상의 영적인 울림을 전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도승들은 ‘사랑’이란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아가페, 즉 다른 사람에 대한 항구한 선의, 그 혹은 그녀를 더 이상 ‘객체’로 다루지 않고 그 사람 자신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이 말은 전에도 들었어. 별로 새로울 거 없잖아!” 우리에게는 사랑을 일종의 이론적 이상이나 추상적 관념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그렇게 듣고 말하는 동안, 우리의 교활성은 현실을 은폐시키고 참 사랑의 실천에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슬며시 외면해버린다. 사랑이란 인간에 대해 보편적으로 막연하게 느끼는 온정 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안락한 가정에서 가난하고 오갈 데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별로 주의를 끌지도 못하며, 그저 평범하게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본문 375~376쪽)
12장 즐겁게 일하라
수익 사업으로 셰퍼드를 사육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건한 수도승이 개를 키우는 잡일을 하다니!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노동의 의무가 하느님을 찾는 일을 방해하며, 고상한 영적 종교적 환경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자신의 일이 영성과 건강한 삶에 대해 갖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관계성을 깨달을 때, 노동을 곧 생기 넘치는 삶의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 방식은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 있다.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집 안을 청소한다면, 우리의 영적 지향은 한결 명백해지며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걱정, 불안 같은 사소한 관심사들이 그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이것을 시도하고 바라보라. 일과 싸우지 말라. 단지 집이 깨끗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조용히 조심스럽게 착한 일을 하라. 주의가 산만해지거든 즉시 일에 다시 집중하라. 일의 좋은 의미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419쪽)
13장 용서의 힘
용서는 가장 강력하고 본질적인 인간 경험 중 하나이며, 우리로 하여금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게 하고 좀더 자신과 이웃을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용서란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주 독특한 인간 현상이기도 하다. 용서의 본질적 효과 중 하나는, 용서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용서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수도승들은 용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평화의 창조자’라고 말한다.
“……세상은 너무나도 이런 유형의 용서를 잊고 있다고 생각하네. 공동체의 사업 관계로 바깥에 나갔다가 자동차에 붙은 스티커를 본 적이 있는데, ‘평화를 원하는가? 정의를 위해 싸우라!’라고 쓰여 있더군. 하지만 용서에 대한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 ‘여러분의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쓰인 스티커를 본 적이 없어. 진정한 용서 없이 정의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하려는 것일까? 정의라고 부르는 것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형제자매들을 정의의 제단에서 희생시키는 자만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네. 성서에도 있지 않던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치 않노라…….’” (본문 461~462쪽)
♧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뉴스케테의 수도승들The Monks of New Skete 뉴스케테 수도원은 미국 뉴욕 주 북부의 한적한 산 속에 위치해 있다. 뉴스케테의 수도승들은 원래 로마 가톨릭 전례를 따르는 프란치스코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동방정교회 전통의 이상과 정신에 매혹을 느낀 그들은 고대 사막 교부敎父들이 보여준 수도생활의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출발 당시 단돈 15달러밖에 없었던 그들은 1966년 케임브리지 근교의 산 속에 정착하여 목수 일을 배워가며 3년 만에 직접 수도원을 지었고, 이집트 스케테 사막에 존재했던 크리스천 최초의 수도 거주지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뉴스케테’라고 명명하였다.
뉴스케테의 수도승들은 거창한 사제복 대신 평복을 입고 셰퍼드를 키우며 자급자족한다.(이들의 개 사육법을 담은 책 《뉴스킷 수도원의 강아지들》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 면벽 수도의 고독한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박제화되고 상투적인 전통을 거부하며 자급자족하는 그들의 삶은 종교와 종파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역자
박효섭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부산 괴정감리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오랫동안 초기 사막 사부들의 영성과 수도원 운동을 연구해오다가, 2001년 경남 거제도 남단의 홍포 바닷가에 예수기도원The Hesychast priory of Hongpo을 세우고, 그곳에 수도공동체인 카리스마타 수도회The Charismata Community를 창설하여, 이를 중심으로 개신교 수도원 운동을 펼치고 있다. 카리스마타 수도회는 개신교계에 수도원 생활의 새로운 전통을 싹틔우려는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