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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실체, 나를 향한 머나먼 여정
이 청 준 의
「가면의 꿈」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을 보면 두 남녀가 기대어 있지만
각자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듯이 흰 천으로 가려져 있다.
이는 남녀 사이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의식적으로 만든 '나'를 드러냄을 의미한다. 작가 이청준 역시 「가면의 꿈」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번에는 영화 <밀양>의 원작인「발레 이야기」의 작가로도 유명한
이청준의 「가면의 꿈」을 읽으며 정체성의 개념과 문제를 생각해 보자
가면과 맨 얼굴의 경계
…(전략)…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여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어쩌면 나는 훨씬 전에 죽었고, 지금의 나는
전자두뇌와 기계로 구성된 가상 인격이 아닐까? 아
니, 처음부터 나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아
닐까?
-오시이 마모루, <공각 기동대>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오래되고 어려운 화두(話頭,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문제)임에 분명하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일 먼저 주어지는 것은 아마도 이름일 것이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이름이란 '나'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고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나와 세계와의 관계, 세계의 다양한 사건들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철학을 비롯해 예술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특히 렘브란트
(Rembrandt H. van Rijn, 1606~1669)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등 많은 화가가 자기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윤동주(1917~1945)와 서정주(1915~2000)와 「자화상」과 같은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나'라는 존재의 비밀은 손이 닿을 수 없고 발을 디딜 수 없는 세계의 저편에 존재한다. 이 물음은 마치 시시포스(Sisyphus)가 받은 형벌(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벌을 받음)처럼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행위와 같다. 이는 컴퓨터와 인터넷 등 첨단 과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원(1968~)의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에 나오는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끝없는 정보의 바다인 온라인 상에서도 '나'에 대한 검색 결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진정한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끊임없이 '나'를 검색해 보는 '나'일 뿐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매일 이용하는 우리의 생활처럼, 끊임없이 마우스를 클릭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나' 말이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사실 '나'란 명확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일본의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인 <공각 기동대>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킨다. 전자두뇌와 기계로 된 몸을 가진 인간은 전자두뇌가 프로그래밍한 허상(虛像)을 '나'라고 생각한다. 곧 '나'란 '나'라고 믿어지는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생명을 지닌 인간인가? 아니면 가상 인격을 지닌 기계인가?
심리학에서 섀도우(shadow)와 페르소나(persona)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섀도우는 인간의 개인적·폭력적 성격을 나타내는 반면, 페르소나는 사회적·이성적 특성을 의미한다. 곧 페르소나가 친절하고 인정많은 지킬 박사라면 섀도우는 지킬 박사와는 반대의 성격을 지닌 난폭한 하이드인 셈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감정을 표출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가면을 쓴다. 하지만 가면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본모습이 있다. 가면을 벗은 인간의 맨 얼굴이 바로 섀도우다. 그리고 '진정한 나'는 아마도 가면과 맨 얼굴,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한편 섀도우와 페르소나, 곧 맨 얼굴과 가면 사이의 괴리(乖離,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는 최근 온라인상에서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방과 얼굴을 직접 마주 보지 않아도 되고, 이름 대신 닉네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은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고 섀도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공격성을 띄게 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온라인상에서 악성 댓글을 다는 등의 문제는 개방과 참여의 장(場)이 되리라 기대했던 사이버 공간을 혼란과 무법으로 가득 찬 소돔(Sodom,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도시. 성적(性的)퇴폐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멸망하였음)과 같이 만들었다.
이명행(1957~)의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의 주인공인 성호경은 토론 사이트에서 '동고'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냉철한 논객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다른 퇴폐 사이트에서는 '댄싱 울프'라는 아이디로 사이버 섹스를 즐기는 바람둥이로 변신한다. 이 소설은 익명성이 제멋대로 판치는 가운데 넘쳐 나는 '거짓된 얼굴'을 들추어낸다. 나아가 현실과 가상현실의 구분을 넘어 ;도대체 진실과 사실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문학은 가장 개인적인 행위인 동시에 사회적인 행위다. 하나의 작품은 고독과 맞선 개인의 꾸준한 인내와 깊은 성찰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세상에 발표된 뒤에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문학은 개인과 사회가 마주치는 지점, 정신과 바깥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개인과 정신은 섀도우의 영역, 사회와 바깥 세계는 페르소나의 영역에 해당한다.
문학이 맨 얼굴과 가면 사이에서 위태롭게 방황하는 개인의 정체성, 곧 인간의 맨 얼굴과 가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리하여 문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 이른바 '인간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면의 눈물, 억압된 페르소나의 고뇌
이청준(1939~)의 「가면의 꿈」의 주인공 명식은 어렸을 때부터 소문난 천재로, 일류대를 나와 사법 고시에 합격한 전도유망(前途有望, 앞으로 잘될 희망이 있음)한 젊은 판사다.
이 소설은 그의 아내인 지연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들의 결혼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사실 명식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특이한 버릇이 있다. 어느 날 지연은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채, 밤 외출을 하는 남편을 목격한다. 명식은 퇴근 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집에 돌아오지만, 변장을 하고 밤 외출을 나간 뒤에는 생기를 회복한 얼굴로 돌아온다. 지연은 남편이 가면을 쓰고서 온전한 휴식과 안정을 얻는다는 사실에 동정심과 감동마저 느낀다. 게다가 남편의 밤 외출을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밤 외출이 점점 줄어든다. 지연은 궁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남편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남편을 보게 된다
이렇게 불을 끄고 앉아 있으니 밤이 좋군. 대낮은 얼굴이 너무 따가워서…… 누구나 결국은 그렇게 되는 거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얼굴 가득히 그 엄청난 대낮의 햇빛을 스스럼없이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잘 단련이 되고 있는 건 다행한 일이지. 하지만 그건 다행스럽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면……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의 가면을 튼튼하게 단련시켜 가고 있거든. 눈물을 흘릴 수가 없어……. 가면이 우는 걸 보았을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 가면의 눈물은 속으로만 흘리게 마련이거든…….
얼마 뒤 지연은 2층 창문에서 달빛을 받으며 비상(飛上)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남편을 목격한다. 그리고 남편의 가면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다음 날 아침 명식은 마당에 추락해 싸늘하게 식은 채로 발견된다. 결국 명식은 가면으로 사는 삶을 거부한 셈이다. 명식의 '가면 쓰기'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규범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삶이 그저 의미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의 사회적인 모습, 곧 페르소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가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가면을 씀으로써 본모습을 회복하려고 했다. 여기서 명식이 판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법(法)을 판결하는 판사는 사회적 권위와 가치 체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를 지닌 판사는 단 한 번이라도 법을 어기거나 사회 규범에 어긋난 일은 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근엄한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전장한 나'를 억압하는 페르소나는 인간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을 위협한다. '가면을 쓴 얼굴, 가면을 벗은 얼굴, 또 다른 가면을 쓴 얼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지, 커다란 분열과 혼란으로 인간을 빠뜨리는 것이다.
가면의 연기, 과장된 페르소나
「가면의 꿈」에서 명식의 가면 쓰기가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라면, 정이현(1972~)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여주인공 유리는 전략적으로 가면을 쓴다. 이 소설의 제목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역설적(逆說的, 겉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는)의미를 지닌다. 낭만적 사랑으로 대표되는 자유연애의 신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허구의 신화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겉으로는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재산에 따라 계급화·계층화되어 있다. 여기서 결혼이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통과의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연애 역시 이해타산(利害打算, 이해관계를 이모저모 따져 보는 일)이 중요한 상업적 거래다. 인간관계의 바탕은 사랑이 아니라 물질주의적인 욕망이며, 여성의 외모나 순결 같은 것도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유리는 이 같은 상황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결혼 시장에서 최상의 상품이 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유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자신을 꾸민다. 이것은 돈 많은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순결, 곧 '은방울꽃' 같은 외모와 품위를 갖추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낡은 팬티'로 비유되는 자신의 본모습을 최대한 숨긴다. 결국 유리는 미국 로 스쿨(law school) 유학생인 부잣집 막내아들과 잠자리를 함께하지만 그에게 결혼의 의무를 지우려 했던 자신의 순결을 확인하는 데 실패한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1922~1982)은 현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인상 관리' 이론을 주장한다. 인상 관리 이론, 곧 연극학적 이론은 이 세상 전체를 거대한 연극 무대로 보고, 모든 사람을 배우로 여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여러 사회적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셈이다. 결국 우리의 다양한 인간관계는 '가면 놀이'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가면을 강제로 벗긴다고 해서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러 방어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커다란 상처를 입고 만다. 따라서 실제 배우들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무대 뒤의 공간이 필요하다.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가면을 벗어 버리고 사회생활에 따르는 긴장감을 털어 낸다. 이러한 고프만의 이론은 주인공 유리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삶, 섀도우의 자폭
김영하(1968~)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페르소나에 갇혀 자폭(自爆)해 버린 섀도우의 비극을 그린다. 이 소설은 소설가인 주인공을 둘러싼 동창 친구 세 명의 삶을 이야기한다. 바오로는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고, 바오로의 옛 애인이었던 미경은 공인 회계사인 정식과 결혼한다. 정식은 대학 시절 열정적인 문학청년이었지만 회계사가 된 뒤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 이 소설은 샤미소(A. von Chamisso, 1781~1838)가 쓴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불행한 남자의 이야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원제는 '패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임)의 제목을 좇았다. 그림자란 인간의 어둡고 우울한 내면이자 일탈을 원하는 본능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김영하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도 그림자를 두려워한다. 여기서 그림자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빛과 어둠, 지킬 박사와 하이드, 페르소나와 섀도우 사이에 존재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이러한 경계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바오로와 미경은 각자 주인공을 찾아와 자신의 힘든 상황을 고백한다. 그 이유는 바오로는 미경을, 미경은 바오로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결혼한 미경과 신부인 바오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상대방을 절망에 빠뜨린다. 주인공은 이들을 보고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두움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고 슬퍼한다. 바오로 역시 종교를 가져도 채울 수 없는 삶의 공허함을 한탄한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정식이다. 그는 어느 날 지하 주차장에서 '자연 발화'라는 불가사의한 원인으로 불에 타 죽는다. 자연 발화란 어떤 원인도 없이 인간의 내부에서 불이 타오르는 현상이다. 정식은 성공한 회계사라는 여유롭고 편안한 삶과 어울리지 않게 절망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는 자신의 마음속 열정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내면에서부터 파멸한 정식의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페르소나와 문학으로 대표되는 열정적 섀도우는 결코 함께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림자 역시 존재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나타나지만 분명히 우리 자신의 일부다. 이를 부정하고 억누르다 보면 존재는 파멸의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갑자기 격렬하게 울부짖는다. 이는 열정을 잃어버린 삶, 열정을 질식시키는 세상에 대한 분노이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신과 친구들의 운명을 슬퍼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 준 최인훈(1936~)의 『화두』는 주인공이 러시아에서 기념으로 사 온 마트로시카 인형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주인공은 인형들을 차례로 꺼내서 나란히 세워 놓았다가 다시 차례 차례 맞춰 넣는다. 인형 안에 인형, 인형 안에 또 인형이 있는 마트로시카 인형은 기억의 반복과 재구성을 상징한다. 똑같이 생긴 인형이지만 크기는 다르다. 이것은 도무지 한 손에 잡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와 비슷하다. 내 안에 내가 있고, 또 그 안에 내가 있다. 그리고 열면 열수록 크기만 다른 똑같은 인형이 들어 있듯이, 치열한 의지로 반복하는 일상에서 '나'라는 정수(淨水)가 솟아난다. 주인공은 이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깨어 있는 주체적인 정신 상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밑는다.