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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96번지.
지하철 천호역에서 내려 한강 방향으로 100m도 채 가지 않아 왼쪽에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의 긴 성벽이 구불구불 드러낸다.
초기 백제시대의 장대한 인공성곽은 시멘트 건물들이 겹겹히 둘러싸고 있었다. 아주 숨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는 찬란했던 한성백제의 문화가 숨 쉬고 있었다. 흙과 돌 등 발길에 차이는 모든 게 역사를 말하는 것같았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며 한강평지에 축조되어 초기백제의 국도(國都) 왕성임을 보여주고 있다.
풍납동 토성 북성 전체 길이가 지금은 홍수 등으로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서벽을 포함해 자그마치 3.5k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2.2km 정도이다. 이 도시의 총 면적 26만여 평의 국내 최대 규모이자,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이다.
소서노가 큰 아들 비루와 둘째 온조를 데리고 부여에서 남하해서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도읍지를 찾는다.
부아악에 오른 온조가 백제의 첫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내려다보았다.비류는 바닷가에 살고 싶어 했다.
이에 10신들이 “이곳은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接大海).
이런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여기다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의 도읍을 정하게 되는 과정을 삼국사기는 백제본기에서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온조는 한강의 유역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신의 보좌를 받으며 나라의 이름을 십제라고 했다.
1963년 풍납동이 광주군에서 서울시 천호출장소에 편입되면서 그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성안은 사적 지정에서 제외되었다. 성안을 왕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성벽만을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나머지는 사유지로 농사를 지었다.
관상수나 은행나무 묘목 느티나무 묘목을 심었다.성벽 위에는 민묘가 4기가 있었다.
거기에는 묘비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그만큼 풍납동토성은 철저히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세운 '풍납리토성사적비'가 남아있다. 그 비문은 이렇게 기록한다.
風納里土城 事跡碑
史跡 第11號
유래 - 이 토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사성(蛇城, 배암드리)으로서 그것이 "바람드리"(風納)로 변화한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사성은 백제의 책계왕(286~298)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쌓아 그 안에 궁(宮) 건물들까지 세웠던
거성(居性) 겸 술성(戌城)이었으나서기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하고 웅진(공주)로 천도하면서 폐성이 되고 말았다.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원래 둘레는 4천미터에 이르렀으나 한강쪽의 서벽(西壁)은 1925년의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3벽은 잘 남아 있으며 북벽의 경우는 아래 너비가 30m, 높이가 5m 이상이고 동벽에는 2군데 문자리도 남아 있으며
또한 이 성은 삼국시대 유일의 평지성(平地城)으로서 귀중하지만 1964년 서울대학교의 성안 발굴에 의하면 지하 3m 깊이에서
서기 3세기 축성을 입증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나와 백제건국 초기의 생활유적으로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서기 1973년 12월. 대한민국
하남위례성에 바로 궁궐을 조성하는 공사에 착수하여 3년만인 온조왕 17년 정월에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새 궁실을 지은 것으로 돼 있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부터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게 아니라,
온조가 서울지역에 도착하여 17년 동안은 하북 그러니까 한강 이북의 어딘가에서 임시로 거처하다가
기원전 4년에 이르러 하남 위례성에 궁실을 짓고 명실상부한 도읍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의 내용을 보면 온조왕은 기원전 6년 2월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으며 나라의 형세가 몹시 불안하다.
그러니 도읍을 옮겨야겠다. 짐이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매우 비옥하였다.
그러니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
하남 위례성으로 옮겨오기 이전에 임시 수도로 삼았던 지역이 어디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학자들 간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
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이형구선문대교수>
지금의 서울 사대문안 어딘가에 있다가 하남위례성에 궁궐을 짓고 옮겨갔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의견이 그렇다.
하남위례성으로 옮기 이전의 임시 수도를 하북위례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 위치를 두고는 삼각산 동쪽 기슭이라는 설과, 세검정 계곡 일대였을 것이라는 설,
혹은 중랑천 일대였을 것이라는 주장 등 의견이 분분하다.
온조는 한강 북쪽에 백제의 첫 도읍지를 정한다. 이 때 온조의 10신들이 권고한 도읍터이다.
형 비루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
그곳은 바닷가라 땅이 거칠고 습한 데다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좋지 못했다.
비루가 죽은 뒤 그를 따라갔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온조는 백성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 일행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 북성은 마한에 속한 땅이었다.
당시 마한은 상당 수준의 문화를 누리고 살았음을 각종 기록은 전한다. 중국의 후한서는 이렇다.
"마한 사람들은 밭농사와 누에치는 법과 고치솜과 피륙을 자을 줄 안다. 배만한 크기의 밤이 난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나 된다. 읍락은 서로 섞여 거처하며 역시 성곽은 없다.
흙으로 집을 짓는데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열어둔다. 무릎 꿇어 절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어른과 아이 및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금과 보석 및 비단이나 담 등은 귀하게 여기지 않고 소나 말을 탈 줄을 모르며,
오직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 옷에 매어달아 장식으로 삼거나 목이나 귀에 걸어 드리운다.
대부분 모두 맨머리에 드러난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에 짚신을 신는다.
사람들은 건장하고 용감하여 어린 나이에도 집을 짓는 등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새끼줄을 등골 가죽에 관통시키고 큰 나무를 매어 달아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건장하다 여긴다.
항상 5월이면 밭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밤낮으로 술자리를 열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춤을 출 때는 번번이 수십 명이 서로 따르며 절도 있게 땅을 밟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도 다시 이와 같이 한다.
모든 나라의 읍에는 각기 한 사람이 주관하여 하늘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한 소도(蘇塗)를 설치하여 큰 나무를 곧추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긴다.
그 남쪽 경계가 왜(倭)와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풍납토성 일대를 항공촬영한 모습을 비교하였다.
1925년(을축년) 7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서울에 383.7㎜의 큰비가 내려 많은 가옥이 침수되고 이재민이 생겼다.
이 당시 비가 잠시 그쳐 사람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침수된 곳을 매만지고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흘뒤인 7월 15일저녁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시작하자 사람들은 '개부심'한다고 생각했으나
집중호우로 변하여 19일까지 5일간 365.2㎜의 강우량을 나타냈다.
'개부심'은 장마로 큰 물이 난뒤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퍼붓는 비가 명개을 부시어 낸다는 우리 말이다.
명개는 갯가나 흙탕물이 자나간 자리에 앉은 검고 부드러운 흙을 일컫는다.
이른바 1,2차 홍수로 일컬어지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인도교의 최고수위가 11.66㎜를 기록했다.
이 기간 중 강우량은 753㎜였으니 서울 지역 연평균 강수량의 반이 열흘 사이에 쏟아진 셈이다.
이 반복된 폭우로 한강이 범람해 이촌동·뚝섬·송파·잠실·신천·풍납동 지역 대부분이 사라지다시피 했고
용산·마포·양화진 일대도 물에 잠겼다.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고 풍납토성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한강 물이 빠져나가면서
풍납동토성의 서북벽이 무너진 채 각종 유물과 함께 땅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안 남쪽 흙더미에서는 항아리 속에 담겨진 채 출토된 청동초두 1점을 비롯해 금귀걸이 구리로 만든 쇠뇌
백동(白銅)으로 만든 거울, 과대금구, 보라색 유리옥, 4등분한 원형 무늬가 있는 수막새 등이 나온 것이다.
커다란 토성의 성벽만이 노출돼 있던 풍납 토성이 홍수를 만나서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던 백제의 속살 일부를 살짝 드러낸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온 일제 식민사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이 유물을 토대로
"풍납토성이 바로 백제 초기 도읍지이자 그 도성인 하남위례성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895년 명성왕후 살해사건에 선봉에 섰던 '낭인' 중 한 명이다.아유카이 후사노신가은
1934년 11월 [조선]이란 잡지 제234호에 '백제고도안내기'라는 일본어 글을 싣고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다'라고
획기적인 주장을 편 것이다. 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백제 도읍지가 아니라는 학설을 굳게 믿었다.
1997년 1월1일 연휴 때이다.
서울 풍납동 현대아파트 공사 현장에 역사학자 이형구가 잠입했다.
“터파기 한 밑에 층까지 들어갔는데 위에서 한 5미터쯤 팠어요. 깊이 팠어요.
그런데 한 5미터 4미터 그 사이에서 목탄 층, 재가 탄 목탄 층이 보이고 그 부근에서 토기편이 막 널려 있어요.
기와편도 있고. 그걸 주머니에 있는 대로 집어넣었어요.
경비는 날 들여보내고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그걸 주머니 있는 데마다 내 눈짐작으로,
요 층에서 난 거는 아래 주머니에다 위층에서 난 거는 윗주머니에다 넣고 이렇게 해서
있는 대로 다 주머니에 넣고 부랴부랴 소형카메라로 사진 찍고 그러고 급히 나왔지요.“
그는 현장에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발견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신고했다.
그로 인해 공사는 중지되고 풍납동 지하에 잠든 백제사는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4m 정도 터파기를 하자 수막새 등 기와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토기 등 수천점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유물이 발굴되면서 아파트 공사는 중단됐고
현장 발굴 작업이 그해 11월까지 계속됐다.이제 역사학자 이형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성백제의 왕성 풍납토성을 발굴한 사람은 아닙니다.그 왕성을 찾아낸 발견자입니다."
유적 발굴은 누구든 언제든 할 수 있다. 유적을 찾아내는 발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땅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하였던 그 한성백제의 도성을 찾아내 30여년동안 한성백제의 왕성터를 밝혀내는 데 심혈을
쏟아온 학자로서 백제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고 그는 말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은 서울 풍납동 토성이 백제 도읍지 하남위레성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2003년 3월 29일자 경향신문 <한국사 미스터리> '서울 풍납토성'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1964년 필자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스승인 삼불 김원룡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편들이 나왔다.
선생은 이 결과를 정리하여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초기백제인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1967년 발표했다.
말하자면 김원룡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백제의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우리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왜곡되어 왔다.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중국 기록인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신봉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초기 기록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이 BC 1세기 때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낙랑 등 4개의 식민지를 세워 지배해왔으며
AD 4세기 후반에야 겨우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세웠다는 주장.
지금의 일본 역사 교과서도 이 주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일제의 주장을 겨우 1세기 정도 앞당겨 3세기 중·후반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한강변의 백제시대 성곽인 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교해 볼 때 풍납토성이 앞서 조성된 것은 분명해 졌다.
그리고 규모면에서나 출토된 유물과 유구의 비교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서 풍납토성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