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은 강하다. 강함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 20여년간 한국바둑계의 화두는 이 것이었다. 대략 강산이 두 번 변하고 정권이 네댓 번 바뀌었을 기간이었으나 조훈현은 바둑계의 독재자로 철권을 휘둘러왔다. 된장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명인이 줄기차게 대권에 도전했었지만 조훈현은 정상에 올라선 이후 어느 한순간도 타이틀 다관왕의 지위를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 이창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기사들은 조훈현의 전횡 앞에서 거의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평생의 라이벌 서봉수 9단조차도 특유의 오기를 어느 순간 접어버리고 이런 말을 했을까. “내 바둑의 스승은 조훈현이다. 그의 바둑에는 향기가 우러난다.” 수많은 바둑팬들이 서명인의 고백에 박수를 보냈다. 그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찬사였다. 오랜 세월 무수히 할퀴고 무진장 몰매를 맞았지만 그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 모퉁이에서 검을 칼집에 꽂으며 상대의 공력을 인정하는 무사의 한 마디- 우리는 서명인의 표현에서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멋진 맞수를 한 시대에 품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 그저 흐뭇할 뿐이다. 아무튼 그랬다. 조훈현은 엄청 강했다. 무엇이 강한가? 라는 명제로 월간 바둑지에서 특집을 꾸몄는데 결론은 모든 부분이 강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세계 최고의 포석감각, 휙휙 바람소리가 묻어나는 속력행마, 타이트하게 죄어오는 완력, 뼈를 분지르고 관절을 꺾는 파괴력,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함, 그리고 누구보다 빠른 형세판단, 궁지에서 발휘되는 가공할 흔들기 등등 그는 전신(戰神)이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진정한 강자였다. 그런 총체적 파워 앞에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스텝이 둔화되어버리는 공포감을 맛보아야 했다. ‘조훈현이 둔 수니까 뭔가 사연이 있겠지?’ 그가 아무렇게나 둔 수는 없었겠지만 때로 뻑수를 두어도 상대들은 마냥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강자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그는 충분히 강했기에 덤으로 그런 프리미엄까지 획득했던 것이다.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조훈현의 빈틈과 취약점이 조금씩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 바둑계는 조훈현 제국의 해질 날을 감히 예측조차 못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승부사 조훈현을 과연 누가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 왕국의 수명을 30년 이상으로 점치며 치를 떨었으리라.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조훈현은 정말 기분 나쁜 독재자일 수도 있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정상을 지키고 있다가 슬그머니 제자에게 왕관을 세습한 모양을 연출했으니 시원한 쿠데타도 없었고, 통쾌한 혁명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물러나지 않고 심심찮게 상금 두둑한 국제대회 타이틀을 헌팅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 저력의 바닥을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어찌됐든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속력’일 것이다. 그리 몸집 크지 않은 이승엽이나 이종범이 홈런을 쉽게 날리는 이유는 타이밍과 배트 스피드 때문이다. 조훈현의 스피드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그 스피드의 원천은 역시 천재성에서 나온 것일 테고......
<저단 기어의 힘> 자동차 기어의 1단과 2단은 힘이 좋다. 톱니바퀴가 굵어서 회전 수는 적지만 대신 바퀴를 끌어올리는 파워가 힘찬 것이다. 일본기원에 입단한 이후 초단과 2단 시절 조훈현은 마치 자동차 저단 기어처럼 강력한 드라이브로 파죽지세의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워낙에 한국에서 건너와 세고에 문하에 들어간 황태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입단 무렵 스승의 훈장수여식 기념대국에서 천하의 오청원 9단과 멋진 속기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고, 2단 시절에 청봉회(오청원, 임해봉의 이름을 딴 모임) 속기대국에서 당시 본인방이었던 임해봉 9단을 상대로 정선으로 두어 4집을 이기기도 했다.
2단이던 시절부터 파죽지세로 저단자들의 1,2차 예선을 통과하고 3차 예선에 오르면서 고단자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기전이었던 명인전과 본인방전에서 파천황(破天荒)의 8연승 기록을 남기며 정상권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물론 결승에서 야마베(山部俊郞)9단 같은 정상급의 실력자에게 가로막혀 본선 멤버가 되진 못했으나 모든 매스컴들이 경이적인 시선으로 조훈현을 조명하며 ‘꼬마 명인’ ‘미완의 대기’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무렵은 지쿠린(金竹林) 시대라 해서 김인, 오오다케, 임해봉 등 삼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 잠깐 유학한 뒤 귀국해 국내 각 기전을 석권한 김인,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타이틀인 명인위를 쥐고 있었던 임해봉, 그리고 아직 타이틀 홀더는 아니었지만 품격있는 바둑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오오다케 등 세 사람을 동양 3국의 대표기사로 손꼽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기타니 9단 같은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조(曺,趙)’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조훈현과 조치훈, 양웅이 장차 세계바둑계를 평정하리라 짚었던 것이고, 그의 선견지명은 어김없이 십 년 후 쯤 현실로 맞아 떨어졌다. 1970년- 17세의 조훈현은 33승 5패 1빅(승률 88.6%)의 기록을 세우며 기도상(碁道賞) 신인상을 받게 된다. 69년에 이시다가 받았고, 71년에 조치훈이 받았다는 것을 음미하면 당시 조훈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면 이기던 시절이 바로 이 때부터였다.
한편 서울의 가족들은 승승장구하는 훈현의 활약을 먼발치로 지켜보며 소리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보문시장의 야채행상으로는 경제여건이 좀처럼 나아질 리 없었지만 막내 아들의 대성(大成)을 기원하며 참으로 신산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존재 그 자체로 든든했던 큰 아들(조종현)은 월남에 포병으로 참전했고 딸들은 차례로 시집을 가 보문동 언덕배기(주소로는 삼선동) 자택은 늘 정적이 고여 있었다.
거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나가던 박순애 여사가 버스에 치여 7~8미터 정도 날아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시집간 딸들의 처지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않아도 깡마른 가장 조규상은 천식을 앓으며 나날이 말라갔다. 조훈현 홈페이지의 앨범을 보면 알겠지만 피골이 상접한 부친의 체중은 50Kg도 채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한달에 한 번 동경에서 배달돼오는 ‘기도지(碁道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